2011년 10월 19일 수요일

"왜 삼성전자와 싸우나? 사주 일가와 싸워야지!"


이글은 프레시안 2011-10-18일자 기사 '"왜 삼성전자와 싸우나? 사주 일가와 싸워야지!"'를 퍼왔습니다.
[복지 꼬집기·]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

서울시장 선거전이 한창이다. 유권자들의 관심을 끈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나경원, 박원순 두 후보 모두 성공적이다. 선거 관련 쟁점이 연일 화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조금 허전한 것도 사실이다. '왜 보궐선거를 하게 됐는지'는 이미 잊혀진 듯해서다. 무상급식에 대한 입장 차이가 발단이었다. 보편적 복지의 성격을 띤 무상급식에 대해 오세훈 전 서울시장 등 보수 진영은 반대 입장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선별적 복지를 지지했다. 반면, 진보 진영은 보편적 복지에 가까운 입장이었다. 

무상급식 주민투표, 그리고 이어진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이런 두 입장이 서로 부딪히면서 다듬어지는 계기가 되리라고 기대한 이들이 꽤 있었다. 고령화 및 출산율 저하로 인한 인구 구조 변화, 여성의 사회 진출 확대로 인한 보육 수요 증가 등은 한국 사회가 복지의 틀을 새로 짜야 한다는 신호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이번 선거에서 복지의 큰 방향을 둘러싼 논쟁을 기대한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달랐다. 선거전은 네거티브 공세 일변도로 진행된다. 

지난 8월 주민투표 결과대로, 무상급식을 하기만 하면 복지 문제는 다 해결되는 걸까. 그래서 서울시장 후보들은 네거티브 공세에만 몰두하는 걸까. 그게 아니라는 걸 누구나 안다. 급식 문제는 복지 담론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무상급식을 제외한, 나머지 복지 담론은 여전히 토론의 사각지대에 있다. 

은 복지 담론의 사각지대를 조명하는 부정기 기획을 마련했다. 사각지대의 폭이 워낙 넓은 탓에 횟수와 형식이 고정된 기획으로는 오히려 한계가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 복지 문제는 사회 구성원 전체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문제인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아우르는 문제인 까닭이다. 또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얽혀있는 세금 문제와도 밀접하다. 이는 동시에 논쟁과 갈등이 그만큼 첨예한 분야라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렇다. 기업가가 원하는 복지, 노동자가 기대하는 복지는 전혀 다르다. 남성과 여성 역시 마찬가지일 게다. 또 지금까지 알려진 복지국가 모델이 대체로 경제성장 없이는 지탱하기 힘든 구조라는 점에서, 궁극적으로는 생태주의와도 부딪히는 면이 있다. 너도나도 복지를 이야기하지만, 이런 차이는 제대로 조명된 적이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차이 속에 숨어 있는 갈등 요소, 편견과 오해들이다. 이런 것들이 햇볕 아래 드러나지 않는다면, 향후 전개될 복지 논쟁이 건강하게 진행될 수 없다. 

이번 기획에서 첫 번째로 다루는 주제는 '기업'이다. 한국에서 복지를 이야기하면, 흔히 '좌파'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스웨덴 등 전통적인 복지 강국은 오히려 상당히 기업 친화적인 정책을 추진해 왔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한때 북유럽 모델에 관심을 뒀던 것 역시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복지를 강화하자는 주장을 재벌 친화적인 입장, 우파적 관점으로 봐야 할까. 그것도 아니다. 복지를 제대로 하려면, 경제 민주화가 필수적이다. 또 스웨덴식 복지모델을 기계적으로 따르는 것 역시 잘못이다. 지금처럼 비뚤어진 재벌 체제는 복지국가, 또는 복지사회와 양립하기 어렵다. 복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래서 어렵고 조심스럽다.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의 인터뷰로 첫 번째 기사를 시작한다. 이번 인터뷰를 포함해 향후 이어질 기사들에 대한 반론이나 보론 등은 언제건 환영이다.

한국에서 복지 논의가 활발해진 것은 이른바 1997년 IMF 체제의 부작용을 겪고 난 뒤였다. 신자유주의의 폐해에 대한 대안으로 주목받은 탓에, 기업 규제 및 노동정책과 동떨어진 복지 논의는 상상하기 힘들다. 재계에선 일찍부터 날을 세웠다. 대기업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했던 사회 구조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점을 몸으로 아는 것이다. 지난 8월 허창수 전경련 회장이 정치권의 복지 논의에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고 나선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현실의 복지국가들은 의외로 상당히 기업 친화적이다. 대표적인 복지국가인 스웨덴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꼽을 때도 늘 앞자리에 선다. 그렇다고 해서, 복지국가가 대기업의 전횡을 무턱대고 봐주는 체제인 것도 아니다. 사회가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준 대가를 정부가 세금으로 거둬들이고, 이를 투명하고 공정하게 사용하는 게 필수적이다.

이런 특징은 한국의 복지담론을 더욱 꼬이게 한 조건이기도 하다. 재벌 개혁이 중요한 사회 의제인 상황에서 어설프게 소개된 스웨덴식 모델은 자칫 재벌의 불법, 탈법 행위에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대기업과 복지국가 사이의 상관관계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을 만난 것은 그래서였다. 정승일 연구위원은 "대기업은 (복지국가의) 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논쟁적인 발언이다. 실제로 상당한 반론도 있다. 물론, 정 위원이 대기업의 불법, 탈법 행위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재벌 개혁의 취지를 부정하는 것 역시 아니다. 그에게 대기업과의 타협 지점은 대주주의 '경영권'을 보장하는 것뿐이다. 나머지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 예컨대 대기업의 비정상적인 고용 행태 등에 대해서는 몹시 비판적이다.

잘 알려져 있듯, 정 위원은 소액주주운동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는 시민이 대기업 주주가 돼 목소리를 내는 방식보다 기업에 대한 사회적 통제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대기업을 누가 소유하건, 이들 기업이 사회적으로 순기능을 하게끔 하는 게 우선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의 전세계적인 금융위기는 대기업들이 돈을 쌓아놓고 투자하지 않고 유동자본화 하면서 심화되고 있다"며 "G20 등의 국제적인 결의로 법인세를 공동으로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상당한 시간이 걸리리라는 전제가 뒤따랐다. 특히 그는 "앞으로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각 국가에서는 우리나라 진보 진영이 생각지 못한 혁신적인 조치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장기적으로는 세계 경제의 새로운 질서가 복지국가의 필수조건인 정부 재정 지출 확대를 가능케 하는 쪽으로 짜여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세계사의 큰 흐름은 다시 복지국가를 향하고 있다는 것


▲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 ⓒ프레시안(최형락)

한편 그는 '공정사회론'을 주장하는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의 주장에 대해서는 "김 소장은 소득이 낮은 쪽을 끌어올리는 데는 관심이 없고, 다만 '대기업-정규직'의 몫을 빼앗자고만 한다"며 "일부 집단의 특권에 대한 문제제기가 노동권을 축소하고 노조를 약화시키는 식이 되어서는 곤란하다"고 비판했다. '대기업-정규직'의 기득권 약화가 자동적으로 사회적 약자의 권리 신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는 "노조를 약화시키는 것은 해법이 아니다"라는 입장이지만, 지금의 대기업 노조를 무턱대고 옹호하는 것 역시 아니다. 그는 "현재의 기업별 노조가 아닌 산별 노조를 강제해 노동조합의 폐쇄성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기업 오너에게 경영권 보장하자…대신, 제대로 통제하자"

프레시안 : 대기업을 포함하는 '사회적 대타협'을 주장했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대표적인 반응이 '이건희 회장 일가가 발렌베리 가문(스웨덴의 대표적인 재벌 가문)은 아니지 않느냐'라는 것이다. 삼성으로 대표되는 재벌이 그동안 한국 사회에 끼친 해악이 워낙 컸던 탓이다.

정승일 : 그 말은 맞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문 역시 1930년대 노사정 대타협(살츠셰바덴 협약) 이전에는 지금의 삼성 사주 집안과 비슷했다. 1970년대 스웨덴 임노동자 기금 모델을 만들 때, 사보타주 공작을 한 것도 발렌베리 가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스웨덴이 복지국가가 되고 투명해지니까 욕을 안 먹는 것 뿐이다. 실제로는 우리나라의 삼성과 다를 바 없다. 복지국가를 만드는 과정은, 우리나라의 재벌을 감시하고 비판해서 바꿔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프레시안 : 대기업 대주주에게 경영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대주주에게 다중의결권을 보장하고, 황금주 제도를 도입하자고도 했다.

정승일 : 1주당 여러 개의 의결권을 보장하는 다중의결권 제도나 황금주 제도는 우리나라와 일본에만 없다. 복지국가인 스웨덴에도 있고, 반대 편인 미국에도 있다. 기업이 상장하고 싶을 때 적대적 인수를 막고 창업자를 보호하려면 꼭 필요한 장치다.

기업 창업자는 단순히 자산 증식 만을 노리는 게 아니다. 목적이 그것뿐이라면, 왜 굳이 창업을 하겠나. 창업자는 회사의 기본 정신, 가치를 유지하는 보루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기업가 정신이다. 미국 나스닥에서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 등 창업자들이 보호받는 것도 그래서다. 창업자의 정신을 유지하려면 자본시장 투기성에 기업을 노출시키면 안 된다. 한국 코스닥의 경우 오로지 '1주 1표' 논리만 적용되는 탓에 투기꾼이 많이 끼어든다. 또 상장한 기업들이 경영권 공격을 받는다.


▲ "사회적 타협 이전의 발렌베리가는 지금의 삼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프레시안(최형락)

2003년에 스웨덴을 방문했을 때 사민당 당직자를 만났는데 알고 보니 중소기업 사장이었다. 그에게 EU집행위원회가 주식투자에 방해가 된다면서 경영권 방어 제도를 없애려고 하고 이에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이 반발해서 소송을 했던 이야기를 물었다. 이때 결국 스웨덴이 이겼는데, 다른 나라 뭉칫돈이 들어오면 증권시장이 크게 흔들릴 수 있는 작은 나라들은 대부분 다중의결권 제도를 폐지하는데 반대한다.

그에게 '스웨덴의 황금주 제도는 너무 재벌 편을 드는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이 사람은 '나는 기존 모델에 찬성이다. 내 회사가 EU통합 이후 매출이 늘었다. 그러나 EU집행위가 말하는 대로 하면 나는 내 기업을 상장할 수 없다. 스웨덴 정부가 잘한 것이라고 본다'고 하더라.

우리에게도 벤처기업의 발전 등을 생각할 때 황금주 제도가 필요한 면이 있다. 나스닥은 일반 증권시장과 달리 상장 기업을 키워주는 기능이 있다. 복지국가와 무관하게 자본시장의 순기능을 발전시키고 투기성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런 제도가 꼭 필요하다.

프레시안 : 재벌의 경영권을 인정해주자고 하면, 반발이 거셀 듯하다.

정승일 : 진보진영에서 대기업은 나쁜 놈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확히 해야 한다. 필요한 것은 '계급투쟁'이지 '반기업 투쟁'이 아니다. 그리고 진보세력이 대기업을 적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대기업을 함께 가져갈 자산으로 여겨야 한다. 삼성전자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데 황금알을 이건희 일가가 독차지 하려고 해서 문제인 것 아닌가. 황금알을 낳게 하면서도 그 성과를 공유해야 한다. 자본시장의 투기성을 줄이는 것은 복지국가를만들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프레시안 : 재벌을 견제하는 방법으로, 한때 소액주주 운동이 주목을 받았다.

정승일 : 대기업에 대해서는 소유보다는 통제에 더 중점을 둬야 한다고 본다. 재벌 같은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결국 목적은 재벌이 순기능을 하게 하는 데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누가 소유하느냐' 보다는 '어떻게 통제하느냐'가 핵심이다. 기업의 투기와 하청기업 수탈 등을 감시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노동조합을 강화하고, 노동조합이 기업 경영을 감시하는 방식이 가능하다. 독일에선 회사법으로 종업원 대표가 사외이사로 들어가게 돼 있다. 이밖에도 정부의 통제, 여론의 통제, 이사회 통제, 노동조합의 감시 등이 다각도로 진행된다. 이런 통제를 제대로 하는 게 관건이다.

소액주주 운동은 이런 여러 통제 방식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바로 '주식시장의 통제'다. 그런데 한번 살펴보자. 삼성전자 주식이 100만 원대다. 이걸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어차피 '대한민국 상위 2%'다. 그렇다면, 소액주주 운동은 '대한민국 상위 2%'가 삼성전자를 통제하자는 것이다. 이게 재벌 개혁 운동일까. 나는 권력을 시장에 넘기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본다.

"이건희와 싸우는 게 계급 투쟁이다. 삼성전자와는 왜 싸우나?"

프레시안 : 기업 입장에서 보편적 복지가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대기업들은 적어도 정규직에게는 상당한 복지를 제공해 왔다. 직원 자녀에 대한 학자금 지원, 의료비 지원 등이다. 보편적 복지가 잘 이뤄지면, 대기업들은 굳이 이런 비용을 쓸 필요가 없다. 보편적 복지로 기업이 얻게 되는 혜택인데, 이런 이익은 사회가 거둬들이는 게 맞다고 본다. 기업이 할 일을 사회가 해줬으니 말이다. 보편적 복지 관련 논의에서 이런 이익을 어떻게 환수할지도 중요한 문제다.

정승일 : 답은 법인세다. 법인 그 자체의 이익은 중립적이다. 배당을 받기 전까지는 대주주의 것도 아니고 상여금으로 분배되기 전까지는 직원의 것도 아니고, 경우에 따라 공적기금으로 적립할수도 있다. 다시 말해 권력 관계에 따라 누가 가질지가 정해지는 중립적인 이익이다.

스웨덴도 과거 대기업법을 만들어서 기업 이익의 일정 비율을 적립해서 투자하도록 했다. 법인기업은 생산력 발전과 일자리 창출 등 생산적 투자에 집중하도록 하고 기금을 적립하게 했다. 법인세를 덜 거두면 아낀 돈을 배당해버리기 때문에 법인세를 적정하게 거둬야한다.

문제는 삼성전자가 유럽이나 중국에 지사가 있는데 법률상으로는 독립법인이다. 법인세를 올리면 중국 등으로 이익을 이전할 가능성이 있다. 이는 국세청에서 잡아내기 힘들기 때문에 법인세는 국제적인 공조를 맞추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는 법인세가 25%인데 아시아가 다 비슷한 수준이다. 그래서 법인세 인상은 쉽지가 않다. 다만 향후 세계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한 공조 과정에서 국제적인 합의가 생길 수는 있다. 전세계적으로 정부 재정 적자가 심각한 반면, 글로벌 기업들은 현금을 쌓아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돈이 유동자금으로 떠돌면서, 세계 금융 위기를 더 악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G20 공동 결의 등 국제 공조를 통해 법인세를 동시에 올릴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각국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복잡해서 당장은 쉽지가 않다. 오랜 시간이 걸릴 게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올릴 수 있는 것은 소득세다. 배당 받고 이자 받은 사람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다. 진보 지식인들은 종종 계급투쟁을 이야기하는데, 이건 개인적인 영역이다. 이건희 회장의 소득과 싸우는 게 계급투쟁이다. 삼성전자와 싸우는 게 계급투쟁은 아니다. 삼성전자는 계속 수익을 내서 세금을 제대로 내게끔 하면 된다. '황금알을 낳는 오리'는 계속 알을 낳게끔 해야 한다. 그 오리가 누구 소유인지는 부차적인 문제다.


▲ "머지 않아 국제적으로 새로운 체제가 나타날 것이다. 국제적인 공동 결의로 법인세를 올릴 수 있지 않을까." ⓒ프레시안(최형락)

"기업별 복지, 받을 땐 좋지만 정작 필요할 땐 없다"

프레시안 : 한국의 경우, 그간 기업별 복지가 일반적이었다. 기업에 취직하면, 기업이 개인의 모든 복지 수요를 감당하는 방식이다. 젊은이들이 대기업 취업을 선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승일 : 산별 노조가 아닌 기업별 노조 체제에서 각 노조들이 열심히 싸워 만들어낸 결과다. 그러나 이것은 정규직 노동자들만 높은 임금과 복지혜택을 받는 결과로 이어졌다. 대기업 정규직은 특권층이 됐지만, 비정규직과 중소기업 노동자는 열악한 상태로 방치됐다.

물론 대기업 정규직이라면, 기업별 복지에 별 불만이 없다. 그러나 한계 역시 분명하다. 직장에 종속된 복지인 까닭에, 직장에서 쫓겨나는 순간 모든 것을 다 잃게 된다. 복지가 가장 필요한, 가장 위험한 시기에 복지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한진중공업이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해고에 대한 저항이 격렬한 이유다. 대기업 정규직은 굉장한 사내 복지를 누리다 한순간 모든 것을 잃는다. 어쩌면 이들로선 싸우는 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그리고 공정성의 문제도 생각해볼 수 있다. 모든 혜택이 정규직과 공기업, 공무원에게만 주어진다면 젊은이들은 여기에 속하기 위해 죽기살기로 경쟁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경쟁이 꼭 공정한지에 대해 의문이 있다. 그리고 같은 업종에서 똑같은 일을 하는데, '어느 회사에 다니느냐'에 따라 복지 혜택에서 큰 차이가 난다면 공정하지 않다.

프레시안 : '공정사회론'을 주장하는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은 '대기업-정규직 노동자의 기득권'을 지속적으로 문제 삼는다. 공정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복지국가를 주장하는 측과 비슷하지만, 다른 점에서는 대척점에 서 있다.

정승일 : 특권적 복지에 대한 문제제기가 노동권을 축소하고 노조를 약화시키는 식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기업별 복지 역시 그냥 생긴 것이 아니라 노조가 파업하고 투쟁해서 만든 결과고 진보적인 성과다. 노조를 약화시킬 게 아니라 복지국가가 개입해서 보편적인 복지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당연히 있어야 한다. 다만 기업별 노조가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기업과 공기업이 주를 이루고 하청기업이나 중소기업을 아우르지 못하는 것이 지금 한국 노동조합의 한계다. 나는 법으로 강제하는 한이 있어도 기업별 노조는 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산별노조를 강제해 노동조합의 폐쇄성은 무너뜨리는 게 맞다.

김대호 소장은 아래에 있는 낮은 임금 소득을 올리거나 이들을 포함한 노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대기업, 정규직의 몫을 빼앗자고 한다. 이들의 몫을 뺏는다고 그게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돌아갈까. 그렇지 않다. 사주만 인건비 줄었다며 좋아할 뿐이다.

프레시안 : 하지만 만약 기업별 노조가 산별 노조로 전환되면 대기업 노조에서는 포기해야 하는 부분이 생기는 것 아닐까?

정승일 : 이를테면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에 대해 현대차 노조는 큰 관심이 없다. 그건 사실이다. 단체 협상에 건강보험을 넘어 암, 중상, MRI 촬영비용 등을 회사에서 지불하도록 돼 있어서 그렇다. 그러나 건강보험의 범위를 늘리는 것에 현대차 노조가 반대할 이유는 없다. 자녀 대학 등록금의 경우도 회사에서 지원이 나오지만 만약 국가가 반값, 무상 등록금을 실현한다면 노사협상 때마다 회사와 싸울 필요가 없어진다.

말하자면 연대의 정신으로 해야지 '너희 것을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겠다'는 식은 진보진영에서 택할 태도는 아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우리나라 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의 삶이 행복한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어지는 야근, 특근에 쉬는 날도 얼마 되지 않고 버는 돈은 사교육비로 계속 나가는 게 현실 아닌가. 복지국가 운동은 이걸 바로잡자는 것이다.


▲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몫을 빼앗는다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혜택이 늘어나는 게 아니다. 사주의 배만 불릴 뿐이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를 두고 사회적 안전망의 미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해고자에 대해 최소한의 안전망도 없는 사회 구조가 문제라는 게다.

정승일 : 일각에선 이른바 '유연안전성' 논리(해고를 쉽게 하는 대신, 사회안전망을 강화해서 해고자를 보호하자는 주장)를 이 문제에 적용한다. 하지만 이건 사기다. '유연안전성' 내세워서 '안전성'이 강화된 사례가 없다. '안전성'을 갖추는데 빠르면 20년 길면 50년 가량 걸린다. 반면, 해고를 쉽게 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지금은 노동시장이 너무 유연화돼 있는 게 문제다. '해고는 어쩔 수 없고, 대신 사회안전망 만들어 주겠다'라는 주장은 비현실적이다. 해고 당하면 당장 길바닥에 나앉는데, 사회안전망은 언제 생길지 모르지 않는가. 안정적인 고용관계를 만드는 과제는 타협의 영역이 아니다.

"이제 '선진국형 싸움' 할 때다"

프레시안 : 스웨덴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제'가 운영될 당시, 이익이 낮은 기업들이 다수 '구조조정' 됐다. 한국에서 산업별 노조가 생기고 같은 제도가 적용되면 중소기업은 타격을 입지 않을까.

정승일 : 물론이다. 그래서 그런 식의 구조조정을 10년, 20년의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이행해야 한다다. 다만 부실 기업의 구조조정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복지국가, 선진국으로 가면서 노동자들이 월급 100만 원 받도록 방치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노동자에게 적절한 임금을 줄 능력이 없는 기업은 구조조정 되는 게 옳다. 그러나 우선순위는 잘 따져봐야 한다. 부실기업 구조조정보다 사회안전망 강화가 우선이다. 구조조정으로 생겨난실업자를 보호할 수 있는 사회안전망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프레시안 : 한국 경제는 대기업 의존도가 지나치다는 목소리가 높다. 부실 중소기업 구조조정이 이런 문제를 심화시킬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정승일 : 이른바 진보 지식인들이 스웨덴 모델보다는 덴마크 모델이 낫지 않느냐는 말을 종종 한다. 덴마크 경제는 중소기업 중심이고 스웨덴은 대기업 중심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핵심을 비켜간 지적이다. 이런 차이는 해당 국가가 주력하는 '업종'의 차이일 뿐이기 때문이다. 업종의 특성상 중소기업으로 운영하는 게 대기업에 비해 생산성이 높고 합리적인 분야가 있다. 덴마크는 농업국가이고 '협동조합' 전통이 강하다. 농업 분야의 협동조합이 성공적으로 운영되면서, 그 모델이 뛰어난 기술자가 고급 제품을 만드는 분야로 확산된 것이다. 이건 그냥 덴마크가 주력하는 산업 분야가 무엇인지에 따른 문제일 뿐이다. 모든 나라가 극소수만 쓰느 고급 스피커 생산에만 몰두할 수는 없다. 역시 모든 나라가 다 농업국가일 수도 없다. 나라마다 주력하는 산업이 조금씩 다른 것은 어쩔 수 없고, 이런 차이에 따라 경제의 대기업 의존도 역시 달라진다. 현실적으로 자동차, 조선 등은 당연히 대기업이 주도할 수 밖에 없다.

다시 대기업 문제로 돌아가자. 스웨덴의 발렌베리 그룹을 흔히 모범 사례로 이야기한다. 그런데 역사를 한번 살펴보자. 유럽에 있는 기업 집단 대부분은 1930년대 대공황의 산물이다. 대기업이 망했는데 채권은행들이 부채를 가지고 있다가 주식으로 돌렸다. 그게 지금의 기업집단이다.

반면, 우리는 은행법에 따라 산업과 은행을 분리하게 되어있다. 은행은 다른 대기업이나 해외 자본에 매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독일의 벤츠는 대주주가 없다. 발명가 벤츠가 만든 회사가 30년간 운영되다 대공황 때 부도가 났는데 당시 최대 채권자가 '도이체 방크'라는 최대 은행이었다. 이 은행이 최대주주가 되고 창업자가 물러났다. 스위스, 이탈리아 등에도 금산분리의 원칙이 없다. 은행이 대주주, 증권사 역할을 다하는 곳을 유니버셜 은행이라고 한다.


▲ "지금 재정 위기를 겪고 있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머지 않아 상상 이상의 진보적 조치가 나타날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우리는 미국식 은행제도를 들여오는 바람에 금산 결합을 막았지만 유럽식으로 바꾼다고 해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위기가 터졌을 때 국가자금을 투입해서 살려내는 것은 대공황 때 나치는 물론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 모두 하는 것이다. 국가자금을 투입해 1차적으로 민간 은행을 살리고, 대기업의 대주주가 되게끔 한다. 우리는 그 사슬을 끊어서 각자 알아서 살으라고 하니까 수익성 지상주의가 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과거형'이 아니다. 지금 진행 중인 미국이나 유럽의 재정위기는 간단히 해결될 수 없다. 아마 이들 나라에서 아마 우리나라 진보진영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조치가 나타날 것이다. 1930년대, 혹은 그 이상의 조치가 다시 돌아올 것으로 본다. 금융시장을 재편하고 투기자본이 설 틈 없게 하면서 국민을 먹여 살려야 하는 시기가 오고 있다.

우리도 제도를 다시 정비할 때가 됐다. 우선 세금을 많이 거둬야 한다. 그리고 최저임금을 높이고 비정규직을 규제해야 한다. 이른바 '소득 재분배'를 국가가 강제해야 한다는 게다.또 기업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가능케 하는 장치들을 도입해야 한다. 그래야 대기업 대주주들에게 경영권을 보장해줬을 때 생길 부작용을 막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국민의 소득이 늘리고 내수시장을 키워야 한다. 세계 금융 위기 이후의 질서는 이 방향이다.

프레시안 : 하지만 재벌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정승일 : 사실 이제까지 한국 사회가 선진국형 싸움을 한번도 겪은 적이 없다. 그런데 이제 제대로 된 싸움을 하는 거다. 재벌 개혁 이런 게 다 개발도상국의 싸움 아닌가. 이제 진짜 부자 증세 하고 소득세 늘려야 한다. 이래야 선진국형 정치를 제대로 하는 것이다. 동시에 기업에 대해서도 선진국형 시각을 가져야 한다.

"복지국가가 원전 폐쇄도 먼저했다"

프레시안 : 기업과 경제 성장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인 입장이다. 그런데 이런 입장이 생태주의와는 양립하기 어렵다.

정승일 : 원자력 산업을 예로 들어보자. 원자력 발전소 노동자들은 죽자사자 원전을 옹호한다. 원전이 폐쇄되면, 일자리를 잃기 때문이다. 여기서 복직국가가 힘을 발휘한다. 결국 고용보장의 문제 아닌가. 일자리를 잃어도 생활이 가능하다면, 또 새로운 직업을 얻는 게 가능하다면, 지금처럼 극단적으로 원전을 옹호할 리는 없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 원자력 발전을 정지하기로 한 게 독일과 스웨덴이다. 이게 시사하는 점이 크다. 모두 사회안전망이 견고한 나라들이다. 원전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미래를 불안해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선택이다


▲ "복지국가에서 문화와 관광 산업이 크게 발전할 수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복지국가 노선이 성장을 멈추자는 게 아니라면, 산업정책도 중요하다. 한국이 복지국가를 지향할 때, 궁합이 잘 맞는 산업은 어떤 걸까?

정승일 : 사람들의 삶이 안정화되고 여유시간이 늘면 외식, 건강, 실버산업, 레저 등의 산업이 발전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월소득이 안정적인 노인이 거의 없기 때문에 생각하기 어렵지만 스웨덴이나 독일 등은 인구 비례 관광 인구가 최대치에 달해있다. 관광의 개념 자체도 다른 게 이들은 한달씩 휴가를 쓰면서 여행가는 지역의 공부를 하고, 이로 인해 출판 산업도 동시에 발전된다. 지금 정부는 예술기관들도 민영화한다고 하는데 사실은 거꾸로 돌려야 한다. 국립 전시관, 예술 문화 등을 개방하고 시장 자체를 키워야 한다. 이런 것이 다 산업 정책이고 진짜 서비스 산업이다. 공공 서비스업과 고차원적인 서비스업을 키우는 게 복지국가다. 이러한 산업은 노동력 집약 산업이라 고용 유발 효과도 크다.

프레시안 : 보통 서비스업을 살리자는 주장은 신자유주의 진영에서 많이 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서비스업은 법률, 의료, 금융 등이다.

정승일 : 의료 등을 민영화 하자는 주장과는 정반대 방향이다. 공공 서비스 분야를 키워야 한다. 특히 문화, 예술, 과학 등을 키워야 한다. 복지국가를 지향한다면, 이들 분야에서 일하면서 먹고사는 게 가능해야 한다. 한국경제의 치명적인 문제는 수출만 잘하고 내수가 위축됐다는 점이다. 공공 서비스 산업 중심으로 내수를 진작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박물관, 미술관 등에 대대적인 공공 투자가 있어야 한다. 이는 공교육 강화와도 연결된다. 복지국가의 중산층을 위한 수준 높은 예술 공공 교육이 이뤄지도록 하자는 것이다.



/채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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