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31일 수요일

[사설]가처분 결정을 빌미로 제주기지 강행 마라


이글은 경향신문 2011-08-30자 '[사설]가처분 결정을 빌미로 제주기지 강행 마라'를 퍼왔습니다.
정부와 해군이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 활동을 벌이고 있는 강동균 강정마을회장 등을 상대로 낸 공사방해금지 등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졌다. 제주지방법원은 그제 “강씨 등 37명과 강정마을회 등 5개 단체는 신청인의 토지와 공유수면에 대한 사용 및 점유, 항행을 방해해서는 안된다”며 “이 명령을 위반하는 사람이나 단체는 위반행위 1회당 200만원씩을 신청인에게 지급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정부와 해군 측은 당장 공권력을 투입해 공사 현장에 차단막을 설치할 태세여서 공사장 주변이 초긴장 상태다. 

이번 법원의 결정은 사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유감스러운 결정이다. 법원의 결정은 해군이 토지를 수용한 상황에서 자유롭게 공사를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지만, 공사장 앞 시위와 공사장 출입 저지는 마을 주민들의 최후의 의사표현 수단이다. 그런데 이번 결정으로 잘못된 절차에 의해 시작된 공사를 바로잡고자 하는 주민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놓여있다. 법원이 해군기지 공사를 강행하려는 공안대책 회의를 도운 셈이다. 더구나 경찰은 같은 날 강정마을회와 시민에게 경찰서 앞과 강정마을 일대에 신고한 집회에 대해 9월15일까지 옥외집회시위를 금지한다고 통고했다. 집단 폭행·협박 등으로 공공의 안녕질서에 직접적인 위협을 끼칠 것이 명백한 집회·시위를 금지할 수 있도록 한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을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지난 5년간 폭력시위를 한 적이 없는 주민들의 집회를 갑자기 폭력집회로 규정해 집회금지를 통보한 것은 표현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를 침해한 것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다. 결국 법원의 결정과 뒤이은 경찰의 집회 불허로 주민들의 손발이 모두 묶이게 됐다. 국가 안보와 주민의 생업이 걸린 중대 사안에 대해 비폭력적인 의사 표현조차 할 수 없게 한 것은 표현의 자유 침해다. 

법원의 결정으로 해군이 공사를 강행할 법적 권리를 얻은 것은 맞다. 그러나 이를 빌미로 서둘러 공사를 강행한다면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사태를 더 키우게 될 게 틀림없다. 강정마을 주민들은 공사 강행에 저항을 선언했다. 제주해군기지 건설은 법률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법에 앞서 주민과 대화를 통해서 평화적으로 풀어야 한다. 지난해 12월에도 법원이 주민들이 제기한 절대보전구역 변경처분 무효확인 소송을 각하해 기지 공사가 시작됐지만 주민에 의해 저지당했다. 경찰의 집회 불허 조치도 철회돼야 한다. 주민의 손발을 다 묶어놓고 강행한 사업에 정당성이 부여될 수 없다.

[경향논단]강정마을서 제2의 4·3을 원하는가


이글은 경향신문 경향논단 2011-08-30자 논단에서 퍼왔습니다.
지금 제주 강정마을에 국가라는 괴물이 나타났다. 수백년간 대대손손 삶의 터전을 이루어 온 삶의 공동체가 하루아침에 이 괴물 앞에서 산산이 깨지고 있다. 마을 어귀에는 온통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고, 해안가 농로에는 쇠사슬로 온몸을 칭칭 감은 아주머니들이 드러누워 있다. 전쟁터가 따로 없다. 세계 7대 자연경관에 도전하는 제주, 그곳에서도 가장 빼어난 곳이 올레 제7코스가 있는 강정마을이다. 그런 마을이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 주민들이 반대하는 해군기지가 들어오기 때문이다. 강정마을의 문제는 이제 강정마을 주민만의 문제가 아니다. 평화, 인권, 민주주의 그리고 환경을 생각하면 이미 대한민국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되었다. 국가가 수백년간 살아온 삶의 터전을 비우라고 할 때는 그곳 주민은 물론 국가공동체 전체 구성원에게 합리적인 설명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국가가 공권력을 동원하여 반대를 억누른다면 그 명분이 어떤 것이라 해도 용서될 수 없다. 만일 그것이 허용된다면 이 나라는 더 이상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리바이어던이 통치하는 전제군주국가와 같다. 

정부가 제주에 해군기지를 만들려고 하는 이유는 남방 해역 안전과 해저 자원 및 해양수송로를 보호하는데 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주에 해군기지가 생기면 그것은 미국의 동북아 전략에 이용되어 오히려 한반도를 둘러싼 불안 요인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반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정부 관계자는 그 가능성을 부인하지만 미국의 지식인들마저 이를 걱정하지 않는가. 얼마 전 노엄 촘스키를 비롯한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제주 해군기지에 미국이 이지스함을 동반한 채 기항한다면 중국으로부터 오는 군사적 위협으로 인해 동북아의 안보가 큰 위험에 빠질 것을 경고했다. 평화 운동가인 글로리아 스타이넘도 지난 6일자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한국은 미국 펜타곤 강아지가 흔드는 꼬리가 아닌지 걱정된다”는 글을 쓰기도 했다. 안보의 중요성을 부인하지 않지만 주변국을 자극하는 군사기지 건설은 국가안보에 오히려 독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해군기지는 제주의 상징성에도 맞지 않는다. 4·3 사건으로 얼룩진 제주를 평화의 섬으로 탈바꿈하겠다는 것은 역사에 대한 반성으로 환영할 일이다. 그런데 여기에 해군기지를 만든다니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제주는 세계적인 자연생태계의 보고이다. 강정마을 일대 해안은 유네스코에서 2002년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한 이래 중앙 정부와 제주특별자치도가 모두 생물권보전지역 및 해양보호구역으로 지정한 곳이다. 특히 기지 건설 예정지는 특별자치도법에 의한 절대보전지역이다. 이런 곳에 해군기지를 만든다면 누가 제주를 세계자연유산으로 인정할까. 세계 7대 자연경관 운운하며 기지를 만든다는 것은 세계가 웃을 일이다.

해군기지 강행은 우리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훼손할 위험이 있다. 지역 주민 전체의 생존권이 걸려 있고, 전 국민적 쉼터인 곳을 빼앗아가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민주적 절차가 요구된다. 이 정도의 사안이라면 국회가 토론에 토론을 거듭하여 결론을 내야 한다. 제주에서도 이러한 시설을 받아들일지에 대하여 제주도민 전체의 의사를 묻는 주민투표가 진행되어야 한다. 그것이 강정마을을 해군기지로 만들기 전에 밟아야 할 최소한의 절차이다. 그럼에도 정부가 이 모든 절차를 뭉개버리고 불도저부터 들이민다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심각한 오점을 남기게 될 것이다.

정부가 현지 주민과 야당 그리고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많은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육지 경찰을 동원, 반대를 잠재운 다음 공사를 강행한다면 제2의 용산참사, 아니 악몽의 4·3 트라우마가 재연될 수 있다. 그러니 정부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반대의 목소리를 지금이라도 경청하는 것이다. 전 국민 그리고 제주도민의 의사를 묻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강정마을 해군기지를 이슈로 내걸고 국민의 심판을 받는 것도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지금 당장 대치하고 있는 경찰 병력을 철수하고 해군기지 공사를 중단해야 한다.

오피니언 [사설]대출 억제 핑계로 금리 올려 배불리는 은행들


이글은 경향 오피니언사설을 퍼온 것입니다.
시중은행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계대출 금리를 올리고 있다. 일부 은행이 며칠 전부터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0.2%포인트 인상한 데 이어 많은 시중은행이 다음달 1일부터 가계대출 금리를 0.1~0.2%포인트 올릴 예정이라고 한다. 신용대출 금리를 무려 0.5%포인트나 올린 은행도 있고, 금리인상 계획은 없다면서도 우대금리 적용 중단 등의 방식으로 사실상 금리를 올린 곳도 적지 않다.

지난 6월 이후 한국은행 기준금리도 동결된 상태이고 은행의 대표적인 자금조달 수단인 예금금리는 오히려 내리는 상황이다. 은행들이 일제히 대출금리를 올려야 할 근거를 찾기 어렵다는 얘기다. 결국 가계대출 수요 억제를 핑계로 금리를 올려 잇속을 챙기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은행들은 이달 중순 금융당국이 가계대출 억제 방침을 전달하자 무책임하게도 대출을 전면 중단해 고객들의 원성을 샀다. 이들은 이번에 대출을 재개하면서 가계대출 총액이 줄어들 경우 이자수익도 따라 감소하는 것을 보전하기 위해 금리 인상에 나선 것으로 짐작된다. 

늘기만 하는 가계대출을 점진적으로 줄여나가기 위해서는 은행들이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신규 대출 억제나 기존 대출 상환 독려는 대출 심사를 꼼꼼하게 진행해 불요불급한 대출 수요를 가려내는 방식으로 해야지 느닷없이 대출을 중단해 고객을 골탕먹이거나 일제히 금리를 올려 제 배만 불리는 기회로 삼아서는 곤란하다. 대출이 꼭 필요한 고객이라면 높은 금리를 감수하고라도 대출을 받으려 할 것이므로 결국 사정이 급한 고객의 부담만 키우는 꼴이 된다. 올 상반기에만 10조원의 이익을 내 사상 최대 실적을 예상하고 있는 은행들이 이래서는 안된다.

은행들의 얌체 상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대출금리 조정주기는 짧게 잡고 예금금리 조정주기는 길게 잡는 식으로 이자를 챙기는 관행이다. ‘가계부채 1000조원 시대’에 예대마진이 0.1%포인트만 커져도 1조원의 이자부담이 가계에 추가되는데 은행 예대마진은 계속 커지는 추세다. 은행이 사상 최대 실적을 내고 천문학적 규모의 배당잔치를 벌이는 배경이다. 은행의 사회적 책임의식은 고사하고 과도하게 이자를 챙기는 관행이나 고객을 우습게 아는 태도부터 시급히 바로잡아야 한다. 은행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곱지 않은 수준을 넘어 ‘약탈적 영업행위’라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금융 소비자는 물론이고 은행 자신을 위해서도 빨리 정신차려야 한다.

‘새로운’ 세계화는 없다


이글은 한겨레신문 [35호] 2011년 08월 04일 (목)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새로운’ 세계화는 없다'의 기사를 퍼왔습니다.
국채라는 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서구 경제가 위기를 헤쳐나가며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다. 이제 한 나라, 한 대륙의 명운이 걸린 ‘특별’ 회의나 정상회담은 정치인의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지난 3년간 정치권은 낙오한 금융계의  뒤치다꺼리를 해왔다. 하지만 오늘날 새로운 길이 열리고 있고, 벌써부터 이를 둘러싼 공포와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대체 그 누가 탈세계화를 두려하는가?
처음에는 모든 것이 단순명료했다. 알랭 맹크 같은 지식인들이 주축이 된 모임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성’ 아니면 ‘광기’만 존재했다. 이성을 지닌 이들은 세계화가 행복을 실현하는 길이라 주장했고, 이를 믿을 만한 능력이 되지 않는 이들은 모두 세상과 격리해야 할 정신병자로 취급했다. 하지만 ‘이성’은 내부적 모순에 부딪혔다. 이성은 진실과 논리정연함을 토대로 가장 이상적인 토론을 구현한다고 자처하면서, 실제로는 지난 20년간 모든 대화에 빗장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가장 심각한 위기에 처한 뒤에야 비로소 대화의 문을 열려 한다.
는 곧바로 “대대적인 탈세계화 논의가 시작됐다”며 ‘환영’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 (아마 ‘환영’의 뜻이었겠지만) 이 소식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 “탈세계화는 어불성설”이라는 내용의 사설 한 편을 서둘러 게재했다. 좀더 균형 잡힌 시각을 제공할 요량으로, “탈세계화는 반동적”이라는 논지의 대담 기사도 함께 실었다.(1) 분명 탈세계화가 ‘어불성설’이라는 것과 ‘반동적’이라는 것은 결코 같은 의미가 아니므로, 둘 다 다뤄볼 만한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위기에 빠지자 비로소 대화 나선 세계화주의자들
거시경제 흐름상 2012년 상반기부터 프랑스도 유럽연합(EU) 차원의 초긴축정책의 여파를 체감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위기가 한창인 지금도 고삐 풀린 금융계의 방종과 시장지상주의적 경제정책, 해외이전 등은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세계화는 앞으로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등장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이대로라면 결국 진짜 참다운 문제들이 대선 토론의 쟁점으로 떠오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진짜 참다운 문제, 그러니까 실업, 고용 불안, 양극화, 국민주권 약화 등은 하나같이 세계화라는 문제로 귀결한다. 그렇기에 대안 없는 정권 교체의 종식을 우리는 간단히 ‘탈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이름은 간단하지만 탈세계화를 둘러싼 논의는 복잡하다. 오늘날 탈세계화에 관한 지적 논쟁은 프랑스의 정치 지형을 뒤바꾸고 있다. 뜻밖의 인물이 기존 주장을 뒤엎고 세계화 논의에서 이탈하는가 하면, 뭔가 진정성이 의심되는 부류가 탈세계화 바람에 편승하기도 한다. ‘세계화의 진정한 수혜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때면 소리·소문  없이 자취를 감추던 이들 말이다. 그들은 과거에는 세계화 논의가 일어나지 않게끔 투쟁을 벌이더니, 이제는 ‘또 그 얘기’라는 담론이 세계화 논의의 중심이 되도록 투쟁을 벌이고 있다.
기존 논리를 토대로 다시 새로운 세계화 담론을 구상하는 일은 흡사 역사학자의 작업과 비슷하다. 가장 어리석은 주장(이를테면 어리석다는 특징만으로도 이미 역사에 한 획을 그은 ‘행복한 세계화’ 같은 주장)에서 알맹이 없이 겉만 번지르르한 주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샅샅이 살펴봐야 한다. 오늘날 세계화를 옹호하던 기존 논리가 전부 폐기된 것은 아니다. 최대한으로 살리려면 일단 가지고 있는 실탄은 모두 장전하고 보는 것이 현명하다. 대표적인 예가 1998년 폴 크루그먼의 ‘세계화는 죄가 없다’와 비슷한 행보를 보이는 경제학자 다니엘 코엔이다.(2) 실제로 그는 ‘세계화의 적들’을 비난하며 크루그먼을 대놓고 흉내냈다. 그런 그는 오늘날 여전히 세계화 영역에서 금융화만 쏙 빼놓는 용의주도한 태도를 잊지 않는다. 사실 금융화를 옹호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2007년 이후로는 금융화를 비호하기가 한층 더 난처해졌다. 그러니 세계화 논의에서 조심스레 금융화 주제만 빼놓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여기서 일명 ‘징징 짜는 좌파’가 흔히 사용하는 전형적 수법과 마주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고통으로 신음하는 노동자와 연대하는 데 목매고(어쨌든 그들도 좌파이므로), 양극화·고용불안 등의 불행에 뜨거운 눈물로 개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불행을 일으킨 진정한 구조적 원인은 지적하지 않는 수법 말이다.
이를테면 금융 자유화와 주주권력, 자발적으로 금융시장의 요구에 따라 경제정책을 결정하는 현 EU 통합 체제, ‘왜곡되지 않은’ 자유로운 경쟁 등의 문제에는 침묵한다. 요컨대 신성불가침한 영역으로 인식돼온 이 주제들은 그동안 암묵적으로 이성학파, 좀더 정확히 말해 ‘이성학파에 속하기를 바라는’ 이들이 결코 넘어서서는 안 될 ‘테두리’를 형성해왔다. 이는 곧 장관과 계속 손을 맞잡고 일하려면, TV에 게스트로 초대받으려면, (좌·우파를 막론한) 여러 정당의 자문관 노릇을 하려면, 한마디로 제도권의 사랑을 받으려면 (절대 입에 담아서는 안 될 금기어들에 반해) 꼭 해야 하는 말들의 ‘테두리’를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위기는 모든 것을 휩쓸어갔다.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세간의 조롱뿐이다. 이제 지옥은 타자가 아니라, 과거의 기록인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모두들 저마다 과거 행적을 지우고 다니느라 아우성이다. (그러나 안심하시라.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핵심은 결코 희생하지 않을 터이니.) 이를테면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한 ‘생시몽재단’, ‘아이디어 공화국’, ‘테라노바’ 등 각종 세계화 옹호 단체들이 대표적이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옛날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갈 방도를 강구할 수 없다. 기존에 사용하던 논쟁 방식을 완전히 탈피해야 한다. ‘그것’에 대해 교묘히 침묵하는 것은 세계화가 끔찍한 악몽으로 변하기 전에나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데도 세계화 옹호 단체들은 아무런 문제 제기 없이 그저 ‘기본적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한도에서 불행한 자의 운명을 개선하려 한다. 이를테면 조세 개혁이나 특히 교육으로만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것이다.
크루그먼씨! 세계화는 정말 무죄인가?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이른바 ‘상향 평준화된 경쟁력’을 갖추도록 ‘패자’를 교육하는 것이다. 아, 유럽집행위원회가 그리도 좋아하는 교육, 그리고 그 지긋지긋한 ‘지식 기반 경제’라니! 고용의 책임은 온전히 바보들에게 떠넘기고, 일자리를 파괴하는 근본적 문제에 대해 더는 논하지 않아도 되는 얼마나 완벽한 핑곗거리인가. 교육이 제시하는 장밋빛 전망은 또 어떤가? 자고로 밝은 미래를 건설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당연히 바보들을 교육하는 과정은 더딜 수밖에 없으므로). 다시 말해 당장은 두 손 두 발 다 놓고 있어도 전혀 문제될 게 없음을 뜻한다. 하지만 오늘날 상황은 달라졌다. 더는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구조적 문제’에 침묵할 수 없다. 세계화로 인한 피해에 세상이 잠잠할 때는 문제를 덮고 넘어갈 수 있었으나, 돌연 세계화 병폐를 놓고 세계가 시끄러워진 마당에 더 이상 침묵으로 일관하기란 불가능하다.
세계화 옹호론자들은 일부 주장을 계속 견지하려 들 것이다. 이를테면 국민이 불행한 것은 세계화가 아닌, 컴퓨터 때문이라며 이른바 ‘기술’ 이론을 들고 나올 것이다. 파스칼 라미도 “과거의 기술 상태로 되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없지 않은가?”라고 묻지 않았던가.(3) 다니엘 코엔은 (지식경제 이론에 딱 들어맞는) 이 이론을 부분적으로 계속 견지하며 일자리 파괴, 양극화 등은 세계화가 아닌 기술 진보에 의한 생산성 때문이라고 주장한다.(4) 그는 “오로지 우수한 교육을 받은 자만이 컴퓨터 기술을 무기로 굳게 닫힌 취업문을 뚫고 나와, 능력 있는 사람들 몫의 일자리까지 모두 쓸어갈 수 있다. 그러니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참으로 애석할 따름”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의아한 사실은 여기서 모두들 세계화와 ‘생산성’이 서로 상치(세계화와 생산성 가운데 택일해야 하고, 대개는 세계화보다는 생산성을 선택한다)되는 개념이라고 인식한다는 점이다. 두 사이에 상호보완적 관계, 심지어 인과관계가 존재할 가능성은 무시해버린다. 대체 생산성 증대를 위한 과열 경쟁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바로 ‘왜곡되지 않은 경쟁’이라는 무시무시한 압박감(월 100유로짜리 중국 노동자 정도로는 불공정 경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적어도 15유로짜리 아프리카 노동자가 게임에 끼어야 진정한 불공정한 경쟁을 논할 수 있다), 그리고 금융수익 증대에 대한 끊임없는 요구가 아니던가? 더욱이 수익 증대는 ‘주주금융 제국’의 모토이자,(5) 세계화를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침묵할 수 없다면 이젠 교묘해져라
2008년 경제학자 파트리크 아르튀스는 세계화에 대해 “아직 최악의 상황은 도래하지 않았다”(6)고 예견했다. 하지만 그도 생각을 바꾸었다. 이제 그는 “세계화를 거부하는 것은 미친 짓”(7)이라고 말한다. 별다른 논리적 개연성 없이 그저 희망만 가득한 말로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물론 지금까지 ‘그것’은 힘겨운 과정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 포기해서는 안 된다. 조금만 더 견디면 곧 ‘그것’의 보상을 받을 수 있다.” 낡을 대로 낡았지만 새삼 우습게도 오늘날 다시 유행하 는 이 신자유주의 주장에 대해, 어쩌면 지난 15년간 장기간의 예산 축소를 기반으로 한 경쟁적 인플레이션 억제책을 묵묵히 견뎌온 사람들은 크게 감동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다리고만 있는 신세가 아니던가? 물론 중국이 언젠가 내수시장을 책임질 만한 성숙한 임금제도를 갖추고, 수출대국에서 우리 고객으로 변모하는 날이 올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대체 언제란 말인가? 10년 뒤? 아니면 15년 뒤? 더욱이 그때까지 버틸 재간은 있는가? 아니면 무작정 곧 보상이 돌아올 것이라는 식의 막연한 인내심만 가지고 기다려야 하는가? 노동자 임금 150유로짜리 중국이 75유로짜리 베트남에 해외 이전지 자리를 빼앗기듯, 앞으로 세계화가 돌연 아프리카 대륙 쪽으로 기수를 튼다면 그때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개척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완전한 불모지나 다름없는 아프리카는 앞으로 모든 임금 기록을 갈아치울 것이 분명하다. 그때 가서 또다시 우리는 15년 동안 아프리카가 성장하기를 기다리며 마지막 인내심 경연이라도 펼쳐야 하는가?
분명 현 위기로 세계화의 오랜 동맹들은 동요하고 있다. 그들은 ‘세계화의 적’이라고까지 선언할 처지는 아니지만, 어떻게든 과거에 세계화를 전혀 비판하지 않았다는 인상만큼은 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그동안 너무 무신경했던 양 연기하며 궤도를 수정하거나(결코 명백한 모순이나 오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진짜 입장을 바꾼 것이라는 인상을 풍기며 저마다 앞다퉈 세계화를 비난할 거리를 하나둘 찾아내느라 분주하다. 하지만 그들은 늘 최소한의 노력에 그칠 뿐이다. 현 상황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적법한 담론’ 주위만 빙빙 돌며(이를테면 현 상황에서는 금융계에 좀더 엄격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거기에만 머무르려 한다. 코너에 몰린 다니엘 코엔은 부랴부랴 오랫동안 주주권력에 신중한 태도를 보여온 사실을 인정했다. 아르튀스도 살릴 수 있는 주장이나마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세계화’(Mondialisation)를 ‘글로벌화’(Globalisation)와 억지춘양으로 구분짓는 중에도, 어쨌든 일부 비난은 수용하고 있다. 심지어 버락 오바마의 전 경제자문이자 빌 클린턴 정부(1993~2000)에서 적극적으로 탈규제를 옹호한 로런스 서머스마저 “미국 노동자들은 글로벌 경제에 좋은 것이 반드시 그들에게도 좋으리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8)
시스템이 삐거덕거리고, 현실의 통렬한 일격이 반복되면서 마침내 세계화 논의에도 돌파구가 열렸다. 그러자 오랫동안 금기시돼온 주장이 하나둘 터져나왔다. 이제 옹호론자들이 “대체적으로 긍정적”(9)이란 수사학 말고는 비호할 수 없던 세계화 시스템이 영예로운 역사가 아닌 내다버려야 할 역사에 가까워졌다. 경제학자 엘리 코엔은 난처해하며 “오늘날 행복한 세계화라는 담론을 고수하기는 어렵다”고 인정했다.(10) 필리핀의 경제학자 월든 벨로(11)가 원조인 ‘탈세계화’라는 용어는 세계화가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모든 사회적 분노를 잠재우기에 논리적으로 바람직한 정치적 비전을 의미하는 기표가 되었다. 결국 모든 것은 간단하다. 자본주의의 현 상황을 ‘세계화’라 부르기로 쉽게 의견을 모았듯, 현 자본주의 질서와의 단절도 아주 쉽게 ‘탈세계화’라고 부르기로 의견 일치를 보면 된다.


<재건축과 파괴>, 2010-제리 월든
교육으로 양극화 해결하겠다니
그럼에도 현 자본주의 질서와 ‘단절’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먼저 아르노 몽트부르(12) 사회당 의원은 유럽통합주의를 기반으로 한 단절 방법을 지향한다(그저 앞으로 독일을 상대로 시장의 요구에 순응하는 현 EU 경제정책 수립 방식이나 유럽중앙은행의 독립성 보장 등을 설득해야 할 그에게 행운을 빌 따름이다). 2005년 ‘파비우스 효과’(파비우스는 유럽헌법조약에 관한 국민투표에서 부결을 주장한 인물이다)와 유사하게, ‘훌륭한’ 정당의 훌륭한 경선 후보자인 몽트부르 의원이 나서면서 세계화 논쟁은 부쩍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 결과 그동안 아무도 관심이 없던 담론에 비로소 사람들이 귀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그동안 경제학자 자크 사피르의 주장은 아무도 경청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급진적인 주장을 펼쳤다. 이도저도 모두 실패한다면 그때는 (유로화 탈퇴를 통한) ‘개별 유럽국 주권 회복’이란 카드를 사용하는 것도 결코 주저해선 안 된다고 했다.(13)
좌파 사이에 탈세계화 논의가 위축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우리는 국제금융관세연대(ATTAC) 소속 경제위원회 위원들이 탈세계화 논의가 확대되는 것을 이토록 경계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더욱이 개별 유럽국으로 회귀하는 것을 비난하는 말까지 하리라고는 더욱 몰랐다. 이런 비난은 이상하리만치 신자유주의 성향의 언설들이 평상시에 쏟아내던 분노와 닮아 있다. 게다가 이는 “각종 모습으로 위장하고 길을 터가는 극우주의 정책” 발전에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14)
변죽만 울리는 반성… 그래서 어쩌라고?
우리는 일부 좌파가 의도와는 상관없이 탈세계화 비난에 동참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 그들은 가장 왜곡된 형태의 탈세계화를 비난하고 있으며, 사방이 온통 적으로 둘러싸였다는 환상 아래,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른바 ‘피포위(被包圍) 신드롬’을 왜곡해 견지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북한과 그 ‘은둔의 왕국’ 체제를 세계화와 변증법적으로 완전히 상충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의 논객 알렉상드르 아들레르에게서나 발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ATTAC 경제위원회 위원들도 담화문에서 피포위 환상에 사로잡힌 주장을 하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최근의 경제사만 조금 훑어봐도 잘 드러난다.
오늘날의 규범(특이하고 심지어 부적절하기까지 하다)에 비춰볼 때, 전후 포드주의 자본주의는 거의 모든 탈세계화의 특징을 지녔지만, 거기에서 철조망이나 감시탑, 굳게 닫힌 폐쇄적 경제, 자급자족 정책 등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피포위 이미지는 세상에는 오로지 ‘세계화된 세계’ 아니면 ‘여러 국가로 이뤄진 지옥’만 존재할 뿐, 그 중간은 없다는 이른바 제3자 특유의 잘못된 오해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이들에게 ‘인터내셔널’(International)의 가능성을 환기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생각하는 바, 그러니까 국가가 존재하는 동시에 각 국가 사이에 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더 잘 설명하려면, ‘인터-내셔널’(나라-사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1945~85년에는 국외 교역이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보다 무역이 덜 발전했다고 그것이 흠이 되었다는 증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또 요즘 자유무역에 모든 것을 희생하지 않는 나라가 나타날 때마다 파스칼 라미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볼 때 분명 ‘보호주의’라고 불릴 만한 교역으로 전쟁이 일어난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도 일부 대안세계화 지지자들은 라미 사무총장과 똑같은 수사학을 펼치고 있다. 그들은 라미 사무총장의 말을 맹목적으로 해석하며 “관세가 외국인 혐오주의와 국수주의를 강화할 것”이라고 주장한다.(15)
‘끔찍한 국수주의적 보호주의가 활개를 친 포드주의 시대’는 어쨌든 완전고용과 성장,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선진국들이 평화롭게 지낸 시대였다는 점을 환기하려 한다. 더욱이 우리가 아는 한 이른바 ‘세계화된 세상’에서조차 국가라는 원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와 대안세계화를 지지하는 이들이 잘 모르는 것 같아 다시 한번 말해두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가는 존재한다. 중국이 있고, 또 미국이 있다.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어느 누구도 이 나라들을 두고 국수주의나 주권 행사 등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두 나라에 누군가 확대 통합을 요구한다면, 그들은 일제히 박장대소할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구제불능의 두 나라가 서로, 혹은 각각 우리와 전쟁을 벌이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탈세계화, 방법론 놓고 의견 분분
마지막으로 우리가 아는 한 국가 간의 관계는 단순히 상품 교역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컨테이너나 자본의 이동을 제한하더라도 예술작품, 학생, 예술가, 학자, 여행객 등의 대대적인 교류까지 저해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할 정도로, ‘신자유주의표 세제’가 사람들의 분별력을 깨끗이 씻어버린 현실에 우리는 경악할 수밖에 없다. 마치 상품 교역이 한 국가의 개방 정도를 측정하는 유일한 척도가 되어버린 듯하다. 어떤 악의적인 의도가 있지 않고서는, 탈세계화가 ‘사악한’ 교역과 함께 ‘바람직한’ 교역까지 모두 쓸어버리려 한다는 비난이 생겨나는 이 현상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혹자는 ATTAC가 이미 ‘반세계화’(Antimondialisation)라는 초기 이름표를 서둘러 떼어내고 ‘대안세계화’(Altermondialisation)라는 좀더 명확한 명칭으로 조직의 정체성을 재규정했다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이는 봇물처럼 쏟아지는 수많은 이론 사이에 그들의 이론을 구별짓는 기준이 될지 모른다. 이를테면 ATTAC 경제위원회 위원들은 담화문에서 끊임없이 “계급투쟁이 국가 간 투쟁으로 변화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16)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살펴보면 이 주장은 무의미하다. 비록 이것이 국가 차원의 사안,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 국가 차원의 사안이 존재한다는 사실, 거기서 필연적으로 대립관계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무시한 주장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여기서도- 늘 그렇듯 제3자의 시각으로 바라본 데서 기인하는 비극적 결과이지만- 그들은 ‘대립’을 곧 ‘전쟁’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특히 협력관계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있다.
ATTAC, 반세계화에서 대안세계화로 급선회
인류가 완전하게 화합할 수 있다는 환상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넓은 의미에서 인간 공동체에는 필연적으로 대립관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고, 때로는 이런 대립관계가 국가라는 경계를 기준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럼에도 분명 모든 대립관계가 국가 문법에만 따르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계급 간 대립처럼 수평적 문법을 기준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저마다 수많은 문법 사이에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문법만 수용하려 든다는 점이다. ‘어떤 문법이 우위에 있느냐’라는 질문은 일반적 규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매번 자본주의 구조의 특징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중국 노동자와 프랑스 노동자는 모두 똑같이 ‘자기’ 자본과 대립관계에 있다. 그럼에도 세계화 경제의 구조상 중국 노동자와 프랑스 노동자는 대립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것이다.
프랑스와 중국의 노동자 계급이 함께 연대하도록 요구하려면, 각자의 구체적인 구조적 현실, 객관적 갈등을 일으키는 힘의 관계 등이 완전히 배제된 순수한 보편성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카를 마르크스가 ‘신진 헤겔주의 좌파세력’에 대해 비난했던 점이다. 그러므로 ‘각각의 본질들’이 혼자 알아서 불가능한 효과를 불러오기를 기대하는 대신, 여러 사회집단 간 (다양한 형태의) 관계를 결정짓는 구조를 개혁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탈세계화와 국수주의를 구분 못하다
한 예로, 일부 나라에서는 주식금융과 자본화 방식을 토대로 한 퇴직연금제도(Capitalized Pension) 등의 자본주의 구조가 동일한 노동자 계층을 다양한 분파로 분열시키고 대립하도록 만든다. 이를테면 (금융 수익성에서 이익이 비롯되는) 연금수급자와 (이를 갈취당하는) 임금노동자, (주식시장에 상장된) 동일한 기업의 주주사원과 생산직 해고자 등이 서로 대립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구조상 한쪽은 피해를 보고 다른 쪽은 이익을 얻으며 서로 대립관계에 있는 이들에게 아무리 계급이라는 모호한 기준을 들이대고 함께 연대하자고 호소해봐야 소용없다. 오히려 반대로 (주식금융을 없애거나, 기여식 연금(Contributory Pension)을 장려하는 등) 자본주의 구조를 개혁하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다. 이는 분열된 집단이 서로 통합할 수 있는 실질적 환경을 조성하고, 기존과는 다른 문법에 의한 대립관계를 유도할 수 있다.
자유무역과 직접투자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라는 현 자본주의 구조는 프랑스 노동자와 중국 노동자 사이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한다. 바로 여기에 그동안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세계화 지지자들’의 역설이 존재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협의를 바탕으로 한 합리적 ‘보호주의’는 신흥국 노동자의 이익을 침해하는 대신, 오히려 수출 위주의 정책이 그들에게 그다지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일찍이 깨닫고 서둘러 내수 위주의 성장 체제(전문 용어로 ‘임금수익의 확대 및 안정’이라 부르는)로 발전하도록 유인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각국의 노동자가 불공정한 자유무역을 바탕으로 한 대립관계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국가라는 문법보다 계급이라는 문법이 앞서는 수평적(초국적) 차원의 연대가 가능할 것이다. 요컨대 ‘국가 차원의 사안’을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노동자라는 ‘계급 차원의 사안’에 (국제적인) 가능성을 부여하는 최고의 방법인 것이다. ‘왜곡되지 않은 경쟁’은 실상 가면을 쓴 보호주의(혹은 가장 최악의 보호주의)(17)에 지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합리적 협의 과정을 바탕으로 한 투명한 보호주의는 일반적으로 대안세계화를 지지하는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협력적인 특징을 지닐 수 있다. 즉 각국이 (합리적인 방식으로) 서로 영향을 미치며 독자적으로 발전하도록 돕거나, 일정 계급이 국적을 초월해 연대하는 실질적인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
국가’보다는 ‘계급’에 주목해야
하지만 탈세계화를 둘러싼 논의가 오로지 (세계화 옹호론자들이 원하는 것처럼) 보호주의로만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일부 주장만 가지고 완전하게 탈세계화를 논하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탈세계화를 논할 때 단순히 경제적 차원만 고려해서는 안 된다. 탈세계화가 진정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좀더 근본적인 문제, 즉 주권 및 그 한계(18)를 비롯해 정치적 문제까지 고려해야 한다. 세계화 옹호론자들은 민중의 삶에 기반이 되는 주권은 등한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들은 하나같이 진정 중요한 것은 소홀히 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거버넌스’(Governance)라는 모호하기 짝이 없는 개념이다. 다니엘 코엔은 틈만 나면 “중요한 문제는 글로벌 거버넌스다”라고 외친다.(19) 아니, 천만의 말씀! 정말 중요한 문제는 유일하게 자본권력에 대항할 능력을 갖춘, 진정한 주권을 지닌 정치체를 구축하는 것이다. 우리는 “강력한 국제기구”(20)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주권 문제를 소홀히 다루는 경향이 있다. 어쨌든 다니엘 코엔은 이 완벽한 모순어법에 기대어 “강력한 국제기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말을 이렇게 다시 쓰고 싶다. “지금 이대로도 우리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세계화 논쟁을 펼칠 때 유일하게 일반적 원칙으로 삼아야 할 게 있다면, 바로 주권 약화를 해결해줄 대안이 없는 상태로 국민을 너무 오래 방치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자본에 맞설 진정한 주권 필요
탈세계화 논쟁은 탈세계화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도록 합의하느냐라는 문제로 귀결한다. 탈세계화 개념을 정의하는 일은 현 경제 상황을 살펴볼 때 그리 어렵지 않다. 오늘날 소득 격차가 엄청난 경제국들이 왜곡되지 않은 자유경쟁을 펼치고 있다. 해외이전이라는 만성적 위협도 계속되고 있다. 주식금융 시스템이 한도 끝도 없이 수익성 증대를 요구하며 노동자의 임금을 위협하고 만성적인 가계 부채 증가를 부추기고 있다. 투기 거래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금융권은 경제 불안을 초래하고 있다. 서브프라임 위기같이 가계 부채를 대상으로 투기판을 벌이기도 한다. 금융계의 볼모가 된 정부는 반복되는 위기로 공황상태에 빠진 금융계를 돕도록 종용받는다. 한편 거시경제에 발생한 모든 위기의 대가는 고스란히 실직자에게 돌아간다. 위기로 인해 발생한 공공재정 부담은 전부 납세자, 공공서비스 이용자, 공무원, 연금수급자 등이 짊어진다. 시민은 경제정책을 결정하는 데 아무런 힘이 없다. 사회 구성원에게 어떤 피해가 돌아가는지와 상관없이 국제 채권자가 경제정책을 결정한다. 정치적 통제권이 없는 독립기구가 통화정책을 결정한다. 결국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일컬어 간단히 ‘세계화’라고 부르기로 합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탈세계화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간단히 ‘더 이상 세계화를 원치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글•프레데리크 로르동 Frédéric Lordon
경제학자. 최근 저서로 (쇠유 출판사·파리·2011)이 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 2011년 7월 1일자 사설. 자키 라이디, ‘탈세계화는 어불성설’, 2011년 6월 29일. 파스칼 라미, ‘탈세계화는 반동적인 개념이다’, 2011년 7월 1일. 
(2) 다니엘 코엔, , 그라세 출판사, 파리, 2004.
(3) 파스칼 라미, 앞의 기사.
(4) ‘세계화의 책임일까?, 다니엘 코엔 vs 자크 사피르 대담 기사, , 제303호, 파리, 2011년 6월.
(5) 이자벨 피베르, ‘5%라는 종교’, , 2009년 3월.
(6) 파트리크 아르튀스·마리 폴 비라르, , 라데쿠베르트 출판사, 파리, 2008.
(7) 파트리크 아르튀스, ‘세계화를 거부할 때가 아니다’, , 나티식스, 제472호, 2011년 6월 21일.
(8) 로런스 서머스, ‘A strategy to promote healthy globalisation’, , 런던, 2008년 5월 5일.
(9) 다니엘 코엔, ‘위기 탈출’, , 파리, 2009년 9월 7일.
(10) 엘리 코엔, ‘다보스 이데올로기 위기에 봉착하다’, Nouvelobs.com, 2010년 1월 26일.
(11) 월든 벨로, , 제드북스 출판사, 런던-뉴욕, 2002. 1996년 베르나르 카상이 이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그리고 지금… 탈세계화에서 국제화로’, , 제32호, 1996년 11월.
(12) 아르노 몽트부르, , 플라마리옹 출판사, 파리, 2011.
(13) 자크 사피르, , 쇠유 출판사, 파리, 2011. 그가 저술한 CEMI-EHESS 연구자료 ‘유로화에서 탈퇴한다면…’(파리·2011년 4월)도 참조. 
(14) ‘탈세계화, 피상적이면서도 단순한 개념’, ATTAC 경제위원회 위원 9인, , 2011년 6월 20일.
(15) 피에르 칼파, ‘탈세계화라는 딜레마: 일부 반론에 대한 답변’, , 2011년 6월 20일.
(16) 앞의 기사. 장마리 아리베, ‘행복한 세계화라고?’, 블로그, 파리, 2011년 6월 16일.
(17) ‘보호주의 위협, 무의미한 개념’, , 파야르 출판사, 파리, 2009.
(18) ‘누가 탈세계화를 두려워하는가?’, 블로그 ‘la pompe àphynance’. 
(19) ‘세계화 책임일까’, 앞의 기사.
(20) 앞의 기사.

2011년 8월 30일 화요일

한-중 해군이 이어도에서 대치하면


이글은 한겨레신문 hook의 기사 '한-중 해군이 이어도에서 대치하면'를 퍼온것 입니다.

시민단체인 평화네트워크(www.peacekorea.org) 대표로 일하면서 여러 매체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 기획위원으로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쓴 책으로 '글로벌 아마겟돈: 핵무기와 NPT'(책세상, 2010년)이 있습니다.


정부와 해군이 제주해군기지 건설의 가장 큰 명분 가운데 하나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 바로 이어도 보호이다. 해군기지 건설 사업의 책임자인 해군 전력기획 참모부장 구옥희 소장이 와의 인터뷰에서 “이어도에서 석유가 터졌다고 생각해보라. 중국·일본이 가만 있겠나. 그런데 제주도에 기지를 둔 우리 기동 전단이 항상 이어도를 초계하고 있다면 누가 뭐라고 하겠나”라고 얘기한 것은 이러한 시각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제주해군기지가 건설되어 해군이 이어도 인근 수역에서 초계 활동을 벌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과연 정부와 해군의 주장처럼 우리의 해양 주권을 굳건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까? 아니면 중국의 거센 반발을 초래해 이어도 인근이 분쟁 수역화되고 한국의 안보와 경제를 위태롭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까?
이에 대한 전망에 앞서 이어도 문제의 기본적인 특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선 이어도는 섬이 아니라 ‘수중 암초’이기 때문에 영토나 영해 문제가 될 수 없다. 이를 반영하듯 외교부는 “한-중 양국은 이어도가 영토분쟁 지역이 아니라는 점에 합의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이어도 문제를 ‘영토 분쟁’이나 ‘영해 분쟁’으로 부르면서 강력한 대응을 주문하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에도, 합리적인 해법 모색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이어도 문제의 근원은 이 암초가 한국과 중국이 주장하는 배타적경제수역(EEZ) 안에 있다는 데에 있다. 유엔 해양법에 따르면, 각 국가는 연안 바깥 200해리까지 EEZ를 설정할 수 있는데, 이어도는 제주 마라도에서 약 80해리, 중국 퉁다오에서 약 133해리 떨어져 있다. 이처럼 양측이 주장하는 EEZ가 겹치는 경우에 유엔 해양법은 협상을 통해 EEZ 경계선을 설정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이어도 인근 해저에 상당량의 원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된 것으로 알려져 자원 쟁탈전의 성격도 띠고 있다.
이어도가 중국의 대륙붕에 걸쳐 있다는 것도 상황을 더욱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국제법에서는 수심 200미터까지인 대륙붕에 대해서도 배타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은 이를 근거로 자국의 대륙붕이 이어도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복잡한 사정을 반영하듯, 양국 정부는 1990년대 이후 EEZ 설정 협상을 벌여왔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성과는 없는 상태이다.
이어도에서 양국 함정이 대치하면
이러한 상황에서 해군과 많은 안보 전문가들, 그리고 보수 언론들은 제주해군기지에 기동 전단을 배치해 이어도 초계 활동을 벌이는 것이 중국의 위협에 대처할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안보는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우리 측에서 먼저 합의되지 않은 수역에 해군을 투입해 초계 활동에 나선다면, 중국이 군사적으로 맞대응에 나설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한국이 먼저 이어도 인근 수역에 해군 함정을 보내 초계 활동에 나선다면, 중국은 외교적으로 항의하고 이것이 먹혀들지 않을 경우 함정 파견으로 맞대응할 공산이 대단히 크다. 이렇게 예상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한국과 EEZ 설정 협상이 마무리되지 않는 상태에서 한국 해군이 중국이 주장하는 EEZ로 들어오는 것 자체를 ‘주권 침해’로 간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역지사지의 관점에서 볼 때, 중국 해군이 이어도에서 초계 활동을 벌이는 것을 우리가 결코 좌시할 수 없는 까닭과 마찬가지이다.
또 하나는 중국이 한국 해군의 이어도 초계 활동을 눈 감을 경우, 남중국해의 난사 군도나 동중국해의 센카쿠 열도(중국명: 다오위다오) 분쟁과 관련해 잘못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고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석이 적실성을 띤다면, 제주해군기지를 건설해 이어도 초계 활동에 나서는 것은 ‘미래의 불확실한 위협’을 ‘확실한 위협’으로 만드는 극히 어리석고도 위험한 선택이 될 것이다. 미합의된 수역에 한국이 먼저 함정을 보내 양국 해군이 대치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그 외교적, 안보적, 경제적 손실은 감당하기 힘든 수준으로 치달을 수 있다. 이미 중국이 미국 및 일본과 합친 것보다 더 큰 한국의 최대 무역 상대국이 된 상황에서, 또한 한국의 미래를 위해 우호협력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중국을 대상으로 이러한 무리수를 두는 것이 과연 국익에 부합하는지 강한 의문이 드는 까닭이 아닐 수 없다.
이어도 문제를 한-중 협력 증대의 기회로
결국 이어도를 둘러싼 갈등 해결책은 군사적 대응보다는 능동적인 협상을 통해 EEZ 합의에 도달하는 것에 두어야 한다. 고려해볼 만한 타협책으로는 중국으로부터 한국의 EEZ에 이어도가 포함되는 것을 동의받는 대신에, 한-중 양국, 혹은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원유와 천연가스를 조사·개발하는 방안에 합의하는 것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현실적으로 양국이 EEZ에 합의하지 않는 한, 어떤 나라도 이어도 인근 해저 자원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어도 확보와 원유 공동 개발 합의’를 골자로 한 EEZ 설정은 한-중 양국간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협력을 극대화할 수 있고, 이어도를 둘러싼 분쟁 가능성을 뿌리부터 깨낼 수 있으며, 경제성이 입증될 경우 막대한 해저 자원을 이용할 수 있다는 ‘1석 3조’의 효과가 있다. 정부가 EEZ 협상을 국장급에 맡겨둘 것이 아니라, 정상회담 등 최고위 수준에서의 합의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러한 방식으로의 합의 가능성이 불확실하다는 점에서 유사시를 대비한 계획도 필요하다. 그러나 해군이 평시에 초계 활동을 벌이거나 갈등 초기 국면에서 해군이 먼저 나서는 것은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는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점에서 단계적이면서도 치밀한 대응책이 요구된다.
유사 상황 대비는 ‘외교적 대응→해경의 대응→해군의 대응’ 순서로 상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중국이 일방적인 행태를 보인다면, 외교적 항의에 나서고 이것이 통하지 않을 경우 해경의 출동하고, 중국이 이에 대해 군사적 대응의 움직임을 보인다면, 해군의 역할이 필요해질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필자는 제주해군기지 건설보다는 화순항에 건설 예정지인 해경전용부두를 해군의 기항지로도 이용하는 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한 바 있다. 이러한 방안은 해경 및 해군의 재정 투자 및 임무의 ‘중복 문제’를 해소해 막대한 예산을 절감할 수 있고, 유사시 해경과 해군의 원활할 협조 체계를 구축할 수 있으며, 분쟁 발생시 해군의 대기 및 상황 발생시 신속한 투입이 가능해진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제주해군기지가 미군의 중간기지로 활용돼 미-중 군사 갈등에 한국이 휘말릴 소지를 원천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는 전략적 이익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끝까지 이럴래?


이글은 한겨레신문 hook의 기사 '끝까지 이럴래'를 퍼온것 입니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고만고만한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삶에서야 말로 심오함을 발견할 수 있는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아직 2편의 단편 밖에 쓰지 못한 추리소설가인 저는...... 그래서 대중에 영합하는 글쓰기를 지향합니다 ^^;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다 온 줄 알았다. 연설이 하도 비장해서. 시장직을 걸겠다는 연설도 그랬지만 사퇴의 변에서는 대한민국이 무슨 일제치하에 있는 줄 착각까지 들었다. 아니, 공짜나 바라면서 나라를 망국으로 모는 국민들만 있는 줄 알았다고 해야 하나?
역사를 살펴보면 인류에 해악을 끼친 인간은 본인이 악당인 것을 아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런 인간은 잘해야 주먹세계 대장 정도다. 정말 해악을 끼치는 인간은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한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는 확신범들이었다. 히틀러가 그랬고, 스탈린이 그랬다. 아무리 군중이 우매하다고 하지만 대다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을 반드시 맞다고 우기는 무리들. 우리는 그런 인간을 확신범이라고 부른다.
연설문에 대해서는 토를 달지 말자. 이거 뭐 빨간펜 선생도 아니고 일일이 논리에 어긋난 문장을 지적하기도 힘들다. 이런 정도의 논리만 구사해도 된다면 나도 진작에 사법고시나 준비할 걸 그랬다. 논리 따위는 쌈밥집 쌈싸먹듯 해도 되니 말이다. 말하려니 입만 아플 뿐이다.


누군가는 해야할 일, 후회는 없다시며 자화자찬으로 일관 하신 오시장. 누군가? 아니다. 자기가 싸지른 똥은 본인외에는 치울 사람이 없다. 그걸 누가 한단 말인가. 그것도 후회없이 싸지른 똥을.
다만 언론기사에 대해서는 몇가지 토를 좀 달고 싶다.
우선 복지논쟁. 제발 언론사들이 복지논쟁이란 말을 좀 기사로 안썼으면 좋겠다. 도대체 이게 왜 복지 논쟁이란 말인가? 이건 복지논쟁이 아니라 기본권 논쟁이다. 밥이라는 생존이 달린, 그리고 교육의 의무에 대한 당연한 권리로서의 기본권 논쟁이다. 내가 놀고는 있지만 밥은 정부가 줘야한다는 얘기도 아니다. 의무를 수행하는 국민이이고 학생으로서 당연한 기본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아니 이게 왜 복지에 들어간다는 말인가? 복지란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한 상태에서 좀더 나은 삶의 질을 국가가 제공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급식이 어떻게 복지에 들어간단 말인가? 기본권의 문제지. 기껏 밥주는 것가지고 복지를 들먹이고 나라가 망한다고 얘기하는데 대한민국이 그 정도로 망할 것 같으면 차라리 망하는 게 낫다. 그걸 국가라고 할 수 있는가 말이다.
그런데 기자들은 모두 복지논쟁이라고 쓴다. 시험칠 때 답안지를 컨닝만 하셨는지 왜 모두 다 한치의 의심도 없이 복지논쟁이라고 기사를 쓰는 것일까? 사건은 어떤 식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양태가 달라지고 그 양태는 어떤 단어를 쓰느냐에 따라 논점이 달라진다. 어느 한 신문이라도 이것을 기본권의 논점에서 보고 그러한 면을 강조했다면 양상은 또 달라지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기사의 머릿글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모두 복지논쟁이라고 쓰니 과잉복지논쟁으로 쟁점화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태의 일부 책임은 언론에도 있다. 무슨 데칼코마니도 아니고 어찌 모든 언론들이 복지논쟁이라고 쓸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다같이 바람을 넣어주니 시장도 얼씨구나 하고 과잉복지를 부르짖는 것이다. 이걸 정말 복지의 문제라고 볼 수 있느냔 말이다.
그리고 강남과 강북. 언론에서 그런 식으로 시민을 나누고 계급투표의 양상을 보인다고 말하는데 이게 정말 계급투표일까? 그렇다면 투표를 안한 사람들은 강남의 부유층 아이들은 밥을 주기 싫다고 했단 말인가? 아니다. 부유층 아이들도 학생으로서 다 같이 밥먹여 주자는 거였다. 너희는 부자고 그래서 배아프니 니네들 알아서 하라가 아니고 모두 학생이니 다같이 밥먹여 주자는 거였다. 계급투표라면 부유층의 급식은 반대해야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게 이건 계급투표가 아니라 상식과 몰상식에 대한 투표였다.
그걸 왜 자꾸 계급투표로 몰고가나? 그렇게 몰고 간 건 언론과 정치인들 밖에 없다. 백보양보해서 계급투표를 했다면 강남부유층이 한거고(부자감세가 지속되야 하니까). 대다수의 시민들은 부유하지 않을 지는 몰라도 치사하게 밥먹는 거 가지고 편가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민주당. 손학규 대표가 분위기에 편승하지 말고 자중하자고 얘기했는데 듣고 있으려니 코메디다. 이번 투표는 무상급식과 오세훈 시장의 행정에 대한 반대였지 민주당을 찍는 투표가 아니었다. 한나라당을 반대했다고 해서 다음 시장을 민주당으로 뽑겠다는 것이 아니었단 뜻이다. 그런데 무슨 논평이 서울시민이 마치 민주당에 대단한 기대라도 하고 있는 듯이 말하는가? 김칫국도 이정도면 항아리채 마시는 거다. 좀 그럴사한 논평을 낼 수는 없는 것일까? 폼 좀 잡아도 봐줄만한 그런 논평 말이다. 이러니 이름만 다른 한나라당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다. 어떻게 자기 편할대로 해석하는 건 두 당이 똑 같은지 모르겠다.
마지막이다. 글을 쓰고 나서 다시 한 번 오세훈 시장의 사퇴 기자회견 전문을 읽는다. 그의 서울 사랑에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헤어진 애인에게 쓴 카드 청구서가 날아와도 이렇게 내 가슴을 뛰게 하진 못할 것 같다. 겨우 진정시키고 한숨을 쉬고나니 드는 생각은 박민규의 소설 제목이다. 정말,
 끝까지 이럴래?
P.S.
계급투쟁이란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만 더하자. 우리나라의 진짜 문제는 계급투쟁이 없다는 거다. 그러니 고작 24.7%에 기대고 나머지 따위는 무시해도 된다는 한나라당스런 발상이 나오는 것이다. 왜냐? 무시해도 상관없거든. 미국이 한국을 무시하듯이, 그러면서도 알아서 기듯이. 80%의 국민(노동자)들이 자기 자식은 부유층에 들어갈 거라고 생각하고, 대개의 부동층은 자기가 중산층인줄 아니까. 사실 그들 대부분의 자식이 대를 물려 노동자가 될 뿐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노동자의 품위를 가지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어떻게 상대 계층과 상생해야 하는 지를 말해줘야 하는데 말이다. 회사에서 안잘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노동자면서 말이다. 그리고는 혼자서는 자위하는 것이다. 난 노동자가 아닌 중산층이라고 말이다. 웃기는 일이다. 노동(지식)을 팔아서 돈을 버는 사람은 노동자인데 말이다. 돈으로 돈을 버는 자본가가 아닌데 말이다. 도대체 미국인이고 싶은 동양인을 부르는 속어, 바나나와 뭐가 다른지를 모르겠다.

학을 닮은 옛 돌담 길


이글은 한겨레신문 조홀섭기자 물바람숲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경남 고성 학동 돌담길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
400년 전통 마을 이어주는 소통의 담장


▲시원스레 뻗은 돌담길
지난 8월4일 통영으로 가던 길목에 국가등록문화재 제258호 옛 돌담길 학동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논틀길을 따라 들어서자 할머니 세분이 느티나무 아래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인사를 드리고  길을 물었다. 자상하게 가르쳐 주신다. 돌담장을 향해 걸어갔다. 황토 빛 담장의 흙 내음이 물씬 풍겨 오는 것 같다. 담이란 나와 다른 사람을 가르기도 하지만, 서로가 정겹게 소통할 수 있도록 해 주기도 한다.

▲돌담과 나란히 달리는 학림천, 물길이 흐르는 곡선 대로 축대를 쌓았다.
특히 이곳의 담은 소통의 담으로 다가온다. 제법 높게 쌓여진 좌우의 담장은 지나간 일상들을 묻어둔 듯 차곡차곡 정돈된 책장처럼 느껴진다.

▲배수구
기록되지 않은 옛 이야기가 돌 속에 알알이 박혀 있고, 담장에 놓인 돌의 두께나 높이만큼 세월이 켜켜이 내려 앉았다. 옛날 이야기가 돌담길을 따라 서려 있어 금방이라도 그 소리가 들릴 것 같다.

차량 한 대가 지날 수 있는 돌담 길이지만 대여섯 명이 걷기에 넉넉하다. 아담한 마을을 보며 편안하고 느린 걸음으로 움직이기 좋았다. 걷노라면 수백 년을 거슬러 오르는 듯하다. 마을 안 긴 돌담 길을 걷는 맛이다.


마을 뒤에는 수태산, 앞에는 좌이산이 자리 잡았고 학림천이 마을 앞을 흐른다. 학림천 옆에서 학림리의 지난 세월을 지켜보았던 느티나무 밑에서 동네 어르신들이 여유롭게 과거와 오늘을 연결시키 주는 이야기를 한다.


이곳의 담장은 수태산 줄기에서 채취한 납작돌(판석 두께 3~6cm)을 황토로 결합하여 층층이 쌓은 것으로 다른 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고유한 특징이 있다. 건물의 기단, 후원의 돈대 등에도 담장과 동일한 방식으로 석축을 쌓아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학림천
고성군 하일면 학림리는 서기 1670년경 전주 최씨 선조의 꿈속에 두루미(학)가 마을에 내려와 알을 품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자, 날이 밝아 그 곳을 찾아가 보니 과연 산수가 수려하고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므로, 명당이라 믿고 입촌해 학동이라 이름 지은 유서 깊은 마을로 전해진다.

▲황토를 사용하지 않은 짧은 돌담

학동이란 마을 이름은 학이라는 새가 주는 평화로움과 공동체, 여유로움과 고귀함 같은 느낌을 준다. 마을을 그렇게 만들고 싶어했던 옛 사람들의 넉넉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반영된 것이라 생각된다.

▲담쟁이 넝쿨이 옛스러움을 더한다.

선조들의 지혜는 오늘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이 크다. 자연으로부터 얻은 돌담 길은 일상에 이용했던 모든 것은 세월이 흐르면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 평범한 순리를 거스르지 않았다.

▲학림리 최영덕씨 고가 현판
▲담장 너머로 기와지붕만 보인다.
윤순영/ 한겨레 물바람숲 필진, 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이사장

[사설] 곽노현 교육감, 권위와 도덕성 이미 잃었다


이글은 한겨레신문의 2011-08-29자 사설을 퍼왔습니다.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이 지난해 6·2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데는 ‘부패’에 대한 단호한 척결 의지가 크게 작용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전임 공정택 교육감이 인사청탁 대가로 1억4600만원을 받은 사실이 들통나 구속된 것에 대한 심판의 측면도 있었겠지만, 곽 교육감이 법학 교수 시절 등을 통해 보여준 깨끗하고 도덕적인 이미지가 단단히 한몫을 했다. 삼성그룹 편법승계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그가 힘을 쏟은 ‘스톱 삼성’ 운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반부패 전사’를 자임했던 곽 교육감이 후보 단일화를 이룬 박명기 서울교대 교수에게 2억원을 건넨 혐의로 검찰 소환이 임박했으니 참으로 유감스럽고 잘못된 처신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이유로든 곽 교육감이 2억원을 건넨 것은 합리화되기 어려운 행위다. 돈을 전달한 방법이나 횟수, 금액 규모 등을 고려할 때 ‘선의’라는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박 교수의 처지가 아무리 어려웠다고 해도 후보 단일화를 한 특수관계자에게 거금을 준 것은 국민의 상식과 눈높이에서 용인되지 않는다. 단일화의 대가로 비칠 소지가 크다. 이런 상황이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이라는 말로 설명되리라 판단했다면 수도 서울의 교육수장이라는 자리를 너무 쉽게 생각했다고 할 것이다.
설령 선의를 인정한다 해도, 곽 교육감은 또다른 불법 시비에 휩싸일 수 있다. 당장 ‘2억원에 대한 증여세를 냈느냐’는 질문이 나오면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 고위 공직자들이 자녀에게 수천만원을 줬다가 인사청문회에서 증여세 탈루로 곤욕을 치르는 게 현실이다. 우리 사회의 도덕적 잣대는 그만큼 엄격해졌다.
이번 사건으로 국민들이 반부패 교육 등에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곽 교육감 당선에 애를 쓴 진보·개혁 진영의 정치적·도덕적 상처 또한 적지 않다. 사법 처리의 관건인 대가성 여부와 관계없이 그가 교육감 자리를 지속할 수 있는 권위와 도덕성을 잃었다고 판단하는 이유다. 정치권은 물론 교육감 선거에서 그를 지지했던 시민사회단체들까지 나서서 사퇴를 요구한 것은 시민의 지지라는 근본 토대가 무너졌음을 보여준다. 곽 교육감은 스스로 물러나는 게 옳다. 이와 별개로 서울시민들이 곽 교육감 선출을 통해 표출한 교육부패 추방, 학생인권 강화, 교육복지확대 등의 가치들이 이번 사건으로 훼손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다.

2011년 8월 29일 월요일

수비크에서 영도까지, 한진은 하나다? [2011.08.29 제875호]


이글은 한겨레21에서 퍼왔습니다.
[기획1] 필리핀 수비크에서 보고 들은 한진중공업 노동자, 철거민의 고통… “한국의 발전은 노동자 탄압한 성과냐”고 동행한 네팔·베트남 친구들이 묻다

» 필리핀 한진중공업 수비크조선소의 노동조건을 고발하는 자리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고와 저임금에 시달리는 이들의 이야기는 그칠 줄 몰랐다. 문아영 제공
지난 4월부터 필리핀 마닐라에 머물고 있다. 유엔평화대학교 평화교육대학원 과정의 한 학기가 이곳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2차 희망버스가 부산을 향할 즈음 함께 공부하는 다국적 친구들에게 수비크 방문을 제안했고, 지난 7월16일 새벽 5시 마닐라의 카티푸난 거리에서 필리핀의 주요 대중교통 수단인 지프니(2차 세계대전 뒤 남은 미군용 지프를 개조한 형태의 승합차) 한 대를 타고 수비크를 향해 출발했다. 베트남·네팔·타이·일본·동티모르·미국·필리핀 등 유엔평화대학교 석사과정 재학생 10명이 모인 것이다.
임금 떼이고 벌금 매기고
필리핀 민주청소년단체에 속한 두 사람이 여정에 동행했다. 2009년부터 수비크조선소 노동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필리핀 사회단체 ‘마카바얀’의 총무인 프레시 다국과 한진 쪽에서는 인정받지 못한 비인가 노조지만 필리핀 고용노동부에는 협상 대상자로 인정받은 수비크 한진조선소 노동자협회의 총무 조이 곤잘레스도 합류했다. 승객들이 서로 마주 볼 수밖에 없는 지프니의 특성 덕분에 여정 내내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프레시는 한진 사태와 관련된 한국 언론의 보도에 불만을 토로했다. 나아가 자본과 권력이 결합된 이슈에 대한 대다수 언론의 소극적인 보도 태도를 비판하며 이것은 비단 한국 언론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다. 필리핀의 주요 언론 보도 어디에서도 한진 수비크조선소의 노동권 문제에 대한 기사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프레시는 문화방송의 의 현지 취재를 안내했던 사람이다. 한진의 정리해고 사태와 관련한 의 인터뷰에 한국의 박성미 감독과 함께 필리핀 쪽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던 그녀는 이 취재 내용을 희석시켰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며 유감을 표했다. 수비크조선소 노동자의 고충과 강제 이주당한 주민들 부분은 거의 보도되지 않았고, 한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만이 중점 보도됐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수비크에 도착했다. 조이는 우리를 수비크만의 한 지점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해안과 산자락이 어우러진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물길을 헤치며 그물을 걷는 조그만 고깃배 옆에서 작살을 든 청년들이 고기를 잡고 있었고, 아이들은 다이빙을 하며 여유 있게 그 주변을 헤엄쳐 다녔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크기의 가솔린 탱크선이 정박해 있는 저 너머에 한진 수비크조선소가 보였다. 바다를 둘러싼 사람들의 다양한 삶과 그 삶을 둘러싼 사회가 이 한 장면에 녹아 있었다. 미군기지를 거쳐 이제는 외국 기업의 근거지가 된 수비크 바다와 삶의 터전은 여러 세대를 거친 강제 퇴거의 현장이기도 했다. 거대 외국 기업의 하청으로 얻은 일자리에는 고된 노동과 생소한 군사문화, 그리고 억울함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사전에 한진 수비크조선소 쪽에 인터뷰 요청 공문을 보냈으나 바쁜 일정 관계로 인터뷰에 응할 수 없다는 담당자의 응답이 돌아왔다. 우리는 노동자와 현지 주민들의 인터뷰만 진행했다. 먼저 노동자들로부터 전해들은 수비크조선소의 노동계약 시스템은 이러했다(한진으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 없었으므로 노동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전해들은 바를 그대로 옮긴다). 노동자들은 한진과 고용계약을 맺고 직업훈련 과정을 밟게 된다. 훈련이 끝나는 시점에서 대부분의 노동자는 또 다른 계약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받는데, 그 계약서에는 한진의 직접 고용 여부와 계약 기간이 명시돼 있다. 노동자를 모으면서는 직업훈련이 ‘무료’라고 홍보했음에도 훈련과정 이후 서명해야 하는 계약서에는 매 15일마다 노동자의 급여에서 3%가 차감돼, 한 달에 6%의 임금이 훈련비 명목으로 저당 잡힌다고 적혀 있다. 노동자들은 5년의 계약 기간을 다 채운 경우 이 금액에 해당하는 약 15만페소를 돌려받게 되지만,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거나 해고당하는 경우에는 15만페소 중 저당 잡힌 급여를 제외한 나머지 차액을 빚으로 떠안게 된다.
한 40대 노동자는 한진과 직접 고용 관계로 5년의 계약 기간 중 4년6개월의 업무 기간을 채웠지만, 계약 만료를 6개월 남겨둔 시점에서 하부 용역업체와의 계약을 강요하는 사 쪽에 반대하다 해고됐다. 따라서 그의 급여에서 다달이 차감됐던 15만페소에 달하는 금액은 계약 불이행 명목으로 영영 받을 수 없게 돼버렸다. 오히려 채우지 못한 6개월치에 해당하는 나머지 금액인 약 1만5천페소를 벌금 명목으로 납부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많은 해고 노동자가 이런 상황에 직면해 있다. 

» 한진중공업 수비크조선소 건설로 강제 이주당한 주민들이 사는 마을의 소년. 이들은 이주당한 곳에서 다시 내쫓길 위기에 놓였다. 문아영 제공
강제 이주당한 곳에서도 떠나라
우리는 수비크조선소에서 10km쯤 떨어진 카왁 마을로 이동했다. 부족한 세간살이가 쉬이 들여다보이는 원두막 같은 집들이 해변 수풀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이 마을은, 2007년 한진 수비크조선소 건설로 강제 이주당한 주민들이 재정착한 곳이다. 당시 이주 대상에 포함됐던 400여 가구 중 보상에 동의한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이주했지만, 철거 당일까지 반대한 주민들은 무장군인들에 의해 마을 밖으로 쫓겨났다. 그들은 수비크조선소의 확장에 따라 두 차례 더 이동한 끝에 이 마을에 정착했다. 주민들은 공포의 기억을 증명하려는 듯 당시의 사진들을 가져와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가장 먼저 보상에 동의한 주민들은 대부분 당시 마을에 정착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보상금을 받아 마을을 떠나는 것도 그들에게는 괜찮은 거래였을 것이라고 주민들은 입을 모았다. 상당수 주민들은 정당한 보상금을 받아내려는 긴 싸움에 지쳐 하나둘 마을을 떠났다. 마을 주민들이 수비크만 관리 당국에 요구하는 보상금은 30만페소로 한국 돈으로 약 760만원에 해당한다. 그러나 관리 당국이 주민들에게 제시하는 보상금은 1만~2만1천페소(약 25만~53만원)에 불과하다.
현재 마을에는 보상에 합의하지 않은 121가구의 주민들이 모여 함께 살고 있다. 남은 주민들은 대부분 강제 이주 전에 살던 마을에서 30년 넘게 어업이나 농업에 종사했다. 그런데 이곳에 정착한 지 3년이 안 된 이들에게 한 달 안에 다른 곳으로 이주하라는 통보가 다시 내려졌다. 이 땅이 본래 한 리조트의 사유지라는 것이다. 애초에 이 재정착촌을 제공한 것은 수비크만 관리 당국이었다. 정부가 이곳이 사유지임을 숨겼다는 사실, 그리고 언제 어떻게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한 채 또다시 쫓겨나야만 하는 현실에 주민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아이들이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없어 마을 한구석에 학년마다 한 학급씩 있는 초등학교를 세웠다. 한 주민은 자신도 예전에는 아이들을 충분히 교육하고도 남을 만큼의 수입을 벌어들이는 성공한 어부였지만, 강제이주 뒤에는 하루에 한 푼도 벌기 힘들다고 한탄했다. 현재 수비크조선소가 위치한 지점, 즉 주민들이 본래 거주했던 마을의 앞바다는 수심이 깊고 조류가 교차하는 까닭에 어종이 다양하고 개체 수도 풍부했지만, 조선소 건설 이후 보안요원들이 접근을 제한한다고 한다. 이제는 마을 앞 얕은 수심의 연안에서 조업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조업량은 생계 유지에 역부족이었고, 숯을 만들어 팔기 시작한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한 칸의 나무집과 불에 그을리고 있는 커다란 나무토막이 전부였다.
말을 아끼는 수비크조선소 노동자들
이날 저녁 6시께 우리는 시내로 돌아와 수비크조선소의 통근버스가 도착하는 버스터미널 근처 시장으로 갔다.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시장은 포장마차 상인과 교복을 입은 학생, 한진에 자재를 납품하는 업자, 버스 운전기사, 그리고 한진에서 돌아오는 통근버스에서 내리는 노동자 등 다양한 사람들로 붐볐다. 먼저 포장마차 상인들은 한진 조선소 덕분에 보장되는 수입이 적지 않다고 했다. 몇몇 포장마차에는 한진을 지지하는 메시지가 붙어 있었다. 한편 한진 수비크조선소 사무직 노동자들은 현재 일어나는 생산직 노동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입을 닫았다. 대부분의 생산직 노동자도 한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다가가 인터뷰를 요청하면 많은 노동자가 반응하지 않은 채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거나 아예 모른다고 대답했다. “나는 중립이고 싶다”고 말하는 노동자도 있었다. 인터뷰에 응한 노동자 중 한 사람은 혹시 한진과 문제가 생기더라도 노동자 단체를 통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 방안을 찾을 것이며, 노동 단체가 문제를 크게 만드는 것이 오히려 불편하다고 했다. 어떤 노동자는 자신은 노동조합에 동참할 의사가 없으나, 한진이 노동자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했다. 버스가 한 대 두 대 터미널로 들어서고, 노동자들이 앞다퉈 포장마차에서 급한 허기를 채운 뒤 집으로 향해 가는 일상적인 풍경 너머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마닐라로 돌아온 지 며칠 지나지 않은 7월19일, 한 수비크조선소 노동자가 야간 작업 중 추락해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2007년 수비크조선소가 문을 연 이래 한진노동자협회에 보고된 사망사고만 40건이 넘었다. 한진조선소는 이제 조선소가 아니라 무덤이라고 노동자들은 말한다.
네팔에서 온 친구는 노동권에 대한 기본적 지식조차 없는 기업이 어떻게 대기업이 될 수 있었는지 의아해하며 한국의 노동환경이 아직도 이런 지경인지, 한국의 발전이라는 것이 결국 노동자를 탄압해 얻어낸 성과인지를 물어왔다. 아시아의 경제발전 모델이라는 한국의 위상이 위선에 불과한 것인가 물어오는 그녀에게, 선뜻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들려줄 수 없었다.
얼마 전 마카바얀 총무인 프레시는 8월4일에 예정돼 있던 2차 필리핀 노·사·정 간담회가 한진 쪽의 참석 거부로 취소됐다는 전자우편을 보내왔다. 직접 고용의 책임을 회피하며 수비크조선소 내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는 한진중공업의 태도를 다시 보여주는 일이었다. 외부의 비판적 목소리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한진의 태도는 더욱 비판받아 마땅하다. 한진중공업이 말하는 것처럼 문제가 없다면 어째서 대화에 응하지 않는가.
한국에서 만난 수비크조선소
지난 8월5일, 방학을 맞아 잠시 한국에 돌아와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앞을 찾았다. 한진중공업 건물 맞은편에는 웅장한 수비크조선소의 위용을 자랑하는 거대한 홍보 간판이 걸려 있었다. 파란 수비크만의 물결과 더불어 근사한 조선소의 사진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애써 포장하려는 듯 보였다. 무겁게 영글어가는 소금꽃나무를 짊어진 영도와 수비크의 노동자들, 그리고 ‘노동자’라 불리는 모든 이를 위해 김진숙은 푸른 크레인 위에서 7개월이 넘는 시간을 살아왔다. 기업의 생리가 이윤 추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사회적 책임을 부정하는 기업의 윤리는 부정(不正)하다. 노동자는 대체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마침내 ‘한진중공업’의 이름을 달고 바다로 나갈 배를 만들어내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땀, 그들의 존엄성과 삶을 영위하게 하는 그 고귀한 노동을 인정하라.
문아영 유엔평화대학교 평화교육 석사과정

[사설] 2억원이 어떻게 ‘선의에 입각한 돈’일 수 있는가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1-08-28자 사설을 퍼왔습니다.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이 어제 기자회견을 열어 지난해 6·2 지방선거 당시 교육감 후보를 사퇴한 박명기 교수에게 2억원을 주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후보 단일화 대가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박 교수가 교육감 출마 과정에서 많은 빚을 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안타까워 돈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곽 교육감의 이런 해명은 이해하기 어렵다. 곽 교육감은 앞으로 진행될 검찰 수사 결과에 따른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곽 교육감은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대가에 대한 어떤 약속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럴 개연성이 크다고 본다. 당시 단일화는 시민사회 원로들의 중재로 이뤄졌다. 설사 박 교수가 사퇴 대가를 요구했다고 해도 그런 약속이 명문화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모든 게 해명되는 건 아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 후 곽 교육감이 박 교수에게 2억원을 주었다는 것이다. 단일화 당시 대가 약속이 없었다고 해서 나중에 2억원을 준 것이 문제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선의로 2억원을 주었다는 것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곽 교육감은 개인이 아니라 서울시 교육감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공인이다. 2억원의 돈을 받은 박 교수도 그저 그런 개인이 아니다. 두 사람 관계는 지난해 교육감 후보 선출 당시 경쟁자였다가 한 사람은 교육감에 당선되고 한 사람은 사퇴한 특수한 사이다. 이런 사이에 개인적인 선의로 2억원을 주었다는 걸 누가 수긍하겠는가.
법학 교수였던 곽 교육감이 ‘인정 있는 법’을 내세우며 2억원 지원에 불법성이 없음을 강조하는 것도 구차해 보인다. 물론 실정법을 글자 그대로 현실에 적용할 경우 사회가 너무 메마르고 인간적인 측면이 도외시되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사회적 약자에게나 적용될 논리다. 국민의 모범이 돼야 할 고위 공직자에게는 오히려 더욱 엄정하게 법 적용을 해야 한다.
오세훈 서울시장 사퇴 직후 본격화한 이번 수사는 그 착수 시점부터 정치적 의도를 의심받아 왔다. 하지만 곽 교육감이 ‘진실’을 밝힌 만큼 이에 대한 검찰 수사와 법적 판단만 남은 것 같다. 검찰은 정치적 의도를 철저히 배제하고 법과 원칙에 따른 수사를 해야 할 것이다. 곽 교육감도 사법당국의 판단에 따라야겠지만 사법적 판단이 내려질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인지는 신중하게 고민하기 바란다.

중국, 세계자본주의의 운명을 거머쥐다 [Cover Story] 세계경제 새 길을 묻다- ① 중국은 소방수가 될 것인가


이글은 한겨레신문 Economy Insight의 기사를 퍼왔습니다.
안드레아 뵘 Andrea Böhm 정치부 기자
우베 장 호이저 Uwe Jean Heuser 경제부 편집장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오늘 아침 민병대와 시위자들 간에 다시 무력 충돌이 빚어졌다. 맨해튼의 은행과 상점은 일제히 문을 닫았다. 지난해 미국 정부가 사회보장 예산의 집행을 중단한 이후, 미국 시민들은 소비를 거부하는 차원에서 대도시의 쇼핑몰과 중앙 광장을 매주 점거하고 있다. 
중국 총리의 미국 방문을 앞두고 워싱턴에서 대규모 시위가 예정돼 있다. 중국의 신용평가사들은 미국 국채 신용을 디폴트 수준으로 강등했다. 미국 정부가 이미 크게 삭감된 국방 예산을 추가로 3분의 1가량 더 삭감하지 않으면 미국의 추가 구제금융 지원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중국은 단호히 입장을 밝혔다.”
지난 8월19일 다우존스 지수(1.57% 하락)와 나스닥(1.62% 하락)이 동시에 하락하는 등 더블딥에 대한 우려가 높아진 미국의 미래를 그리면 이 정도는 되지 않을까?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게리 슈테인가르트는 지난해 발표한 소설 (Super Sad True Love Story)에서 미국의 미래 모습을 이와 비슷하게 그리고 있다. 그는 미국의 몰락을 묘사한 소설에서 은행 시스템 붕괴를 소재로 삼을 계획이었는데, 소설 집필 중에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는 사태가 실제로 벌어졌다.

지난 8월9일 영국 맨체스터에서 진압경찰들이 소요 사태를 일으킨 청년들을 쫓고 있다. 경제위기로 인한 소요사태는 미국에서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잃어버린 10년’ 세계가 경험할 수 있는 상황 
2011년의 상황 역시 그의 소설 내용을 현실에서 그대로 답습하기라도 하듯 전개되고 있다. 소설 내용처럼 실제로 지난 7월 셋쨋주에 중국의 한 신용평가사가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 가능성을 경고했다. 또 국제적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지난 8월5일 미국의 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한 단계 강등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경제 현실은 소설가들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
유럽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 부도 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있는 나라들이 그리스와 포르투갈에서 스페인과 이탈리아로까지 확대되면서 유럽 전체가 사투를 벌이고 있다. 
‘유로화의 종말’과 ‘미국의 국가 부도’는 최근 뉴스 지면을 도배하는 주요 이슈다. 이에 따라 국제통화기금(IMF)이 유럽 국가들에 긴축재정을 지시하고 미국을 향해서는 과도한 국가 채무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지시와 경고는 주로 아르헨티나, 타이 혹은 가나 등 비서방국가들을 주 대상으로 한 점에서 국제경제의 급변한 상황을 느끼게 한다.
유럽과 미국은 언론에서 그들의 몰락에 대한 보도가 무한 반복되면서, 역설적으로 지금의 재정위기에 오히려 무감각하게 됐다. ‘어차피 상황은 계속 악화될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 깊이 박히면서 현 재정위기의 심각성에 대한 각성 효과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현재 유럽과 미국의 경제를 위협하는 큰 위험은 바로 ‘유럽과 미국 자신’이다. 이번 위기가 심각한 이유는 유럽과 미국의 위기이자 유럽과 미국의 정책, 그리고 그들 삶의 방식의 위기이기 때문이다. 즉, 이제 그들의 방식이 더 이상 세계경제의 모델이 될 수 없다는 신호음인 것이다.
유럽과 미국의 재정위기로 인해, 전문가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더디게 이뤄질 것으로 내다본 ‘중국으로의 지정학적 권력이동’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지정학적 권력이동은 미국과 중국 간의 양자관계는 물론이고, 유럽의 정치적 미래와 글로벌 위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중국은 최단기간에 미국의 최대 채권국으로서 정치적 입지를 다지게 되었고, 유럽은 정치적으로 스스로를 구시대적 존재로 전락시키고 있다. 유럽과 미국이 과연 다시 헤게모니 세력으로 글로벌 무대에 컴백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한 차례 경기침체를 겪은 미국과 유럽이 2010년만 해도 회복세를 보이면서 금융위기는 지났다고 다들 믿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었다. 유럽과 미국은 파산 위기에 놓인 은행들은 구제했지만, 이 과정에서 국가재정은 파탄이 났다. 특히 분수에 맞지 않게 국가예산을 마구 써댄 그리스 등 유럽의 일부 국가들은 심각한 부도 위기에 처했다. 서구 선진국들은 1929년 대공황 이후 가장 위험한 딜레마에 처해 있다. 2000년대 들어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는 경제 거품이 위험한 수준으로 커졌다. 위험천만하게 커진 경제 거품은 2008년 그리스와 영국, 스페인과 아일랜드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미국과 유럽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재정 적자를 감축하지 못하면, 서구에서 시작해 아시아로 전파된 대공황이 언제든지 쓰나미처럼 전세계를 휩쓸 수 있다. 일본인들은 1990년대 초 거품 붕괴 뒤에 이어진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의 불황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불렀지만, 이제부터는 전세계가 함께 겪는 잃어버린 10년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잃어버린 10년이 되지 않도록 세계가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알렉산더 해밀턴은 “미합중국의 해외 및 국내 부채는 자유에 대한 대가였다”고 말했다. 이 말은 지금도 미국 재무부 웹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해밀턴이 그렇게 말한 지 200년도 더 지난 지금 미국은 14조달러라는 산더미 같은 부채 위에 앉아 있다. 아무리 부채가 자유와 권력의 대가라 해도, 이제 덩치가 너무 커져 오히려 자유와 권력을 위협하는 수준에까지 이른 것이다. 

쌓여 있는 미국 100달러 지폐 뭉치. 기축통화인 달러화를 발행하는 미국 경제의 침체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세계경제가 요동치고 있다.
중국에 저당 잡힌 미국의 자유와 권력
중국은 미국이 쌓아놓은 빚더미의 가장 큰 채권자로 이미 자리잡았다. “당신의 채권자와 어떻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대화할 수 있습니까?” 미국과 중국의 양자관계를 빗대어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이 한 이 말은 대외비로 분류됐지만, 위키리크스 덕택에 몇 달 전 세상에 공개됐다. 중국이 보유한 미국의 국채는 어느새 1조1500만달러를 돌파했다. 중국은 정치적으로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 개입을 거부했지만, 경제적으로 볼 때 미국 국채 매입을 통해 두 전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꼴이 되었다.
중국이 최대 채권국이 되면서 미국의 외교정책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크게 늘어났다. 외형적으로는 이런 모습이 아직 눈에 띄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가령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중국의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난 7월16일 달라이 라마와 만났다. 물론 중국은 이에 항의했다. 하지만 이는 두 나라의 상징적 대결에 불과하다.
중국과 미국이 상징적 대결을 넘어 실제 대립 구도에 처하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채권국 중국이 이미 칼자루를 쥔 상태다. 대만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현재 대만에 대해서는 미국이 사실상 독립성을 보호해주고 있지만 중국은 자기 영토라고 주장한다. 대만을 놓고 미국과 중국이 실제 대립하는 상황까지 치닫게 된다면, 중국 정부는 미국에 군사적 위협을 가할 필요조차 없다. 중국 정부가 미국 국채 매각을 고려하고 있다는 언론기사 하나면 충분하다. 채무국인 미국은 당장 대만에서 손을 뗄 것이다. 중국이 미국 국채 매각 의사를 더 강하게 드러내면, 미국은 더한 행동도 하게 될 것이다. 미국은 중국의 반체제 인사들을 위해 힘쓰지도 않고, 중국의 해적 제품에 대해 단호한 대응도 하지 않고, 북한의 핵확산을 막을 의욕도 잃을 수 있다.
역사가이자 미국 외교위원회(CFR) 연구위원인 서배스천 맬러비는 미국 정부에 대해 “‘부채 위에 쌓은 권력은 언젠가 흔들리기 마련’이라는 역사의 교훈을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중국은 지금까지 미국과 유럽의 재정 적자 위기에 단지 구원투수로 나서고 있다. 승리자로 행사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중국 내 정치적 상황이 중요한 요인이 됐다. 중국 수도 베이징에 주재한 한 서구 외교관은 이와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중국 관료들 중에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크게 확대된 중국의 세계적 영향력을 내세울 생각을 하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권력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유럽시장 공략 위한 중국의 당근, 직접투자와 국채 매입
미국 국채를 대거 보유한 중국은 자신이 강력한 정치적 카드를 손에 쥐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채무국이 몰락하면서 일으키는 불똥이 결국 채권국에도 튄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중국 정부 정책의 최우선 순위는 현재 자국의 안정이다. 중국인들도 점점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을 만큼, 중국의 양극화 문제는 훨씬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승리자가 아닌 구원투수가 됨으로써, 중국 정부는 서구의 적자 문제를 중국 경제의 안정화를 꾀할 수 있는 기회로 인식하고 있다. 유럽연합의 재정 적자 위기는 무엇보다 중국 기업들이 유럽 시장에 뿌리내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이전까지 높은 비용 때문에 접근할 수 없던 유럽 시장을 재정위기 뒤 저렴한 비용으로 두드릴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또한 유로화 매입은 중국이 달러 의존성을 낮출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총리와 주석 등이 앞장서서 유럽을 방문해 중국의 유럽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원자바오 중국 총리는 지난 6월 말 10여 명이 넘는 장관들을 대동한 독일 베를린 국빈 방문에서 “위기에 처한 것은 유럽 통화가 아닌 일부 유럽 국가들의 재정예산일 뿐”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중국은 유럽의 재정 적자 위기를 화두로 삼는 것을 조심스러워했다. 이런 조심스러운 태도는 중국-독일 정부회담에 참석한 중국 쪽의 한 참석자가 “중국은 유럽에서 ‘새로운 제국주의 권력’이 아닌 ‘조력자’로 각인되기를 원한다”고 말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이 유럽의 조력자로 각인되는 것이야말로 유럽 쪽에서 정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부분이다. 중국은 자신들의 외환보유고에서 유로 자산 비율을 3조유로 이상으로 올리겠다고 유럽에 약속했다. 불과 한 자릿수에 불과하던 중국의 유로화 보유 비율은 지난 몇 년 사이 25%가량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지난 7월26일 한 중국인이 홍콩 외환거래소 앞에 세워져 있는 위안화와 달러, 유로를 배경으로 한 광고판 앞을 지나가고 있다.
이제 중국의 유로 보유고의 속내를 들여다보자. 유로존은 이미 중국에 7천억달러 채무를 지고 있다. 중국 쪽은 유로존의 중국 채무액이 앞으로 계속 늘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중국은 재정 적자 위기에 빠진 유럽 국가들에 경제성장 촉진을 위한 직접투자액을 늘리면서 국채를 더 매입할 것을 약속한 상태다.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국무총리는 지난 6월 말 국빈 방문한 원자바오 중국 총리에게서 직접투자와 국채 매입 약속을 받은 뒤 벌써 재정위기의 근심에서 해방된 것처럼 기뻐했다. 중국은 이런 직접투자와 국채 매입을 통해 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고, 유럽 시장을 효과적으로 공략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이 자국의 안정화와 발전을 위해 예나 지금이나 미국과 유럽을 계속 필요로 한다는 것은 안도할 만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중국의 처지에서 말하면, 서구의 몰락이 지금 시점에서는 너무 이르다고 판단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럼으로써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가들)이 서구에 대한 승리자가 아닌 구원투수 구실에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중국이 서구의 구원투수로 나서지 않는 것이 서구에는 차라리 좋을 수도 있다. 인권을 무시하고 정치적 반대파를 억압하는 정권에 의존하는 것은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국무총리에게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유럽연합으로서는 절대 달가운 일이 아니다.

미국과 유럽의 대응책은 ‘임시방편’일 뿐
중국이 구원투수로 나서고, 유럽과 미국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잃게 되는 과정에서 ‘전 지구적 과제 해결’이 늦춰질 수 있다는 점도 관계자의 우려를 높인다.
독일개발정책연구소(DIE) 디르크 메스너 소장은 올해 초 앞으로 10년 동안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글로벌 개혁 의제’로 친환경적 세계경제로의 전환, 아프리카의 정치적 및 경제적 현대화, 더 강력한 주요 20개국(G20)이라고 쓴 바 있다. 그는 “유럽이 다가오는 10년 동안에도 계속 힘을 잃게 된다면, 유럽의 소국가들과 중간 규모 국가들은 자국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진행되는 세계화의 동네북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DIE와 밀접하게 협력 중인 남아프리카 국제문제연구소 엘리자베스 시디로포우로스 소장은 “미국 정부와 유럽 국가 정부들이 현재 ‘자아반성’에 여념이 없다는 것을 일견 이해는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디로포우로스 소장은 “IMF에서 시작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그리고 기후보호 정책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적 개혁이 시급한 상황에서 유럽과 미국의 자아반성은 최악의 타이밍”이라고 지적했다. “2008년과 2009년 금융위기를 겪은 뒤 전세계는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에 공감대를 형성했다. 하지만 지금 어떤 변화를 해야 하며, 기존 집을 허물고 새로운 집을 지어야 할지, 아니면 기존 집을 리모델링해야 할지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전세계는 서 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미국과 유럽이 전 지구적 개혁이 절실한 이 시점에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이 전 지구적 개혁에 관한 의견을 조율할 수만 있어도 큰 성과를 올릴 수 있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의 관계는 그렇지 못하다. 여기에는 유럽의 중심국가인 독일 정부가 파트너 국가들이 기대하는 주도적 역할을 도외시하는 탓이 크다. 그리고 독일 정부와 미국 정부 간에는 침묵만이 흐르고 있다. 독일의 기민당·기사련의 한 미국통은 “유럽과 미국이 동시에 재정위기를 겪으면서 전략 지정학적 합의라는 것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독일과 미국 사이에 위원회나 기관이라는 것도 없고, 특히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사이도 원만하지 못하다.”
미국과 유럽은 현재의 위기에 대한 대응책을 내놓고 있지만, 이는 잠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는 ‘임시방편’일 뿐 구조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대대적인 변혁’을 시작하기 위한 이런 조그만 걸음이 미국과 유럽에 필요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대대적인 변혁이란 대체 무엇일까?
“2012년 12월1일 속보다. 방금 선출된 공화당 출신의 미국 대통령은 초당파적인 긴축재정안을 오늘 선포했다. 사회보장비뿐만 아니라 국방부 역시 대대적으로 국방비를 감축해야 한다. 조지 부시 행정부 시절의 부유층 감세 정책도 철폐됐다. 공화당 출신의 미국 신임 대통령은 11월 대선에서 기독진보주의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민주당 후보를 힘겹게 이길 수 있었다. 기독진보주의자들은 지난 몇 년간 기독우익 세력의 패권에 치명타를 입혔다. ‘부유층이 모든 것을 가져가는’, 전혀 미국적이지 않은 이념을 이제는 극복할 때라고 신임 대통령은 외쳤다. 또한 과도한 온실가스 배출 역시 미국이 극복해야 할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유럽과 미국의 기후협약이 과도한 온실가스 배출에 제동을 걸 것이라고 밝혔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니콜라스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유럽연합 이사회 의장국의 장클로드 트리셰 신임 의장이 오늘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서 발표한 재정 적자 위기 해결책은 유럽연합 공동의 안정화에 기여할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혹독한 재정 적자 축소 방안과 더불어 최소 몇 년간 유로존을 떠나야 하는 그리스를 위한 대대적인 부흥 프로그램이 시작될 것이다. 같은 시각 이탈리아의 신임 총리는 이탈리아도 독일처럼 국가 부채 상한선을 헌법에 명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지난 8월8일 중국의 일간신문들이 일제히 미국의 신용등급 하락과 그에 따른 세계경제 위기 상황을 전하고 있다(왼쪽). 지난 1월18일 후진타오 중국 주석의 미국 방문을 앞두고 워싱턴 거리에 미국과 중국 두 나라 국기가 나란히 걸려 있다. 미국이 현재 경제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언젠가 중국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오른쪽).
미국·유럽, 근본 개혁 통해 헤게모니 되살릴까?
이 시나리오는 미국과 유럽이 다시 헤게모니를 가지기 위한 대대적인 개혁의 첫 발걸음이 될 것이다. 불가능하지만은 않은 시나리오다. 다만, ‘현재’로서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이는 서구가 얼마나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개혁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면 미국과 유럽의 몰락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앞으로 몇 년 뒤에는 미국과 유럽의 몰락을 다룬 소설이 출판시장에 쏟아져나올 것이다. 이번에는 공상과학(SF) 소설이 아닌 현대문학에서 말이다. 
ⓒ Die Zeit·번역 김태영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