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26일 금요일

‘조폭 형님’이 된 국가와 자본


이글은 한겨레신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기사를 퍼왔습니다.
“경상자는 헤아릴 수도 없고, 중상자만 50명이고, 사경을 헤매는 사람도 3명 이상입니다. 11월 5, 6, 7, 8일 저들은 1천여 명의 불량배 양아치들을 고용해 동네를 광란의 유혈극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이 폭력배들은 쇠파이프 쇠꼬챙이를 꽂고 각목에 칼을 꽂아들고 마구잡이로 구타하고 집집마다 뒤져 남자만 보면 무조건 난타했습니다. 또 삽으로 머리를 내리찍고 해머로 할머니의 어깨를 으깨버렸습니다. (중략) 이들은 허가받은 살인 청부업자들이었습니다. 경찰은 이러한 학살극을 오히려 두둔하고 있습니다.”
이 전단의 첫 문장은 ‘지금 사당동은 또 하나의 광주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로 시작한다. 1986년께 서울 사당동 철거현장의 풍경이다. 80년 5월 며칠 동안 발생했던 광주사태가 87년 정치 민주화가 이루어진 지 20년이 훨씬 지난 2011년 오늘 이 시점까지 철거현장이나 노동현장에서 계속되고 있다. 80년의 광주사태는 당시에는 은폐됐으나 몇 년 뒤부터 온 국민에게 알려지고, 충분하지는 않지만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명예 회복 작업도 진척됐다. 그러나 철거용역의 폭력은 어디서 어떻게 일어나는지, 누가 가해자인지, 몇 사람이 어떻게 다쳤는지 도무지 알려진 것이 없다. 백주에 용역이 주권국가의 국민인 세입자들에게 식칼을 휘두르고 여성의 머리채를 쥐고 흔들거나 성폭력을 가해도 경찰이 비디오 게임 보듯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는 폭력은 우리 사회에서는 ‘비가시화’돼 있다.
이론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폭력이 아닌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교환,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법과 사법기구에 의해 움직이는 체제다. 폭력은 공권력만이 배타적으로 사용하고, 군과 경찰 등 억압기구는 전쟁이나 국가의 큰 위기 상황에서만 가동한다. 그런데 법이 정지되고 공권력이 무력화된 상황, 자본주의적 상품·노동·신용 거래가 사적 집단들 당사자 간에 해결해야 할 사안이 되는 ‘자유방임’ 상황에서 자본은 사적 폭력에 의존하지 않고서 이윤을 실현할 수 없게 된다. 즉 물건을 팔았는데 상대방이 돈을 지불하지 않는 경우, 내 상품과 돈을 폭력배들이 강제로 빼앗아가려고 할 경우, 노동자들이 파업이나 사보타주(태업)를 해서 공장을 정지시킬 경우, 소유권 없는 사람들이 토지를 ‘불법’ 점거할 경우가 그러하다.
법과 공권력을 대체하는 사설 폭력
그런데 시장경제 아래서도 깡패·파업파괴자 등 사설 폭력 집단이 법과 공권력을 보완하거나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공권력이 무력화해 있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때이다. 사설 보안요원의 폭력, 관료 부패, 범죄 등이 공존하는 자본주의는 공권력이 자본에 포획돼 있는 경우, 자본의 원시적 축적 단계에서 나타날 수 있다. 어떤 경우든 대자본과 사설 폭력이 공권력을 완전히 압도하거나 사실상 법, 관료기구, 시장질서를 쥐고 흔든다.
폭력·청부업자들이 공권력과 합작하거나 공권력을 대신하는 자본주의는 ‘폭도 자본주의’(Mob Capitalism), ‘마피아 자본주의’(Mafia Capitalism) 혹은 ‘깡패 자본주의’(Gangster Capitalism)라 부를 수 있다. 과거 파시즘 아래의 여러 나라나 미국, 그리고 현재의 러시아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사설 폭력집단들은 유력 정치인과 심지어 국가의 최고권력층과 선을 대고 있는데, 이때 이들은 치외법권을 행사하게 된다. 한나 아렌트는 ‘폭도(Mob)들은 완전히 원자화된 개인들이 아무런 사회적 응집력 없이 권력에 순응하면서 이기적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로 보았다. 이 경우 국가나 자본에 고용된 경호 보안요원들은 실제로 폭력조직에서 충원된다.
한국에서 용역회사가 등장한 시점은 1980년 후반, 정부의 재개발 정책이 합동 재개발, 즉 시공사-조합-주민 간 해결해야 할 사안으로 변화된 이후였다. 재개발의 공적 성격은 완전히 사라지고 힘없는 세입자들이 바로 거대 시공사와 조합이 고용한 철거용역의 폭력에 노출됐다. 돈을 가진 건설 시공사가 실질적 개발의 주체가 되면 조합 간부, 구청, 경찰, 지역 여당 국회의원까지 모두 이 먹이사슬에 연결돼 관청은 시공업체의 하수인 노릇을 한다.
법적으로는 ‘행정대집행법 2조’에 의해 관청이 해야 하는 철거 업무를 제3자에게 맡길 수 있다. 그래서 경찰·검찰·법원은 행정관청과 조합 그리고 사기업이 용역을 동원해 철거하거나, 노동자들을 해산시키는 일이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난 서울 용산 참사 당시 철거용역의 불법을 눈감아주면서 검찰은 “행정법상 행정의 보조자 역할을 했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을 통제·관리하는 것은 시공사이며, 용산참사의 경우에도 형식적 계약은 조합과 정비용역회사들이 맺고 있지만 실질적 관리는 삼성·포스코 등 대형 건설사들이 맡았다. 용역회사의 업무는 행정대집행이라 볼 수 없으며, 법적으로 규정된 임무를 위반한다.
1989년 이후 유명했던 용역업체 (주)적준개발 등이나 이번 용산 참사와 유성기업·한진중공업의 노조 파괴에 동원된 용역회사 사장들은 군 출신이거나 유력 정치인, 지방자치단체장들과 줄을 대고 있는 경우가 많다. 2009년 참사를 빚은 서울 용산 4지구의 재개발조합은 용산구청장과 친분 있는 이가 실소유주인 경비용역업체와 통상 가격의 갑절이 넘는 값에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


<서울 상도동의 철거 용역>, 2011-이종근
시공사에 고용된 구청·경찰·금배지
과거나 현재 현장에 투입되는 용역 직원들은 실제 조직폭력배 출신들로 충원되는 경우가 많다. 사설 폭력조직과 그 폭력의 희생자가 되는 집단은 거의 유사한 출신 계층, 우리 사회의 바닥 출신이다. 1945년 이후 해방 정국에서 북에서 내려온 서북청년단원들은 실업청년들이었고, 그들의 폭력에 희생된 제주도 농민들과 서울의 노동자들은 사실상 같은 처지에 있었다. 이승만 정권 이후 군사정권 시절 선거 유세나 집회에 동원돼 야당 운동원들에게 린치나 테러를 가하고 협박한 정치깡패들 역시 거의 바닥 출신이었다. 오늘날 철거현장에 동원돼 세입자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용역 직원들 역시 그런 일이라도 해서 일당을 챙겨야 먹고살 수 있는 사회의 주변층이나 가난한 일용직 청년들로 주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빈민이나 노동자들에게 ‘차마 해서는 안 될 짓’을 해서 먹고사는 슬픈 존재들이다. 
경찰이 철거용역들의 폭력을 묵인하거나 심지어 합동 작전을 하는 것은 천하가 아는 사실이다. 1980년대 사당동 철거에서 2009년 용산, 올해의 한진중공업 사태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경찰의 행동은 변함없었다. 나이든 여성이 건장한 남성들에게 머리채를 휘둘리며 죽도록 맞거나 성폭력을 당해도, 칠순 노인이 자식뻘 젊은이들에게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두들겨 맞아도 때린 사람들은 전혀 처벌되지 않고, 맞은 사람들만 업무 방해에 공무집행 방해로 구속된다.

아무리 세입자 또는 파업농성자라 하더라도 일단 시민이 무자비한 폭행에 노출돼 있는데 법을 근거로 이를 묵인하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 즉 경찰의 ‘비관여’는 실은 가장 적극적인 개입이다. ‘경찰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은 실제로는 ‘경찰은 가장 적극적으로 사설 폭력의 편에 서 있다’는 말이 된다. 즉 경찰과 사설 폭력집단 간에는 ‘작전’, 일종의 역할 분담이나 묵계가 있다. 그것은 공공연한 일이지만, 용산 참사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용역 집단이 경찰의 진압 도구까지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용역이 물대포를 쏘는 장면이 포착됐다.  

’바닥 출신’이 ‘바닥 인생’을 린치하다
장기농성을 벌이는 비정규직 노동자나 세입자들은 이 사회에서 갈 곳 없는 사람들이다. 전자에게 해고는 곧 생존권 박탈이며, 후자에게 철거는 주거지와 직장 박탈과 같다. 따라서 이들은 생존을 위해 버틸 수밖에 없다. 사용자의 해고권과 조합과 건설업체의 배타적 소유권이 아무런 저항 없이 관철된다는 것은 이들이 자신의 주거권·생존권을 스스로 포기한다는 말이다. 노동자들이 수십 년 동안 회사에 기여한 몫, 세입자들이 특정 지역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수십 년 동안 자식을 키우며 살아온 주거자로서의 권리가 배타적 재산권의 논리 아래선 완전 무효화된다. 이들의 저항은 현행법과 절차에서 보면 불법적일 수 있다. 그러나 생명과 존엄을 유지해야 할 인간이 자본과 국가의 개발 논리, 이윤 논리와 그들의 합동 작전으로 하루아침에 자신의 주거권과 생명권을 박탈당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폭도 자본주의, 마피아 자본주의의 논리인 셈이다.
서울 상도동의 어떤 세입자가 증언했듯이, 철거용역들은 원래 건물을 철거하러 오지만 실제로는 ‘사람’을 철거하러 온다. 이들에게 철거를 거부하는 세입자들은 자신의 일당을 앗아가는 성가신 존재이며, 무시해도 좋은 ‘잉여인간’들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폭력은 바로 이런 이중적 근거로 뒷받침된다. 철거용역의 처지에서 보면 신속한 철거와 진압만이 시공사에서 두둑한 경제적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은 더 잔인한 폭력과 더 험악한 말을 사용해서 세입자·노점상·노동자들이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빨리 항복하도록 만든다. 용산 참사 당시 경찰은 시민의 불편을 이유로 진압을 서둘렀지만, 실제 다급한 쪽은 착공이 늦어질 경우 막대한 이자를 지불해야 하는 시공사와 그들의 관리하에 있는 용역회사였다. 용산 참사처럼 국가가 비호하고 사기업이 주도하는 일방적 개발정책은 세입자의 생명을 요구했다. 
팔짱 끼고 개입하는 공권력 
어떤 철거민이 말한 것처럼, 경찰이 ‘자본의 지팡이’가 되고 깡패집단을 당국이 고용하는 정도가 이처럼 노골화되면, 국민의 이름으로 법을 집행한다는 근대 자본주의 국민국가의 명분과 이상은 없어진다. 러시아의 마피아 자본주의와 한국 철거 노동현장의 폭도 자본주의의 본질적 차이가 어디에 있을까? 마피아는 은밀한 테러와 암살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지만, 한국에서는 백주에 공공연히 린치와 폭력이 가해진다.
한국의 철거·파업 현장의 용역 폭력을 보면, 한국은 약자에게 가난이 어떻게 죽을 죄가 되는지를 가장 처절한 방식으로 가르쳐주는 자본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공공성은 완전히 실종되고 철저한 자본의 논리가 관철되는 곳에는 법도 공권력도 정지된다. 세입자들이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고 폭력 행사와 노조 파괴 업무를 전문으로 해서 돈을 버는 기업이 존재하는 자본주의, 그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타락한 형태의 자본주의다. 지난 두 민주 정부도 이 폭도들의 힘의 행사에는 전혀 손을 쓰지 못했다. 민주주의는 여기서 걸음을 멈추었다. 해방 뒤 우익 정치깡패에서 시작한 국가 후원 폭력은 1987년 이후에는 국가의 비호 아래 자본폭력으로 변했다. 후자의 경우 국가는 뒤로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장 적극적인 방식으로 개입하고 있다.
글•김동춘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장.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냈다. (2006년 개정판) 등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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