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28일 일요일

파워블로거, 그 ‘파워’의 이면 [김국현의 IT 인문학]


이글은 한겨레신문 Economy Insight의 기사를 퍼왔습니다.
김국현 정보기술 칼럼니스트
‘파워블로거’라는 단어에 불편한 함축이 스미게 된 것은 비단 최근의 사건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최근의 사건이란 공동구매로 유명한 어느 주부 블로거가 추천한 제품의 유해성이 사회적으로 이슈화하면서 중개 수수료 문제가 드러난 일이다. 어쨌거나 파워블로거가 추천한 제품들마다 사실상 커미션이 뒤따른다는 사실이 드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배반감에 휩싸였고, 결국 공정거래위가 나서서 ‘기만적 추천·보증 행위와 관련된 대책’을 마련하게 되었다. 

생산 아닌 유통의 민주화
파워블로거라는 이 외래 단어에는 늘 미묘한 위화감이 뒤따랐다. ‘파워’라는 말 때문이다. 일종의 권력을 암시하는 ‘파워’에는 그 자체로 경계심이 들 수밖에 없는데, 거기다 새로운 파워 개념이라고 하니 듣는 이마다 그 힘에 대해 제각각 서로 다른 정의를 내리게 된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창조하는 힘, 표현하는 힘이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세계를 바꾸는 힘이었다.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는 내 상품을 선전해줄 힘이었다. 
인정하기 싫거나 인정할 수 없는 힘과 만날 때 우리는 불편해진다. 파워블로거의 파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블로거란 글과 사진으로 표현하고 창조하는 이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표현하고 창조하는 일의 파워란 결국 그런 것이었나 하는 어색함을 떨쳐내기 어렵다.
이 어색한 느낌은 블로거의 인지도가 올라가면서 주체와 대상 모두에게 일어난다. 주체인 블로거는 방문자나 팔로워가 이만큼 존재한다며 우쭐해지기 쉽다. 그러나 그 우쭐함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는 명료하지 않다. 이 불명확함 탓에, 자신의 우쭐함을 받아줄 거라 여겼던 대상 독자 및 방문객과의 사이에 불편함이 생긴다. 전통적으로 독자와 방문객이 좇는 것은 대부분 내용, 즉 콘텐츠였다. 작가나 예술가 같은 이들은 콘텐츠를 만들고, 소화하고, 여기에 자신의 색깔을 얹어 선보인다. 블로거도 응당 그러하리라 기대했다. 블로거의 태동은 누구나 콘텐츠 생산에 참여할 수 있는 콘텐츠 생산의 민주화로 이해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화가 일어난 구간은 생산보다는 유통이었다. 인터넷이라는 전자 활자로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출판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기에, 누구에게나 공평한 유통의 힘이 주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 힘은 실제 가치를 만들어내는 생산력과는 달랐다. 
돌이켜보면 콘텐츠 자체의 옥석 여부보다는 ‘선행자 이득’이나 더 강력한 유통 채널의 낙점이 중요했다. 파워블로그는 남보다 먼저 블로그를 만들거나, 여하간의 이유로 포털과 검색엔진에 잘 노출된 결과로 생겨난 경우가 많았던 셈이다. 그리고 이는 꽤 공고했다. 유명해진 뒤 그에 합당한 내공, 즉 생산력을 발휘하지 못해 대중의 피로도가 증가하고 급기야 무너지는 반복은 모든 쇼비즈니스의 생리다. 그러나 블로거는 조금 다르다. 블로그라는 새로운 소통 형식을 제안하는 과정에서 그 스스로 확립된 미디어임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마셜 매클루언이 “미디어는 메시지”라 했듯, 사회가 이 새로운 매체에 의존하게 된 현상 자체가 메시지가 된 것이다.
급기야 내용물이 아닌 그릇이 되어버리는 데 만족하고 또 그런 행태에 탐닉하게 된다. 방문자 수와 팔로워 수는 그 지표로 기능했다. 문제는 아직 우리 사회가 매클루언이나 블로거의 감성으로 세상을 수용하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이 매체가 지닌 메시지와 콘텐츠가 아니라 이 새로운 매체의 창궐 자체가 지닌 메시지라는 주장은 수용하기 쉽지 않다. 오히려 사회는 여전히 매체에 중립성을 기대한다. 매체란 거룩한 내용을 성스럽게 담아내는 영매와도 같다는 관념이 머릿속에 박혀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매체의 중립성이라는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를 알면서도 또다시 좇고 있다. 나아가 매체 자체에 의도가 담기는 일을 경계한다. 콘텐츠에 광고가 섞이는 일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콘텐츠의 숨은 의도를 찾아내려 애쓴다. 그러니 블로그를 포함한 소셜 네트워크처럼, 경험이란 이러해야 해, 사회관계란 이러해야 해, 라고 매체 스스로 메시지가 되는 작금의 상황이 아직은 편치 않다.

우리 시대의 R&R, 간섭하고 간섭받기
나는 이 새로운 매체의 메시지에 ‘R&R’이 담겨 있다고 생각해왔다. 여기서 R&R이란 기업의 ‘리스펙트’(Respect)와 ‘레커멘드’(Recommend)라는 소통 행위를 말한다. 리스펙트는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와 다를 수밖에 없는 타인에 대해, 그 역시 나와 이 사회를 위해 무언가를 돌려줄 것이라고 먼저 믿으며 존중하고 경의를 표하는 사회적 약속을 뜻한다. 그렇게 하여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내 부조리를 해소하거나 당면 문제를 해결해 공동체 사회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막연히 믿는 것이다. 그 믿음의 공간이 인터넷이고 웹이고 블로그였다. 
그래서 인터넷의 시민들은 자문한다. 나는 과연 타자가 충분히 경의를 표할 만한 나로서 살고 있는가? 반대로 타자가 응당 받아야 할 경의를 나는 충분히 보이고 있는가? 서로 일종의 사회적 약속을 지키고 있는지를 물으며 자정 노력을 해온 셈이다. 이 리스펙트는 바로 다른 사람과 레커멘드라는 현대적 털고르기를 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인간의 삶이란 쉽지 않다. 대강 먹고 자고 살 수 있어도 어딘지 모르게 가렵다. 오늘 이대로 살아도 좋을지 알 수 없어 누군가가 이 근질근질함을 해소해주기를 바라며 우리는 웹을, 블로그를, 인터넷을 헤맨다. 그렇게 믿을 만한, 인정할 만한 누군가를 만나고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원래 인생의 과정이었다. 이 과정을 네트워크의 속도로 압축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R&R다. 급기야 ‘현대인이라면 이런 것쯤은 마스터해야 해, 도시 남녀라면 이런 걸 사야 해, 열혈 엄마라면 이 정도 학원은 보내야 해, 가족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 용품은 써야 해’라고 믿는다. 그러다가 생리적·생물학적 욕구와는 무관한, 그러나 그 못지 않게 절실한 ‘어떻게 살지’에 대한 가려움의 끝에서 확신의 레커멘드를 날리는 파워블로거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레커멘드를 갈구한다. 마치 원숭이가 배를 채운 뒤 가려운 털북숭이 몸뚱이를 믿을 만한 누군가에게 맡기듯이. 그러나 진심으로 리스펙트하지도 않으면서 레커멘드를 받아들이는 일은 모두에게 위험한 일이다. 최소한의 존중과 경의라는 공감 없이 단지 유명세라는 유통의 힘에 매몰돼, 타인의 선택과 생활에 간섭하고 또 그 간섭을 용인하는 일은 씁쓸하다. 
이는 정부기관의 규제로 될 일이 아니다. 우리 자신과 사회의 성숙에 관한 문제다. 이제 우리는 아무리 예술로 맛을 낸 광고를 접하더라도 그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 우리가 충분히 성숙하다면 리스펙트하지 않은 레커멘드 따위는 잡음으로 그저 흘려버릴 것이며, 무리한 레커멘드를 남발해 리스펙트를 잃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영원히, 리스펙트하고 싶은 누군가를 찾아 그의 인생에 간섭하고 간섭받으며 삶의 레커멘드를 얻고 싶어할 것이다. 그것이 소통의 밸런스였고, 사회를 움직이는 활력이었다. 이 밸런스가 깨졌을 때의 소란을 우리는 요즘 파워블로거 사태로 목격하는 셈이다. 
goodhyun@liv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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