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20일 토요일

고문경찰

이글은 한겨레신문 오피니언 hook에서 퍼왔습니다.

역사가.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베를린자유대학교 한국학과 임시학과장, 보훔대학교 한국학과장 대리, 독일 막스 플랑크역사연구소 초빙교수.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18세기 조선의 문화투쟁>,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 게임>, <한국의 예언문화사>, <대숲에 앉아 천명도를 그리네>, <조선사회사 연구> 등의 저서와 <미시사와 거시사>, <미시사의 즐거움> 등의 번역서 등이 있다. 신문과 잡지에 연재한 글도 적지 않다.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백승종의 역설>, <갓 쓴 양반들의 성담론> 등이 있다.

그리스 사람 제논은 변증법까지 발견한 훌륭한 철학자였지만, 왕의 비위를 잘못 건드렸다가 고문 끝에 죽었다. 고문에는 성역도 없었고, 그 기술은 역사와 더불어 악랄함을 더해갔다. 일제 때 조봉암은 손가락이 부러지는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이런 강단은 너무나도 보기 드문 일이다. 웬만한 사람은 삼대처럼 꺾이기 마련이라, 권력자들은 정적을 고문하고 싶은 유혹에 빠질 때가 많았다. 조선시대 사화와 당쟁 때도 으레 고문이 등장했다.

고문금지가 사상 최초로 명시되기는 1689년 영국의 권리장전에 이르러서였다. 그 뒤 서양 각국은 경쟁적으로 고문을 금지했다. 실효는 별로 없었지만 일반의 인식은 점차 바뀌어 1948년, 유엔은 세계인권선언을 선포함으로써 고문폐지를 인류의 과제로 언명했다. 그래도 고문은 끝나지 않았다.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해 각국의 독재자들은 고문을 무기삼아 영구집권을 노렸다. 인권모범국가로 자처하는 미국조차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포로들에게 갖은 못된 짓을 다했다.

이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쾌거도 있다. 최근 프랑크푸르트 법원은 독일정부에게 한 아동유괴범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2003년 독일경찰은 은행가의 아이를 유괴한 이 범인이 체포되자 고문을 가하겠다고 겁을 주었다. 선의의 위법행위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판사들은 “이 경우는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는 경찰의 변명을 일축했다. 인간존엄의 원칙을 존중하는 판사들이 건재하고, 그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시민이 많은 독일이 부럽다.

근본적인 입장에서 보면 조봉암이 퍽 옳았다.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일을 없애고, 또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중략)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서 다 같이 평화롭게, 행복”하게 살자고 그는 주장했다. 이런 요구를 했다고 이승만은 권력의 셰퍼드 고문경찰을 앞세워 그를 형장으로 내몰았다. 크레인 위의 김진숙은 또 어쩔 것인가. 자본의 고문은 아직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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