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29일 월요일

수비크에서 영도까지, 한진은 하나다? [2011.08.29 제875호]


이글은 한겨레21에서 퍼왔습니다.
[기획1] 필리핀 수비크에서 보고 들은 한진중공업 노동자, 철거민의 고통… “한국의 발전은 노동자 탄압한 성과냐”고 동행한 네팔·베트남 친구들이 묻다

» 필리핀 한진중공업 수비크조선소의 노동조건을 고발하는 자리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고와 저임금에 시달리는 이들의 이야기는 그칠 줄 몰랐다. 문아영 제공
지난 4월부터 필리핀 마닐라에 머물고 있다. 유엔평화대학교 평화교육대학원 과정의 한 학기가 이곳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2차 희망버스가 부산을 향할 즈음 함께 공부하는 다국적 친구들에게 수비크 방문을 제안했고, 지난 7월16일 새벽 5시 마닐라의 카티푸난 거리에서 필리핀의 주요 대중교통 수단인 지프니(2차 세계대전 뒤 남은 미군용 지프를 개조한 형태의 승합차) 한 대를 타고 수비크를 향해 출발했다. 베트남·네팔·타이·일본·동티모르·미국·필리핀 등 유엔평화대학교 석사과정 재학생 10명이 모인 것이다.
임금 떼이고 벌금 매기고
필리핀 민주청소년단체에 속한 두 사람이 여정에 동행했다. 2009년부터 수비크조선소 노동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필리핀 사회단체 ‘마카바얀’의 총무인 프레시 다국과 한진 쪽에서는 인정받지 못한 비인가 노조지만 필리핀 고용노동부에는 협상 대상자로 인정받은 수비크 한진조선소 노동자협회의 총무 조이 곤잘레스도 합류했다. 승객들이 서로 마주 볼 수밖에 없는 지프니의 특성 덕분에 여정 내내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프레시는 한진 사태와 관련된 한국 언론의 보도에 불만을 토로했다. 나아가 자본과 권력이 결합된 이슈에 대한 대다수 언론의 소극적인 보도 태도를 비판하며 이것은 비단 한국 언론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다. 필리핀의 주요 언론 보도 어디에서도 한진 수비크조선소의 노동권 문제에 대한 기사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프레시는 문화방송의 의 현지 취재를 안내했던 사람이다. 한진의 정리해고 사태와 관련한 의 인터뷰에 한국의 박성미 감독과 함께 필리핀 쪽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던 그녀는 이 취재 내용을 희석시켰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며 유감을 표했다. 수비크조선소 노동자의 고충과 강제 이주당한 주민들 부분은 거의 보도되지 않았고, 한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만이 중점 보도됐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수비크에 도착했다. 조이는 우리를 수비크만의 한 지점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해안과 산자락이 어우러진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물길을 헤치며 그물을 걷는 조그만 고깃배 옆에서 작살을 든 청년들이 고기를 잡고 있었고, 아이들은 다이빙을 하며 여유 있게 그 주변을 헤엄쳐 다녔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크기의 가솔린 탱크선이 정박해 있는 저 너머에 한진 수비크조선소가 보였다. 바다를 둘러싼 사람들의 다양한 삶과 그 삶을 둘러싼 사회가 이 한 장면에 녹아 있었다. 미군기지를 거쳐 이제는 외국 기업의 근거지가 된 수비크 바다와 삶의 터전은 여러 세대를 거친 강제 퇴거의 현장이기도 했다. 거대 외국 기업의 하청으로 얻은 일자리에는 고된 노동과 생소한 군사문화, 그리고 억울함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사전에 한진 수비크조선소 쪽에 인터뷰 요청 공문을 보냈으나 바쁜 일정 관계로 인터뷰에 응할 수 없다는 담당자의 응답이 돌아왔다. 우리는 노동자와 현지 주민들의 인터뷰만 진행했다. 먼저 노동자들로부터 전해들은 수비크조선소의 노동계약 시스템은 이러했다(한진으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 없었으므로 노동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전해들은 바를 그대로 옮긴다). 노동자들은 한진과 고용계약을 맺고 직업훈련 과정을 밟게 된다. 훈련이 끝나는 시점에서 대부분의 노동자는 또 다른 계약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받는데, 그 계약서에는 한진의 직접 고용 여부와 계약 기간이 명시돼 있다. 노동자를 모으면서는 직업훈련이 ‘무료’라고 홍보했음에도 훈련과정 이후 서명해야 하는 계약서에는 매 15일마다 노동자의 급여에서 3%가 차감돼, 한 달에 6%의 임금이 훈련비 명목으로 저당 잡힌다고 적혀 있다. 노동자들은 5년의 계약 기간을 다 채운 경우 이 금액에 해당하는 약 15만페소를 돌려받게 되지만,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거나 해고당하는 경우에는 15만페소 중 저당 잡힌 급여를 제외한 나머지 차액을 빚으로 떠안게 된다.
한 40대 노동자는 한진과 직접 고용 관계로 5년의 계약 기간 중 4년6개월의 업무 기간을 채웠지만, 계약 만료를 6개월 남겨둔 시점에서 하부 용역업체와의 계약을 강요하는 사 쪽에 반대하다 해고됐다. 따라서 그의 급여에서 다달이 차감됐던 15만페소에 달하는 금액은 계약 불이행 명목으로 영영 받을 수 없게 돼버렸다. 오히려 채우지 못한 6개월치에 해당하는 나머지 금액인 약 1만5천페소를 벌금 명목으로 납부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많은 해고 노동자가 이런 상황에 직면해 있다. 

» 한진중공업 수비크조선소 건설로 강제 이주당한 주민들이 사는 마을의 소년. 이들은 이주당한 곳에서 다시 내쫓길 위기에 놓였다. 문아영 제공
강제 이주당한 곳에서도 떠나라
우리는 수비크조선소에서 10km쯤 떨어진 카왁 마을로 이동했다. 부족한 세간살이가 쉬이 들여다보이는 원두막 같은 집들이 해변 수풀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이 마을은, 2007년 한진 수비크조선소 건설로 강제 이주당한 주민들이 재정착한 곳이다. 당시 이주 대상에 포함됐던 400여 가구 중 보상에 동의한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이주했지만, 철거 당일까지 반대한 주민들은 무장군인들에 의해 마을 밖으로 쫓겨났다. 그들은 수비크조선소의 확장에 따라 두 차례 더 이동한 끝에 이 마을에 정착했다. 주민들은 공포의 기억을 증명하려는 듯 당시의 사진들을 가져와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가장 먼저 보상에 동의한 주민들은 대부분 당시 마을에 정착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보상금을 받아 마을을 떠나는 것도 그들에게는 괜찮은 거래였을 것이라고 주민들은 입을 모았다. 상당수 주민들은 정당한 보상금을 받아내려는 긴 싸움에 지쳐 하나둘 마을을 떠났다. 마을 주민들이 수비크만 관리 당국에 요구하는 보상금은 30만페소로 한국 돈으로 약 760만원에 해당한다. 그러나 관리 당국이 주민들에게 제시하는 보상금은 1만~2만1천페소(약 25만~53만원)에 불과하다.
현재 마을에는 보상에 합의하지 않은 121가구의 주민들이 모여 함께 살고 있다. 남은 주민들은 대부분 강제 이주 전에 살던 마을에서 30년 넘게 어업이나 농업에 종사했다. 그런데 이곳에 정착한 지 3년이 안 된 이들에게 한 달 안에 다른 곳으로 이주하라는 통보가 다시 내려졌다. 이 땅이 본래 한 리조트의 사유지라는 것이다. 애초에 이 재정착촌을 제공한 것은 수비크만 관리 당국이었다. 정부가 이곳이 사유지임을 숨겼다는 사실, 그리고 언제 어떻게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한 채 또다시 쫓겨나야만 하는 현실에 주민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아이들이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없어 마을 한구석에 학년마다 한 학급씩 있는 초등학교를 세웠다. 한 주민은 자신도 예전에는 아이들을 충분히 교육하고도 남을 만큼의 수입을 벌어들이는 성공한 어부였지만, 강제이주 뒤에는 하루에 한 푼도 벌기 힘들다고 한탄했다. 현재 수비크조선소가 위치한 지점, 즉 주민들이 본래 거주했던 마을의 앞바다는 수심이 깊고 조류가 교차하는 까닭에 어종이 다양하고 개체 수도 풍부했지만, 조선소 건설 이후 보안요원들이 접근을 제한한다고 한다. 이제는 마을 앞 얕은 수심의 연안에서 조업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조업량은 생계 유지에 역부족이었고, 숯을 만들어 팔기 시작한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한 칸의 나무집과 불에 그을리고 있는 커다란 나무토막이 전부였다.
말을 아끼는 수비크조선소 노동자들
이날 저녁 6시께 우리는 시내로 돌아와 수비크조선소의 통근버스가 도착하는 버스터미널 근처 시장으로 갔다.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시장은 포장마차 상인과 교복을 입은 학생, 한진에 자재를 납품하는 업자, 버스 운전기사, 그리고 한진에서 돌아오는 통근버스에서 내리는 노동자 등 다양한 사람들로 붐볐다. 먼저 포장마차 상인들은 한진 조선소 덕분에 보장되는 수입이 적지 않다고 했다. 몇몇 포장마차에는 한진을 지지하는 메시지가 붙어 있었다. 한편 한진 수비크조선소 사무직 노동자들은 현재 일어나는 생산직 노동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입을 닫았다. 대부분의 생산직 노동자도 한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다가가 인터뷰를 요청하면 많은 노동자가 반응하지 않은 채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거나 아예 모른다고 대답했다. “나는 중립이고 싶다”고 말하는 노동자도 있었다. 인터뷰에 응한 노동자 중 한 사람은 혹시 한진과 문제가 생기더라도 노동자 단체를 통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 방안을 찾을 것이며, 노동 단체가 문제를 크게 만드는 것이 오히려 불편하다고 했다. 어떤 노동자는 자신은 노동조합에 동참할 의사가 없으나, 한진이 노동자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했다. 버스가 한 대 두 대 터미널로 들어서고, 노동자들이 앞다퉈 포장마차에서 급한 허기를 채운 뒤 집으로 향해 가는 일상적인 풍경 너머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마닐라로 돌아온 지 며칠 지나지 않은 7월19일, 한 수비크조선소 노동자가 야간 작업 중 추락해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2007년 수비크조선소가 문을 연 이래 한진노동자협회에 보고된 사망사고만 40건이 넘었다. 한진조선소는 이제 조선소가 아니라 무덤이라고 노동자들은 말한다.
네팔에서 온 친구는 노동권에 대한 기본적 지식조차 없는 기업이 어떻게 대기업이 될 수 있었는지 의아해하며 한국의 노동환경이 아직도 이런 지경인지, 한국의 발전이라는 것이 결국 노동자를 탄압해 얻어낸 성과인지를 물어왔다. 아시아의 경제발전 모델이라는 한국의 위상이 위선에 불과한 것인가 물어오는 그녀에게, 선뜻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들려줄 수 없었다.
얼마 전 마카바얀 총무인 프레시는 8월4일에 예정돼 있던 2차 필리핀 노·사·정 간담회가 한진 쪽의 참석 거부로 취소됐다는 전자우편을 보내왔다. 직접 고용의 책임을 회피하며 수비크조선소 내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는 한진중공업의 태도를 다시 보여주는 일이었다. 외부의 비판적 목소리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한진의 태도는 더욱 비판받아 마땅하다. 한진중공업이 말하는 것처럼 문제가 없다면 어째서 대화에 응하지 않는가.
한국에서 만난 수비크조선소
지난 8월5일, 방학을 맞아 잠시 한국에 돌아와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앞을 찾았다. 한진중공업 건물 맞은편에는 웅장한 수비크조선소의 위용을 자랑하는 거대한 홍보 간판이 걸려 있었다. 파란 수비크만의 물결과 더불어 근사한 조선소의 사진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애써 포장하려는 듯 보였다. 무겁게 영글어가는 소금꽃나무를 짊어진 영도와 수비크의 노동자들, 그리고 ‘노동자’라 불리는 모든 이를 위해 김진숙은 푸른 크레인 위에서 7개월이 넘는 시간을 살아왔다. 기업의 생리가 이윤 추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사회적 책임을 부정하는 기업의 윤리는 부정(不正)하다. 노동자는 대체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마침내 ‘한진중공업’의 이름을 달고 바다로 나갈 배를 만들어내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땀, 그들의 존엄성과 삶을 영위하게 하는 그 고귀한 노동을 인정하라.
문아영 유엔평화대학교 평화교육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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