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30일 토요일

동아방송의 ‘자유언론실행총회’


이글은 프레스바이플 2012-06-30일자 기사 '동아방송의 ‘자유언론실행총회’'를 퍼왔습니다'
언론과 권력 (39)

 ▲ "우리는 탄압 받고 있는 동아일보사에 뜨거운 성원을 보내고 있는 국내외 민주국민의 열의에 보답하기 위해 자유언론 실천에 더 한층 분투 노력한다"

1975년 1월 10일, 동아일보사 기자들은 홍수처럼 밀려드는 격려광고에 보답한다는 뜻으로 편집국에서 총회를 열고 ‘자유언론실천강령’을 채택했다.
“1.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 등 모든 영역에서 반민족적, 반민주적, 반문화적 잘못을 색출, 이를 고발, 보도한다. 1.우리는 자유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싸우다가 고난을 겪고 있는 모든 민주인사와 그 가족들의 안위를 성실하게 보도한다.1.우리는 이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불의와 부정부패를 과감히 파헤쳐 그 실상을 보도한다.1.우리는 관 일변도의 기사보다는 정부의 경제·사회 정책에서 소외당하고 있는 많은 불우한 국민의 편에 서서 그 고통을 함께 나누는 자세로 충실하게 취재, 보도한다. 1.우리는 광고 탄압으로 빚어진 난국을 다 같이 힘을 모아 이겨내고 자유언론을 굳게 지키며 그것을 성공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특히 불순한 책동과 패배적인 타협을 경계하면서 거사적인 단결을 공고히 한다. 1.우리는 탄압 받고 있는 동아일보사에 뜨거운 성원을 보내고 있는 국내외 민주국민의 열의에 보답하기 위해 자유언론 실천에 더 한층 분투 노력한다.”((자유언론), 170~171쪽)
1975년 1월 7일 동아방송에 대한 광고 탄압이 시작되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엔지니어, 업무사원 등 115 명은 이튿날 모임을 열고 ‘동아방송자유언론실행총회’를 결성했다. 실행총회는 위원장으로 프로듀서 이규만을 선출한 뒤 SB(스테이션 브레이크)에 이런 내용을 넣기로 했다.
“동아방송의 광고주들이 오늘 무더기 해약을 통고해 왔습니다. 이와 같은 사태에도 불구하고 동아방송은 자유와 정의의 편에서 계속 방송할 것을 청취자 여러분께 굳게 다짐합니다. 청취자 여러분의 애청을 계속 바랍니다.”
동아일보사의 편집국에서 요직에 있던 간부들이 그랬듯이 동아방송의 편성·제작 간부들도 위와 같은 ‘알림 광고’를 보류하자고 실행총회 구성원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실행총회는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된다는 결의에 따라 1월 8일 정오부터 위의 문안을 방송했다.
실행총회가 창립 모임에서 채택한 ‘결의문’은 아래와 같다.
“동아방송자유언론실행총회는 동아방송의 광고 무더기 해약 사태에 즈음해서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첫째, 우리는 지금까지 지켜온 동아방송의 주지를 다시 한 번 다짐한다. 동아방송은 언론의 자유와 편성의 자주성을 견지하고 방송의 권위와 공신력을 높이며 문화 발전과 경제 번영, 사회 순화에 이바지하기 위해서 방송의 품격을 높인다. 그리고 자유와 정의 편에 서서 어떠한 독재에도 반대한다. 앞으로도 계속 이와 같은 동아방송의 주지에 따라서 프로그램을 제작, 방송한다.
둘째, 우리는 앞으로 동아방송과 동아일보에 대한 외부 세력의 어떠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이 사실을 국민에게 알린다.
셋째, 우리는 언론의 자유가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투쟁할 것을 다짐한다.”(박지동, ‘1970년대 유신독재와 민주언론의 말살’, (한국언론 바로보기 100년), 409~410쪽)
동아방송 사원들이 실행총회를 결성한 지 20여 일 만인 1월 29일 중대한 사태가 벌어졌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인 (정계야화) 재방송을 폐지하기로 간부회의가 결정한 것이다. 그 프로는 일요일 밤 9시에 본방송이 나가고 다음 주 월요일 아침 8시 30분에 재방송되고 있었다. 간부회의는 청취율이 훨씬 더 높은 재방송을 폐지하고 본방송만 존속시키겠다고 사원들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정계야화)는 4월 혁명 전후 정치권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일화를 드라마 형식으로 구성한 프로그램으로서 박정희 정권의 독재와 인권 유린을 연상시키는 내용을 많이 담고 있었다. 실행총회는 방송국 간부들이 외부의 압력을 받고 재방송을 없애기로 결정했다면 편성의 자주성을 포기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당시 인기 절정에 있던 프로그램을 스스로 폐지할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다.

▲ <정계야화>는 4월 혁명 전후 정치권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일화를 드라마 형식으로 구성한 프로그램으로서 박정희 정권의 독재와 인권 유린을 연상시키는 내용을 많이 담고 있었다.

실행총회 집행부는 (정계야화) 재방송 폐지가 시사성이 짙은 다른 프로그램들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간부회의 결정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실행총회가 최종시한으로 통보한 2월 1일 오후 4시가 지나도 간부들은 응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실행총회 회원들은 (정계야화) 재방송을 요구하면서 밤샘 농성에 들어갔다.
그 무렵 동아일보사에서는 전문 분야가 서로 다른 기자들과 방송국 사원들이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이래 일체감을 가지고 협력하고 있었다. 편집국과 방송뉴스부의 기자들은 동아일보사 건물 4층의 방송국으로 올라가서 농성에 합류했다. 농성장에는 방송 편성의 자주권을 지키겠다는 결의가 넘쳤다.
결국 2월 2일 아침 8시 30분에 방송국 사원들과 편집국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재방송이 나가기 시작했다. 동아일보사 경영진과 방송국 간부들이 실행총회의 투쟁에 굴복한 것이었다. 방송국의 일부 간부들은 “실행총회가 강압적, 폭력적인 방법으로 재방송을 강요했다”고 주장했다. 농성하던 사원들은 재개된 재방송을 들으면서 한국 방송의 역사에서 볼 수 없었던 편성권 독립 투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는 자부심을 느꼈을 것이다.

김종철 (언론인)  |  cckim999@naver.com

"김훈 중위는 자살" 미 검시관은 왜 해고됐나


이글은 오마이뉴스 2012-06-30일자 기사 '"김훈 중위는 자살" 미 검시관은 왜 해고됐나'를 퍼왔습니다.
[取중眞담] 비윤리적 부검 등으로 해고... 근거 없는 소견서에 기댄 국방부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 미군 수사관이 현장에서 촬영한 고 김훈 중위의 시신 미군 수사관이 현장에서 촬영한 고 김훈 중위의 시신. 좌측 상단 청바지 차림의 미군 수사관 다리가 보이고 김 중위의 양손에는 화약 잔재를 채취하기 위해 봉투가 끼워져 있다. (유족의 양해를 얻어 김 중위의 사진을 공개합니다) ⓒ 김척

얼마 전 독자 한 분이 쪽지를 보냈습니다. 왜 김훈 중위 사건에 그렇게 집착을 하느냐는 내용이었습니다. 국방부에서 김훈 중위가 자살했다는 결론을 고수하는 데는 다 그만한 근거가 있는 것 아니냐고 했습니다. 오늘은 제가 14년 전 일어났던 이 사건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는 이유에 대해 말씀 드려볼까 합니다.

잘 아시는 대로 김훈 중위의 아버지 김척씨는 육군 중장으로 군문을 떠난 예비역 장성입니다. 그는 아들이 숨지기 불과 석 달 전까지 군에 몸을 담고 있었습니다. 김척씨는 저와 한 인터뷰에서 "우리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식을 군에 보냈다가 가슴에 묻을 수밖에 없었던 이 땅의 수많은 군의문사 가족들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3성 장군의 아들이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다른 가족들이야 오죽하겠는가. 반드시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훈이 죽음의 진상을 밝혀내겠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대부분의 건강한 청년들이 군복을 입어야 하는 이 땅에서는 아직도 한해 100명이 훨씬 넘는 군인들이 병영에서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사고나 자살로 인한 사망자도 포함되어 있지만 유족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군 당국의 수사결과를 믿지 못하겠다며 의문사로 규정한 사건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죠. 이런 의미에서 김훈 중위 사망 사건은 우리 군의 인권 수준을 나타내주는 중요한 척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런데, 국회와 대법원, 군 의문사위원회가 김훈 중위의 사인에 대해 "적어도 자살은 아니다"란 결론을 내렸음에도 국방부는 줄기차게 자살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과학 근거도 이들 앞에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밝혀진 사실은 이런 국방부의 당당함이 오만과 독선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군 또한 사인을 규명하는 데 결정적인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점에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김 중위 사인 오리무중, 한국군과 미군 공동 책임

▲ 고 김훈 중위 ⓒ 김척
잠시 시간을 14년 전으로 돌려보겠습니다.

1998년 2월 24일 정오 무렵 김훈 중위는 판문점 인근 비무장지대 241GP(관측소)의 한 벙커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당일 오후 3시 30분에 미군 CID(범죄수사대) 소속 수사관 4명은 현장 감식을 실시하고 현장에서 발견된 M9 베레타 권총과 탄피, 전투모, 사망한 김 중위의 손을 면봉으로 닦아낸 시료 등 유류품들을 수거하죠. 이렇게 채취된 시료는 김 중위가 사망 당시 입고 있던 야전상의와 함께 미 육군 범죄수사연구소로 보내집니다.

이후 미군 군의관은 김훈 중위의 시신을 캠프 보니파스 내의 대대 의무실로 후송합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발생하죠. 미군 군의관이 김훈 중위의 시신에서 총알이 들어간 오른쪽 관자놀이 부위를 깨끗이 닦아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총기 사망사건의 경우 총알이 들어간 사입구 주변의 매연(화약으로 인한) 여부와 크기는 총이 어느 정도 거리에서 발사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지표가 됩니다. 즉 총구를 피부에 꽉 밀착해서 쏘는 밀착접사의 경우 화약흔은 피부 표면에 남지 않고 모두 총알이 지나간 인체 조직 내부에서 시꺼멓게 나타나게 됩니다. 반대로 총구와 피부가 어느 정도 떨어진 상태에서 발사된 근접사의 경우는 사입구 주변으로 시꺼먼 매연이 흡착되고 총알이 지나간 인체 조직 내부는 깨끗한 상태를 유지합니다.

밀착접사냐 근접사냐가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가릴 수 있는 중요한 판단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현장에서 수거된 M9 베레타 권총은 무게가 1.145kg에 길이는 21.7cm인 비교적 큰 권총입니다. 이 큰 권총을 이용하여 자살을 하려면 오른쪽 관자놀이에 총구를 꼭 붙이고 방아쇠를 당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자살자의 심리를 보여주는 것으로 자살하려는 사람이라면 끔찍한 고통을 두 번 겪고 싶지 않기에 확실하게 단 한 발로 목숨을 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대형 권총인 M9베레타를 이용해 자살을 하려면 총구를 관자놀이에 꽉 붙이고 쏠 수 밖에 없고, 그것은 밀착접사의 특징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김 중위의 오른쪽 관자놀이를 찍은 사진에는 총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발사되었음을 의미하는 매연이 사입구를 중심으로 둥글게 부착되어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찍혀있었죠. 이 흔적을 미군 군의관이 깨끗이 닦아버린 것입니다. 총기 사고가 한국보다 월등히 많은 미국인 만큼  미 군의관이 사인규명에 큰 영향을 미칠 총상부위의 상태를 왜 변형했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입니다.

또 이렇게 '변형된' 시신을 국군 수도통합병원으로 이송해 한국군 부검 군의관이 부검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죠. 김 중위의 시신을 부검한 한국군 군의관은 시신 상태가 변형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성급하게 자살이라는 결론을 내려 버린 겁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CID 수사

 ▲ 김훈 중위 가족의 일상 행복했던 김훈 중위 가족. 1998년 2월 24일, 그날 이후 이 가정의 행복한 일상은 사라졌다. ⓒ 고상만

1998년 4월 29일, 주한미군 범죄수사대장 워잭 중령은 "한국군 부검 군의관이 자살소견을 보내와 이를 참고해 수사 결론을 내렸다"고 발표합니다. 워잭 중령은 이런 결론을 내린 근거로 현장에서 발견된 권총이 김훈 중위에게 지급된 개인 화기였고, 김 중위 시신에서 권총 자살자의 전형적인 특징인 밀착접사의 흔적인 총구 누름자국이 나타났으며, 머리에 바짝 대고 쏘았기 때문에 두개강이 소음기 역할을 해 총성이 나지 않았다는 점 등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한국군 주도로 진행된 2차 수사 결과 워잭 중령의 발표 내용이 대부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죠. 즉, 현장에서 발견된 권총은 김훈 중위의 것이 아니었으며, 밀착접사의 증거라던 총구 누름자국이 김 중위의 시신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또 인근 GP 근무자들이 김 중위 사망 추정 시간에 총성을 들었다는 사실도 확인됐습니다. 2차 조사를 담당했던 육군 고등검찰부가 내린 결론은 '김훈 중위 시신에 남겨진 흔적은 (권총자살의 유력한 증거인) 밀착접사가 아니고 근접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결론은 이후 국방부 특별 합동조사단(아래 특조단)의 3차 조사에서 다시 뒤집힙니다. 1999년 1월 15일 국방부 특조단은 자신들이 주최한 법의학토론회에서 미 국방부 사체감식관 제리 더글러스 스펜서 박사가 작성한 소견서를 자살의 또 다른 증거로 제시했습니다. 이 소견서를 요약하면 "김 중위 시신의 사입구에 총구 누름자국이 있는 것은 밀착접사로 그가 자살했음을 입증한다. (중략) M9 베레타 같은 반자동 권총은 일반적으로 발사자의 손에 뇌관화약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김 중위 오른손에서도 화약흔이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입니다.

미국 수사기관 자료와는 전혀 다른 스펜서의 자살 소견

그런데 스펜서 박사의 이런 소견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2차 조사를 담당한 육군 고등검찰부가 이미 김훈 중위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총구 누름자국이 없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스펜서 박사에게 김훈 중위 사체와 관련된 정보를 전달한 것이 초동수사 결과를 발표했던 미군 CID라는 것을 감안하면 스펜서 박사가 잘못된 정보에 근거해서 자살이라는 결론을 내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스펜서 박사의 소견서를 꼼꼼히 살펴보면 의문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반자동 권총은 발사자 손에 뇌관화약 성분이 남지 않는다"는 견해를 밝혔지만, 이는 미국의 여러 수사기관에서 시험한 결과와는 전혀 다릅니다. 총기 소지가 자유로워서 총기 관련 사망 사건이 많은 미국의 특성상 총기발사자의 손에서 발견되는 뇌관화약 성분에 대한 자료는 풍부하게 축적되어 있습니다.

콜로라도주 덴버 경찰청 홈페이지를 한 번 볼까요. 이곳에는 김훈 중위 사망 사건에 사용된 M9 베레타 같은 반자동 권총을 발사한 경우에는 방아쇠를 당긴 손 바륨과 안티몬, 납 등 뇌관화약 성분이 다량 부착된다고 나와 있습니다. 덴버 경찰청뿐만 아니라 제가 입수한 미국 범죄수사학 교과서(Advanced Forensic Criminal Defense Investigations)에도 "반자동 권총은 발사시에 손에 뇌관화약 잔재물이 부착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스펜서 박사의 견해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무엇보다 스펜서 박사는 자신이 내린 이런 결론에 대해 그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견서에 그저 "경험칙상"이라는 애매한 단어를 쓰고 있을 뿐이죠. 그가 왜 명백한 자료를 부정하면서 일반적으로 반자동 권총에서는 뇌관화약 성분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소견서를 보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김훈 중위 유족은 스펜서 박사가 왜 이런 소견을 냈는지 알기 위해 몇 년 동안 그의 행방을 백방으로 수소문했습니다. 얼마 전 유족은 스펜서 박사와 관련한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바로 스펜서 박사의 도덕성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이었죠.

자살 소견 보낸 미국 법의학자는 비윤리적 행위로 파면

▲ 스펜서 박사의 해고 사실을 보도한 2003년 10월 7일자 <러벅 온라인> ⓒ 오마이뉴스

1999년 국방부 특조단에 김훈 중위가 자살했다는 소견서를 보낸 스펜서 박사는 그해 미 국방부를 떠나 텍사스 공과대학 병리학 교수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는 같은 기간 텍사스주 러벅 카운티의 법의학 검시관으로도 활동했는데, 지난 2003년 10월 검시관 직에서 해임당하고 맙니다. 동시에 텍사스 공대에서도 쫓겨났는데요, 그 이유는 현지 신문 보도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2003년 10월 7일자 텍사스주 (러벅 온라인)과 (아마릴로 뉴스)는 스펜서 박사의 비윤리적 부검 행위와 이로 인한 해고를 주요 뉴스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 기사를 요약하면 스펜서 박사는 여성 사체를 부검하면서 유방확대 수술에 사용된 가슴성형 보조물과 질 내 피임기구를 무단으로 척출·제거함으로써 사인 규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비윤리적 행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왜 이런 행위를 했는지는 기사에 나와 있지 않지만 해고 사유가 될 정도의 무거운 불법 행위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 스펜서 박사는 1999년 12월 1일 <아마릴로 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과거 자신이 사인을 잘못 판정한 사실을 고백했다. ⓒ 오마이뉴스

스펜서 박사는 또 1999년 12월 1일 (아마릴로 뉴스)와 한 또 다른 인터뷰에서 과거 자신이 자살이었다는 소견을 낸 여성이 사실은 타살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부검 당시 타살로 확실시되는 상처가 있었지만 사건의 스토리 흐름에 부합하지 않는 것 같아 검찰 신문 과정에서 검찰 측 반대신문에 나가 자살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그 사실을 후회한다. 나에게 다시 그 사건을 판정하라고 한다면 타살이라고 하겠다"는 것이 당시 그의 고백이었습니다.

국방부가 자살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세우고 있는 몇 안 되는 증거가 이런 사람이 작성한 것이라면 과연 거기에 수긍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자살과 배치되는 수많은 과학 증거들에는 애써 눈을 감는 국방부에 차라리 연민이 느껴지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김도균 (capa1954)

"힘얻는 창조론, 내가 카이스트에 있었다면..."


이글은 오마이뉴스 2012-06-30일ㄹ자 기사 '"힘얻는 창조론, 내가 카이스트에 있었다면..."'을 퍼왔습니다.
[인터뷰]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창조론은 이론 아냐"

지난해 12월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회(교진추)가 "현행 교과서에서 시조새 등 진화론 관련 일부 내용을 삭제하라"고 교육과학기술부에 청원한 뒤 창조과학계와 진화론학계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창조과학회 교과서위원회와 한국진화론실상연구회를 통합해 2009년 출범한 교진추는 "진화론은 과학이 아닌 하나의 가설"이라고 주장하며 교과서의 진화론을 공격하고 있다.

지난 20일, 진화론 학자들의 모임인 '다윈 포럼'의 회장을 맡고 있는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가 서울 삼성동 코엑스 서울국제도서전 인문학 아카데미에서 '다윈과 진화론'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최 교수는 최근 150여 년간 진화이론이 발전해 온 과정과 현대 진화이론의 핵심을 담은 책 을 펴냈다. 강연이 끝나고 최 교수를 만나봤다.

"진화론은 과학이론, 창조론의 설화"

▲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 박경현
"과학에서 '이론'이라는 건 검증 가능한 것을 말해요. 실험을 하고 검증을 해야 비로소 하나의 이론이 되는 거죠. 창조설은 믿어야 할 성격의 것이지 과학의 영역에 가져다 댈 게 아니에요.

하느님을 대상으로 창조를 했는지 안 했는지, 어떻게 실험할 수 있겠습니까? '이론'이라는 단어가 원래 정의보다 폭넓게 쓰이는 경향이 있지만, 창조론은 이론이라기보다 창조 '설화'라는 이름이 적당한 게 아닌가 싶어요."

최 교수는 창조론이 과학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며 1982년 미국 아칸소 주에서 있었던 법정 논쟁을 소개했다.

당시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진화론을 학교에서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재판을 맡은 윌리엄 오버턴 판사는 각계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자연과학의 본질에 대해 방대한 연구를 했고, 판결문에서 자연과학의 특성을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인간이나 종교가 만들어낸 법칙이 아니라 자연에 존재하는 원리를 따라야 한다. 둘째, 모든 것을 자연 법칙에 따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실제 세계에서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 자연과학의 연구 결과는 언제나 잠정적이며,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다섯째, 반박할 수 있어야 한다.

최 교수는 "오버턴 판사가 정리한 대로 자연과학은 검증하고 반박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창조론자들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으며 오로지 창조의 근거만을 찾아낼 뿐, 창조론에 어떠한 회의도 가지려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과학이라면 새로운 증거를 찾아 이를 바탕으로 기존의 질서에 도전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창조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로 간주된다. 최 교수는 "창조론은 과학 이론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명박 정권에서 목소리 커진 창조론자들

 ▲ 최재천 교수가 서울국제도서전 인문학 아카데미에서 '다윈과 진화론'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 박경현

최 교수는 지난 2006년 서울대를 떠나 이화여대로 옮기면서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융합해 새로운 지식을 만들자는 취지로 '통섭원'을 만들었다. 최 교수는 주변에서 통섭원의 심포지엄 주제로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을 다뤄보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반대했다고 밝혔다.

"현대 진화론의 두 거장, 리처드 도킨스와 스티븐 제이 굴드는 학문적으로 앙숙이었지만 딱 한 가지 합의에 도달한 게 있었어요. 바로 창조론을 배경으로 하는 지적 설계론자들의 주장에 반응하거나 행동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지적 설계론자들이 아무리 논의의 판을 키우고 싶어도 진화론자들이 아예 상대를 해주지 않으니 이슈가 안 될 수밖에요."

논쟁이 계속되면 사람들이 진화론을 '검증된 과학적 사실'이 아닌, 창조론과 동일 선상에 놓고 다뤄져야 할 이론으로 생각하기 쉽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최 교수는 "과학자들이 이번 논쟁에 대응을 안 할 수는 없겠지만, 특히 이번 정권에서는 더 이상 논의를 키우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과서에서 진화론을 삭제하려는 창조론자들의 노력은 1981년 한국 창조과학회 설립 후 30여 년간 계속됐지만 번번이 좌절됐다. 그런데 이번 정권에서 일부나마 이들의 주장이 관철되고 있는 것은 '소망교회 장로'인 이명박 대통령의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시각이 있다.

창조과학회는 소망교회 등 대형교회들 외에도 카이스트를 비롯한 개신교 영향권의 대학으로부터 후원을 받았다. 카이스트는 2002년부터 2010년까지 창조과학회의 창조과학전시회를 위한 공간을 제공했다. 지난해 카이스트는 창조과학회를 창립한 김영길 한동대 총장에게 '과학기술 교육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며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도 했다. 김 총장은 대학교육 정책에 입김이 센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회장이기도 하다. 카이스트의 주대준 부총장은 청와대 경호처장 재직 시절 "모든 정부부처의 복음화가 나의 꿈"이라고 발언한 바 있다.

"국내 과학 연구와 교육을 대표한다는 카이스트 안에서 창조론이 줄기차게 힘을 얻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저처럼 진화론을 연구하는 사람이 카이스트 안에 있었다면 이런 일을 두고 보지는 않았을 겁니다. 카이스트 내부의 구성도 좀 더 다양화할 필요가 있어요."

"공생하는 개체가 살아남는 게 진화론의 교훈"

▲ 서울국제도서전 강연 후 <다윈 지능>을 출판한 민음사 부스를 찾은 최재천 교수. ⓒ 박경현
미국의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지난 천 년간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 1000명 중에 다윈이 7위에 올랐다. 이처럼 다윈의 진화론은 생물학 분야를 넘어 인류 문명의 방향을 바꾼 위대한 발견으로 평가되고 있다. 문학·예술·철학 등 현대의 학문과 예술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현대인의 의식 구조와 삶까지도 바꿨다는 것이 최 교수의 주장이다.

"우리나라에서 설문조사를 했다면 다윈은 몇 등이나 했을까요? 갈수록 많은 학문 영역에서 다윈과 진화론의 의미가 커지고 있지만, 국내에는 다윈에 대해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아요. 그리고, 진화론의 중요성도 제대로 인식되지 않고 있고요.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다윈 후진국'이라고 할 수 있죠."

'가장 강한 종자가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 개념은 영국의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의 최적자 생존(survival of the fittest) 개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이 개념이 다윈의 것으로 잘못 쓰이고 있다. 다윈은 가장 강한 개체만 살아남는다고 말한 일이 없고, '더 적합한 개체가 살아남는다(survival of the fitter)'고 주장했다고 한다. 최 교수는 "최고가 돼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수준의 적응력만 가지면 모두 공존하고 배려하며 살 수 있다는 게 진화론에 담긴 교훈"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다윈의 이론은 남을 이해하고 손을 잡은 개체들이 경쟁에서 이겼다는 것을 알려주죠. 공생하지 않는 생물이 살아남은 경우가 없습니다. 경쟁에서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공존의 지혜를 아는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박경현 (ouida)

금강, 공사 전-후 모습 비교... 남은 것은?


이글은 오마이뉴스 2012-06-29일자 기사 '금강, 공사 전-후 모습 비교... 남은 것은?'을 퍼왔습니다.
[사진] 사라진 습지-모래톱, 가뭄에도 쓸 수 없는 물

4대강(금강) 정비 사업이 사실상 마무리됐다. 공사 전과 공사 후 모습에서 두드러진 것은 습지와 모래톱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직선화된 인공수로만 남았다는 점이다. 

대전충남녹색연합과 녹색연합은 29일 강 사진기록가 박용훈씨와 함께, 4대강사업 이전과 이후의 모습을 비교한 사진 촬영분을 공개했다.

한 장면은 구간별로 4대강사업 이전인 2008년 또는 2009년에 촬영했던 것이고, 다른 한 장면은 올해 4월과 6월 찍은 것이다. 사진에 담긴 곳은 하천생태계 종다양성의 보고였던 습지들, 그리고 하천수질정화에 필수적인 모래톱이 잘 발달했던 지역, 뛰어난 경관적 가치를 지녔던 장소다.

비교 사진을 보면 여울이 사라졌다. 습지와 모래를 없애고 물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수자원은 정작 물 부족 해소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있다.

금강정비사업은 무엇을 남긴 것일까?

▲ 금강 신공주대교 4대강 공사전(2009년)과 후(2012년) ⓒ 대전충남녹색연합

▲ 금강 백제 큰 다리 부근 금강 공사 전(2009년)과 후(2012년) ⓒ 대전충남녹색연합

▲ 금강 곰나루국민 관광지부근 공사 전(2009년)과 후(2012년) ⓒ 대전충남녹색연합

▲ 공주보 하류 좌안, 공사 전(2009년)과 후(2012년) ⓒ 대전충남녹색연합

▲ 백제보 상류,공사 전(2009년)과 후(2012년) ⓒ 대전충남녹색연합

▲ 금강 공주대교 하류,공사 전(2009년)과 후(2012년) ⓒ 대전충남녹색연합

▲ 금강 백제보 부근, 공사 전(2009년)과 후(2012년) ⓒ 대전충남녹색연합

▲ 금강 왕진교 하류, 공사 전(2009년)과 후(2012년) ⓒ 대전충남녹색연합

▲ 금강 웅진대교하류, 공사 전(2009년)과 후(2012년) ⓒ 대전충남녹색연합

▲ 금강 공주보 부근, 공사 전(2009년)과 후(2012년) ⓒ 대전충남녹색연합

 심규상 (djsim)

돈 받고 싶으면 일본인이 돼라? 조국의 '모욕'


이글은 오마이뉴스 2012-06-29일자 기사 '돈 받고 싶으면 일본인이 돼라? 조국의 '모욕''을 퍼왔습니다.
[한국의 투명인간, 재일동포①] 한국인도 외국인도 아닌 재일동포

 ▲ 일본 시가현 출신의 재일교포 3세 김화자(34)씨, 김귀자(35) 자매 ⓒ 곽진성

일본 시가현 출신의 재일교포 3세 김화자(34)씨, 김귀자(35)씨 자매, 두 사람은 한국인 남편과 결혼해 대한민국에 터전을 잡았다. 화자씨와 귀자씨가 고향인 일본을 떠나, 한국에 정착하는 용기를 낸 데에는 국적이 있는 고국 '대한민국'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컸다. 화자씨가 말했다.

"저는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아, 20살 때 교토외국어전문학교를 찾아가 한국어를 배웠습니다. 한국에서 직장을 갖고 싶다는 생각에 2005년 한국에 입국을 했고, 2007년, (한국인) 남편과 결혼을 했습니다. 한 살 위인 언니는 미국에서 8년간 유학생활을 하다 한국인 남편을 만나, 2007년 한국에서 살게 됐습니다. "

'한국국적'을 지켜온 화자씨와 귀자씨는 대한민국에 대한 호감을 바탕으로 한국 정착을 결정했다. 즐거운 한국 생활을 꿈꾼 두 사람,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의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은 화자씨와 귀자씨를 곤혹스럽게 했다.

국민도, 외국인도 아닌 '재일동포'

▲ 보건복지부 홈페이지(복지r)화면 캡처 ⓒ 보건복지부 홈페이지(복지r)화면 캡처

화자씨가 대한민국 사회에서 제일 먼저 부딪친 차별의 벽은 육아 지원에 관한 부분이었다. 현재 내국인과 결혼한 재일동포 가정의 상당수가 정부의 보육료 혜택에서 배제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화자씨는 이런 상황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주민등록증이 있는) 내국인에게는 0~2세, 그리고 5세 아이들에게 소득과 상관없이 기본보육료가 지원됩니다. 하지만 재일동포의 경우 (주민등록증이 없기 때문에) 이런 보육비 지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 보육기획과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보육료는 국내 거주 대상이고, 자녀에게 주민등록번호가 있어야 한다. (주민등록번호가) 없으면 보육료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재일동포는 외국인일까?

그런데, 또 다른 쪽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연출된다. '한국국적을 지닌 재일동포'들이 다문화지원' 대상에서도 제외되는 것이다. 귀자씨의 경우가 그랬다. 귀자씨는 8년간의 미국유학생활을 한 후, 결혼을 통해 한국에 정착했다. 하지만 보육료를 신청했을 때, 한국국적을 갖고 있는 재일동포라는 이유로 거절을 당했다.

"보육료를 신청하러 갔는데, 답변이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재일동포 중 한국국적자는 (다문화가정) 보육료 지원 범위에 들지 않는다는 말이었습니다. 당시 동사무소 직원은 '일본 쪽으로 귀화하면 되지 않냐!'는 말을 해서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 육아지원, 보육료 지원범위, 주민등록번호 없는 재일동포들은 이 범위에 들지 못한다 ⓒ 보건복지부 홈페이지(복지r) 화면 캡처

현재 다문화 가족인 경우, 소득 및 연령과 상관없이 기본 보육료가 전액 지원된다. 하지만 재일동포들은 이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다. 다문화가족 정책을 짜는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한국 국적을 가진 재외동포 가족의 경우에는 다문화의 범위에 들지 않는다. 재일동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다문화 범위 안에 (재일동포를) 포함시키려면 법이 바뀌어야 한다"고 답했다.  

재일동포들은 국민도, 외국인도 아닌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에 한 재일동포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재일동포는 투명인간 같다"고 푸념했다. 화자씨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다. 화자씨는 재일동포들이 '국민으로 받아야 하는 권리'에서 배제당하는 상황에 씁쓸해했다.

"국민도, 외국인도 소득에 관계없이 받을 수 있는 지원들을 저희(재일동포)들은 똑같이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갑니다."

보육료 담당 부서인 보건복지부 보육사업기획과에 이런 상황에 대해 묻자, "그런 부분(재일동포 자녀의 보육료 지원)은 앞으로 검토가 필요하다"라고 답변했다.

'주민등록번호'없는 차별, 재일동포들의 눈물

▲ 조경희((40)씨는 '주민등록번호 부재'로 인한 어려움을 토로했다. ⓒ 곽진성
현재 재일동포들이 느끼는 '차별'의 중심에는 '주민등록번호'의 부재가 크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주민등록번호'가 없다는 것은 제대로 된 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녀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킨 한국국적 재일동포 조경희(40)씨의 경우가 그랬다. 주민등록번호, 외국인등록번호가 없는 조경희씨는 자녀의 초등학교 입학 문제로 애를 먹었다. 학교, 동사무소 어디서도, 입학에 관련한 공문을 받지 못했다.

"딸이 얼마 전 1학년에 입학을 했습니다. 입학을 앞두고, 예방접종 사항 같은 공문이 와야 하는데 주민번호 없는 딸에게는  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다른 한국인 어머니들한테 공문이 왔는지 확인한 후, 동사무소에 갔습니다. 가서 그 서류를 달라고 부탁했는데, '주민등록이 없으면 해당되지 않는다'는 말을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결국 한참을 싸운 후에야 간신히 공문을 복사할 수 있었습니다. 주민등록번호가 없기에 주민 대우도 못 받는 상황입니다."

재일동포는 '한국국적'을 가진 우리 동포이다. 그럼에도 재일동포들은 왜 주민등록증을 갖지 못할까? '재일코리안 연구자' 오가타 요시히로(37, 연세대 정치학과 박사과정)씨는 그 이유로 재일동포들의 일본 '특별영주자격'의 문제를 언급했다.

"주민등록법 제2조를 근거로 하여, 재일동포는 일본 '영주자'라는 이유로 한국국적을 가지고 있더라도 주민등록번호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심각한 문제는 재일동포 어머니들뿐만 아니라 그 자녀들 역시 한국에서 태어나도 주민등록번호 발급을 거부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법률상, 영주권을 보유하는 '해외이주자'에게는 주민등록번호가 발행되지 않고 있다. '특별영주자격'을 갖고 있는 재일동포들 역시 그런 이유로, '주민등록번호' 없는 국민으로 살고 있다.

현재 재일동포들이 주민등록번호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은 특별영주자격을 포기하는 길밖에 없다. 하지만 재일동포들은 '특별영주자격' 포기는,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특별영주자격' 속에는 재일동포들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화자씨가 말했다.

 ▲ 2008년 12월, 서울에서 기념 촬영중인 김귀자, 김화자 자매 ⓒ 곽진성

"제가 특별영주자격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저한테 고향인 일본에 들어가서 일본에서 주민으로서 살 수 있는 자격증과 같은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일본사람이 갖고 있는 일본국적이란 것과 똑같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고향에 언제든지 들어가서 살아도 된다는 자격증이 없다면 사람이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주민등록번호' vs '특별영주자격'... 특수성 인정받지 못하는 재일동포들

1945년 해방 후, 일본에 사는 재일동포들은 외국인으로 간주되어 체류자격이 모호해졌다.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강제추방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상황은 해결했다. 당시 한국국적을 선택한 이들에게 이른바 '협정영주권'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제도는 3세 이후의 지위에 대해 규정한 바가 없었던 점을 비롯해 여러 가지 미흡한 점이 있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1991년에 새로이 만들어진 것이 바로 '특별영주제도'이다. 당시 한국국적을 선택한 재일동포들은 '특별영주자격'을 부여받아, 일본 땅에서 살 권리를 얻었다. 재일동포들에게 '특별영주자격'은 일본의 차별과 억압을 이겨낸 증표 같은 것이었다.

 ▲ 일본의 코리아타운(지구촌동포연대 제공) ⓒ KIN(지구촌동포연대)
오늘날, 재일동포는 3, 4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일본 법무성 외국인통계 자료에 따르면,(2010년) '한국국적'(조선적자포함)을 유지하는 재일동포들은 56만 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2012년 한일교류가 활발한 만큼, 한국에 장기 정착하는 재일동포의 수도 늘고 있다.

결혼, 취직, 유학, 사업 등의 이유로 한국국내에 거소신고를 신청한 재일동포의 수는, 2012년 누적된 수가 1만여 명을 넘어섰다(거소란 재외동포법 동법 시행령 제6조에 의거 '30일 이상 거주할 목적으로 체류하는 장소'로 정의하고 있다).

이는 1999년 거소신고제도 시행 이후, 한국에 '한 달 이상 체류했거나, 체류하고 있는' 재일동포의 수는 1만 명을 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재일동포의 한국행에 대해, 우리는 차별의 눈으로 그들을 맞고 있다. 이런 재일동포 차별에 대해 홍익대 김웅기 교수(국제경영 일본전공)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한국 법제도상 주민, 재외국민 그리고 외국인이라는 세 가지 범주의 사람이 있다. 이들 가운데 가장 권리상황이 열악한 것이 외국인이 아니라 재외국민이라는 것이 매우 기이한 현상이다. 같은 국민임에도 불구하고 재외국민이라는 범주를 굳이 만들어 권리를 제한하는 배경에는 과거 가난했던 시절에 시작된 '자발적' 이민자에 대한 곱지 않는 감정이 있다.

재외국민의 권리를 제한한다는 것은 이를 반영한 일종의 보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보복의 대상인 '자발적' 이민자들은 외국국적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겠다고만 서약한다면 이중국적자로서 내국인과 동일한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일제강점의 유산이자 '비자발적' 이민자인 재일동포만이 이 보복의 희생양이 되고 있는 것이다.

육아지원이 유독 재일동포만을 배제하고 있는 것은 인권적 관점에서 보아도 조속히 시정되어야 한다. 또한, 일본에서 온갖 차별을 이겨온 재일동포가 일본으로 귀화해야 지원대상이 될 수 있는 현행제도는 의도적이든 아니든지 간에 모국이 이들에게 엄청난 모욕을 주는 꼴이다. 돈을 받고 싶으면 일본인이 되라고, 이 나라 행정이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 일본의 우토로 마을(지구촌동포연대 제공)
재일동포를 자발적 해외이주자로 취급해 '주민등록증'이냐, '특별영주자격'이냐는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급기야 귀화를 종용하는 사회 분위기다. 하지만 역사를 망각한 이런 접근법은 옳을까? '재일코리안 연구자' 오가타씨는 재일동포와 '특별영주자격' 특수성에 대해 언급하며, 문제점을 지적했다.

"대부분의 재일동포는 주민등록법이 생기기 훨씬 전, 해방 전에 일제강점으로 인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렇기에 재일동포를 자발적인 '해외이주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특별영주자격을 포기하지 않으면 주민등록번호를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국민이면 당연히 받을 수 있는 행정 서비스들을 (재일동포들이) 못 받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고 있습니다."

지금 재일동포들은 선택에 내몰리고 있다. '특별영주자격'을 포기해야만, '주민등록번호'를 받는 온전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선정되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선택이 아닌, 부모의 결정에 의해서 말이다. 지금 재일동포는 완전한 우리 국민일까? 오가타씨가 현 재일동포의 상황에 대해 말했다.

"일본에서 힘겹게 코리안으로서 살아온 재일동포들이 자신의 모국인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살게 될 때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국민대우가 아닙니다. 일본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회의 풀멤버(full-member)가 아닌 해외동포로만의 대우입니다."

 곽진성 (jinsung007)

지젝 “나는 당신들의 좋은 벗… 언제든지 활용해달라”


이글은 미디어스 2012-06-29일자 기사 '지젝 “나는 당신들의 좋은 벗… 언제든지 활용해달라”'를 퍼왔습니다.
기자들을 이끌고 쌍용차 대한문 분향소를 찾은 슬라보예 지젝

 ▲ 슬라보예 지젝이 쌍용차 해고 노동자 분향소 앞에 마련된 방명록에 글을 적고 있다.ⓒ미디어스
“기자들이 많이 왔다가 싹 빠져나가니까 허전하네.”
한산해진 분향소를 바라보는 한 쌍용차 해고자의 눈에 쓸쓸함이 묻어났다. 슬라보예 지젝이 분향소 방명록에 글을 남기고 다음 일정을 챙기러 떠난 직후였다. “그래도 지젝이 이렇게 와 줘서 (쌍용자동차 해고사태가) 많이 알려지니까 좋지 뭐.” 그의 허허로운 뒷모습에 지젝이 남긴 방명록 문구가 겹쳐졌다.
‘투쟁을 멈추지 마세요. 그대들이 우리 모두의 희망입니다(Continue with your struggle. You are the hope for us all).’
슬라보예 지젝이 29일 오전 11시 덕수궁 대한문 앞에 마련된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분향소를 찾았다. 슬라보예 지젝은 슬로베니아 출신의 세계적인 석학이다. 지젝은 라캉과 마르크스, 헤겔을 접목한 철학으로 서유럽학자들에게는 ‘동유럽의 기적’이라 불린다. 지젝은 지난 2011년 10월 8일에는 월가 점령 시위대를 찾아 연설하기도 했다.
지젝이 도착하기 전부터 그를 기다리는 한 무리의 기자들이 분향소 앞에 모여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이창근 와락 기획팀장은 “지젝이 대세인가 보다”라며 동료를 향해 웃었다. 이윽고 지젝이 분향소에 당도하자마자 그를 향해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좁은 분향소 안쪽은 이내 기자들의 뜨거운 취재 열기로 가득 들어찼다. 이를 지켜본 이창근 기획팀장은 트위터를 통해 “기자들이 지금껏 최고로 많이 왔습니다”라는 말을 전했다. 쌍용차 해고자들은 “우리가 언론의 조명을 받는 데 당신(지젝)을 이용하는 것은 아닌가”라며 걱정했지만 지젝은 개의치 않았다. 지젝은 오히려 “나를 활용하라. 당신들이 나를 활용하는 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좋은 벗이 되고 싶다”는 말로 쌍용차 해고자들의 염려를 붙들었다.

 ▲ 슬라보예 지젝이 쌍용차 해고 노동자 분향소에서 향을 올리고 있다.ⓒ미디어스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에게 “정리해고는 경영위기 때문이 아닌 착취를 위해 일어난다”며 “신자유주의의 표본이 되고 있는 한국의 모습을 바깥에 알려달라”고 청했다. 지젝은 김정우 지부장의 말에 동의하며 “정부와 대자본은 국제 사회에서의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쌍용차 해고자들의 목소리에) 반응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왼쪽)이 슬라보예 지젝(오른쪽)에게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적힌 스카프를 매어 주고 있다.ⓒ미디어스
지젝은 “이 사회에 문제가 있음을 사람들이 끊임없이 인식할 수 있도록 ‘작지만 꾸준히 아픈 상처’가 되어라”라며 해고자들의 투쟁 의지에 힘을 실었다. 또한 지젝은 “당장 문제가 해결되지 않더라도, 작은 눈덩이가 산을 내려가며 커지듯 투쟁의 성과는 사회에 남을 것”이라고 격려하였다.
기자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든 모습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행인들과 외국인 관광객들이 쌍용차 분향소를 기웃거렸다. 더러는 잠시 멈추어서 지젝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지젝이 김정우 지부장과의 대화를 끝마치자 기자들도 저마다 짐을 챙겨 들고 분향소를 떠났다. ‘지젝이 찾은 쌍용차 분향소’가 아닌 ‘쌍용차 분향소를 찾은 지젝’을 담으러 온 기자들이 떠나자, 분향소는 다시금 지젝이 방문하기 전의 한산함 속으로 잠겨들었다. 쌍용차 해고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내용의 현수막만이 바람에 나부꼈다. 점심시간을 맞은 행인들도 바삐 걸음을 옮겼다. 대한문 앞에 쌍용차 분향소가 설치된 지 86일 째 되는 날의 점심 풍경이었다.

윤다정 수습기자  |  lindalmemory@gmail.com

내년도 최저임금 6.1% 인상, 시간당 4,860원


이글은 뷰스앤뉴(Views&News) 2012-06-30일자 기사 '내년도 최저임금 6.1% 인상, 시간당 4,860원'을 퍼왔습니다.
노조측 불참속에서 공익위원안으로 결정

내년도 시간당 최저임금이 올해보다 6.1%(280원) 오른 4천860원으로 결정됐다.

최저임금위원회는 지난 29일 저녁 시작된 12차 전원회의에서 공익위원이 제출한 이같은 인상안을 심의ㆍ의결했다고 30일 밝혔다.

이날 회의에는 전체 27명의 위원 중 공익위원 9명, 사용자 위원 8명, 근로자 위원 1명 등 총 18명이 참석했으며, 사용자 위원 1명과 한국노총 및 민주노총의 근로자 위원 8명은 의결에 불참했다.

이번에 인상된 내년도 시간당 최저임금을 월 단위로 환산하면 주 40시간(월 209 시간) 사업장 기준으로 101만5천740원이다. 최저임금위원회는 이번에 인상된 최저임금이 258만2천명에게 적용될 것으로 추산했다.

당초 사용자 대표는 최저임금 동결을, 양대노총은 올해(4천580원) 대비 22.3% 인상된 5천600원을 제시했다. 이처럼 이견이 크자 지난 27일 열린 10차 전원회의에서 공익위원안 제시를 요청했고 공익위원들은 하한액 4천830원(5.5% 인상), 상한액 4천885원(6.7% 인상)을 제시했고, 결국 이날 12차 회의에서는 공익위원안인 4천830∼4천885원의 중간인 4천860원을 내년도 최저임금으로 결정했다.

김혜영 기자

'독일의 양보'에 미국-유럽 증시 폭등


이글은 뷰스앤뉴(Views&News) 2012-06-30일자 기사 ''독일의 양보'에 미국-유럽 증시 폭등'을 퍼왔습니다.
국제유가 9.4% 폭등, 세계금융 붕괴 위기에 메르켈 양보

독일의 과감한 양보로 유럽 재정위기 안정대책이 극적으로 도출되자 29일(현지시간) 미국과 유럽 증시가 폭등하고 국제유가도 폭등하는 등 세계금융시장이 환호했다.

이날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전날보다 277.83포인트(2.2%) 오른 12,880.09에 거래를 마감했다. S&P 500 지수는 33.12포인트(2.49%) 상승한 1,362.16, 나스닥 종합지수는 85.56포인트(3%) 뛰어오른 2,935.05에 거래를 마쳤다.

유럽 주식 시장도 7개월 만에 가장 크게 올랐다.영국 런던 증시의 FTSE 100 지수는 1.4% 오른 5,571.15 포인트, 프랑스 파리 증시의 CAC 40 지수는 4.75% 뛴 3,196.65 포인트, 독일 프랑크푸르트 증시의 DAX 30은 4.33% 상승한 6,416.28 포인트를 각각 기록했다.

이번 합의의 직접적인 수혜를 보는 이탈리아와 스페인 주식 시장은 이보다 상승폭이 더 컸다. 이탈리아 밀라노 증시의 FTSE MIB 지수가 2년 만에 가장 큰 폭인 6.6%의 상승률을 기록했고, 스페인 마드리드 증시의 IBEX-35 지수도 5.66% 뛰었다.

이들 국가의 채권 금리도 급락했다. 스페인의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은 전날 6.94%에서 6.33%로, 이탈리아 10년 만기물도 6.2%에서 5.81%로 각각 급락했다.

그동안 경제위기감으로 추락을 거듭하던 국제유가도 폭등세로 돌아서 이날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8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 원유(WTI)는 전날 종가보다 7.27달러(9.4%) 뛴 배럴당 84.96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이는 2009년 3월12일 이후 최대 상승폭이다. 런던 ICE선물시장에서 북해산 브렌트유는 6.22달러(6.8%) 상승한 배럴당 97.58달러 선에서 움직이고 있다.

이처럼 세계금융시장이 환호한 것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총리의 과감한 양보때문이었다. EU 정상들은 전날부터 마라톤 협상을 벌인 끝에 유로존 구제기금의 역할 변경 등을 통해 스페인과 이탈리아 국채시장을 안정시키는 방안에 전격 합의했다.

유럽재정안정기금(EFSF)과 유로안정화기구(ESM) 등 구제기금이 자본재확충이 필요한 유로존 은행들을 직접 지원할 수 있도록 하고 위기국가의 국채를 직접 매입하는 것도 허용했다. 

또한 스페인에 지원하는 구제자금의 변제 선순위권을 없애 민간 투자자들이 부담없이 위험국 채권에 투자할 수 있게 했다. 종전에는 채무국이 만일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구제기금에 우선적으로 지원금을 변제하도록 돼 있어 민간 투자자들은 위험국 채권 투자를 기피했다.

이같은 방안을 도입할 경우 가장 많은 부담이 독일에 돌아올 것을 우려해 강력 반대해온 메르켈 총리는 EU정상회담이 아무런 합의도 도출하지 못하고 끝날 경우 다시 시장이 패닉상태에 빠져들 것이란 우려에 결국 대승적 양보를 해야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임지욱 기자

한일군사협정, '졸속 밀실협상' '한반도 긴장조성' 쟁점


이글은 민중의소리 2012-06-29일자 기사 '한일군사협정, '졸속 밀실협상' '한반도 긴장조성' 쟁점'을 퍼왔습니다.
29일 대통령 서명 앞두고 여야 거센 반발에 체결 보류

한일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GSOMIA, 이하 한일군사협정)에 대한 논란이 커지고 있다. 국회 비준 절차도 없이 지난 26일 국무회의에서 비공개로 졸속 처리되자마자 당장 대통령의 서명만이 남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게다가 한일군사협정으로 인해 한·미·일간 군사협력이 강화되고, 이에 상응해 북.중.러간 군사협력이 강화되면서 한반도 주변 정세가 불안정해질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결국 한반도에서 군사간 긴장감은 높아지고 남북 분단은 고착화될 수 있다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뉴시스/신화 지난 2010년 12월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과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 마에하라 세이지 일본 외무상이 북한의 연평도 포격과 관련 삼자회담을 갖고 공동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졸속 밀실협상, 국회의 비준 동의까지 무시?

한일군사협정을 두고 국회의 비준 동의 대상인지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거세게 일고 있다. 야권과 시민사회에서는 한일군사협정이 국회 비준 동의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민주당 이언주 원내대변인은 28일 브리핑에서 "현재 정부가 맺으려고 하는 한일군사협정은 그 명칭과 형식을 불문하고 내용상 대한민국의 안전보장, 국가안위에 관한 중대한 국가간 협정이며 국회 비준 동의가 반드시 필요한 대상이라는 해석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 

현법 60조 1항에는 '국회는 상호원조 또는 안전보장에 관한 조약, 중요한 국제조직에 관한 조약, 우호통상항해조약, 주권의 제약에 관한 조약, 강화조약,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 또는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의 체결·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비록 조약은 아니지만 국가 안전보장에 관련돼 있기 때문에 내용상 국회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국회 비준 동의가 필요한 조약의 경우에는 해당 조약에 대한 양국간 혹은 다자간 서명이 이뤄지고 나서 발효 전에 국회 비준 동의를 얻어야 한다. 

논란이 일자 정부는 이번 협정 체결을 추진하는데 있어 사전에 국회 동의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조병제 외교통상부 대변인은 같은 날 브리핑에서 "국회 동의가 반드시 필요한 협정은 국가 안전보장에 관한 것이나 국민에게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것이어야 하는데, 법제처는 이번 협정이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하지만 29일 오후 4시로 예정됐던 협정 체결을 앞둔 상황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국회를 무시한 채 졸속 협상을 추진하는 데에 비판이 거세지자 정부는 이날 결국 협정 체결을 연기하기에 이르렀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한 외교소식통은 "여야의 요구에 따라 서명 전에 국회에 먼저 설명키로 했다"며 "향후 일정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고 밝혔다. 

앞서 이날 민주통합당은 국회에서 의원 총회를 가진 뒤 국회 본관 앞 계단에서 소속 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일군사협정 체결 규탄대회를 열고 총공세에 나섰다. 

이해찬 대표는 협정에 대해 "나라의 군사 기밀을 일본 자위대에 고스란히 갖다 바치겠다는 것"이라며 "일본 자위대를 과연 우리가 군으로 인정할 수 있느냐, 국무회의에서 왜 몰래 통과시켜야 하는지 도저기 용납할 수 없다"고 규탄했다.

한일군사협정에 지지를 표하던 새누리당도 반대 여론에 밀려 입장을 번복했다. 이한구 원내대표는 이날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한일군사협정의 보류 및 유예를 해달라는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영 정책위의장은 국회 브리핑에서 이같은 소식을 전하며 "아무리 국회 동의가 필요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해도 반드시 국회 외통위나 국방위에 보고하고 국민의 검사를 맡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번 한일군사협정은 체결될 경우 1945년 해방 이후 처음으로 일본과 맺는 군사협정이 된다. 그 정도로 중대사안인 만큼, 협정 체결은 보류됐지만 앞으로도 적지 않은 논란이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한·미·일 vs. 북·중·러, 군사적 긴장감 고조

한일군사협정이 북한은 물론 중국과 러시아를 자극할 수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특히 이같은 상황을 두고 보면 이번 한일간 협정에 미국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미 지난 14일 한미 외교·국방장관(2+2) 회담에서는 한·미·일 삼각동맹 강화에 대한 의지가 돋보였다. 이와 관련 해당 장관들은 공동성명을 통해 "양측 장관들은 지역 평화 및 안정을 위해 일본과의 3자 안보 협력의 중요성을 확인하였다"고 밝혔다.

공동성명은 "양측 장관들은 인도주의적 지원, 재난구호, 해양안보, 항행의 자유, WMD 비확산을 포함하여 한‧미‧일 3자 협력 범위를 확대하기로 하였다"며 "나아가 양측 장관들은 한·미·일 안보토의를 포함하여 3자 안보협력·협조를 위한 메커니즘을 강화하기로 하였다"고 명시하고 있다. 

정부는 한반도에 유사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지상군 위주의 주한 미군과 해·공군 위주의 주일 미군이 같이 움직여야 한다는 이유로 일본과 정보교류를 위한 협정 체결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협정은 이를 넘어 한·미·일간 군사협력을 강화하는 시발점이 될 것이며, 이에 상응해 북·중·러간 군사협력도 강화되면서 한반도 주변 정세가 불안정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 경우 한반도는 두 동맹체제가 대치하는 새로운 냉정체제로 고착돼 한반도 긴장상황은 물론 분단체제까지 영구화시킬 수 있다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이와 관련 유영재 평통사 미군문제팀장은 "결국 이 협정은 동북아 MD(미사일방어)체제 구축을 위한 과정"이라며 "미국은 중국을 포위하고 아시아·태평양에서 자국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한미일 안보협력을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을 겨냥한 MD 구축은 군사적 긴장감만 높이고 신냉전체제로 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지현 기자 cjh@vop.co.kr

이글은 민중의소리 2012-06-29일자 기사 '"종일·종미 이명박, 나라 망치고 팔아먹고 있다"'를 퍼왔습니다.
시민사회단체, 29일 보신각 앞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 폐기 촉구

ⓒ양지웅 기자 29일 저녁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평통사가 연 '한일 군사협정체결 반대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며 한일군사협정을 추진하는 정부를 규탄하고 있다.

"민주주의 만세", "대한독립만세" 보신각에 만세 삼창이 울려 퍼졌다. "오늘 체결을 막은 것은 승리지만 체결 폐기, 책임자 처벌까지 힘을 모아야 한다"는 사회자의 말에 집회 참가자들은 함성을 외쳤다.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평통사) 등의 시민사회단체 회원들과 시민들은 29일 오후8시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우산을 쓰고, 우비를 입고 집회에 참석해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GSOMIA·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폐기를 촉구했다.

이날 오후 3시30분 정부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을 연기하겠다고 발표했다. 조병제 외교통상부 대변인은 "19대 국회가 7월2일 개원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국회 합의 후 서명을 추진하기로 했다"며 4시로 예정됐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이 미뤄졌다고 밝혔다.

이명박 정부의 유행어는, '지곤조기'?

ⓒ양지웅 기자 29일 저녁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평통사가 연 '한일 군사협정체결 반대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한일 군사협정을 추진하는 정부를 규탄하고 있다.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 김성일 사무처장은 "종북이 나라를 망친다고 얘기를 하는데 오히려 종일, 종미 이명박 정부가 나라를 망치고 팔아먹고 있다"고 비판의 소리를 냈다.

언론소비자주권 국민캠페인 양재일 대표는 "지난번에 협정을 맺는다는 말이 나오다가 국민적 논란을 반영해서 일단을 미룬 듯 보였다"며 "그런데 이번에 정보협정 체결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뒷통수를 맞았다는 생각이 들더라"라고 언급했다. 

양 대표는 "'지곤조기'를 아느냐. 이명박 대통령이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달려달라'고 했던 말이다"라며 "이것을 보면 아무도 모르게 또 처리될 수 있다. 우리는 지켜보고 감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유영재 미군문제팀장은 "체결이 연기됐다는 말을 듣고 오늘 날짜를 보니 6월 29일이다"라며 "6.29는 속칭 '속이구'라고 한다. 6.29에 속아서 6월 항쟁의 결과가 엎어진 걸 생각하면서 항상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왜 연기됐는지 생각해 보니 새누리당이 이렇게 강행하면 대선에 불리하다고 생각해 틀었다고 본다"며 "대선후보들이 모두 한일군사협정에 대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박정희와 똑같은 일 저지르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양지웅 기자 29일 저녁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평통사가 연 '한일 군사협정체결 반대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한일군사협정을 추진하는 정부를 규탄하고 있다.

인천에서 온 백영숙(62·여)씨는 "1965년 박정희도 미국의 사주에 의해 이렇게 똑같이 밀실처리를 하려고 했었다"며 "뜻있는 학생들이 6.3일으켜 강행하지 못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깜짝 놀랐다. 어쩜 이렇게 똑같은 일을 이명박 정부가 벌이는가"라며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더라. 전국민이 들고 일어서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어 "이명박 정부는 끝까지 하고 싶은 데로 한다"며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은평구에서 갓난아이를 안고 나온 최모(33·남)씨는 "일본군대가 어찌됐건 한반도에 발들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라며 군사협정의 체결을 염려했다. 그는 또 체결이 연기된 것에 대해 "말그대로 연기일 뿐 파기가 아니다"라며 "지금은 여론이 좋지 않아 연기를 한 것 같지만 대선 등 시끄러워지면 언제든지 국민들 몰래 처리될 수도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양지웅 기자 29일 저녁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평통사가 연 '한일 군사협정체결 반대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한일 군사협정을 추진하는 정부를 규탄하고 있다.

ⓒ양지웅 기자 29일 저녁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평통사가 연 '한일 군사협정체결 반대 집회'에서 참가자의 피켓에 악수를 나누는 한국 김관진 국방장관과 일본 방위상의 사진이 보인다.

ⓒ양지웅 기자 29일 저녁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평통사가 연 '한일 군사협정체결 반대 집회'에서 유영재 평통사 미군문제팀장이 한일군사협정을 추진하는 정부를 규탄하고 있다.

전지혜 기자 creamb@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