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29일 금요일

북 위협론·미국 압박·비밀 추진… 1965년 한·일협정 ‘복사판’


이글은 경향신문 2012-06-28일자 기사 '북 위협론·미국 압박·비밀 추진… 1965년 한·일협정 ‘복사판’'을 퍼왔습니다.

ㆍ정부, 협정안 통과 국무회의 속기록도 안 남겨

정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추진하는 과정과 배경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 때와 여러모로 유사하다. 미국 주도의 동북아 질서와 일본의 과거사 문제, 정부의 권위주의적 일 추진 스타일은 47년이 지나도 거의 바뀌지 않았다. 

우선 과거사 문제로 관계가 껄끄러운 한·일 양국이 미국의 압력에 가까운 권유로 마지못해 마주 앉는 모습이 비슷하다. 

커트 캠벨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한국과 일본에 올 때마다 한·일 간 군사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는 일본 당국자들에게 과거사 문제에 대해 왜 좀 더 성의 있는 태도를 보이지 못하느냐고 채근하고, 한국을 방문해서는 한·일 군사협력이 왜 필요한지 집요하게 역설했다고 정부 관계자는 말했다. 캠벨 차관보는 지난 13일 신국가안보센터(CNAS) 연례총회 연설에서도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안보·외교 전략을 강화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이 서로 좀 더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앞서 1965년 한·일협정 때도 미국은 조정자 노릇을 했다. 1964년 1월 로버트 케네디 미 법무장관과 딘 러스크 국무장관이 방한해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을 조속히 타결하라고 촉구했다. 한반도 유사시 일본이 역할을 하려면 양국 간 관계 정상화가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미국이 1965년 한·일을 마주 앉게 할 때는 소련을 겨냥하는 냉전구도 속에서 움직였다면, 이번에는 미국의 견제 대상이 중국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미국의 지역, 세계 전략의 구도 속에 한·일 협력이 중요한 교두보로 자리매김된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당시 한국이 서둘러 일본과 협정을 맺어야 한다는 논리 중 하나로 ‘북한의 위협’이 거론됐고, 이번에도 북한의 미사일 위협 등에 대비한다는 이유가 제시됐다. 

한국의 권위주의 또는 보수주의 정권이 국민적 공감대를 수렴하지 않고 비밀리에 일을 추진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박정희 정부는 한·일협정을 밀실에서 추진하다 6·3항쟁이라는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다. 김종필-오히라 메모 등 밀약설이 끊이지 않았다. 2005년 법원 판결로 한·일협정 관련 외교문서가 공개될 때까지 식민지배의 피해자들이 권리를 찾지 못했다. 

한·일 군사협정 역시 협정을 맺는 과정의 핵심 내용들은 알려지지 않았다. 정부는 한·일 군사협정안을 통과시킨 유일한 회의인 국무회의의 속기록을 작성조차 하지 않고 있어서 나중에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지조차 불분명하다. 한국의 보수정권들은 국민 여론의 부담을 느껴 일본을 대할 때 비밀스럽게 일을 진행해왔다. 국민 여론을 수렴하지 않기 때문에 여론이 악화되고 그럴수록 비밀주의는 더 심화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모습이다.

손제민 기자 jeje17@kyunghyang.com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