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28일 금요일

월가 넘는 새 민주주의 향한 출발점


이글은 Economy Insight의 2011-11-01일자 기사 '월가 넘는 새 민주주의 향한 출발점'을 퍼왔습니다.
[Cover Story]시위의 중심 맨해튼 ‘리버티 스퀘어’의 의미
고병권 수유너머R 연구원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시위 참가자들이 지난 10월18일 뉴욕 경찰의 폭력 진압에 항의하면서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

월스트리트 점거시위의 중심 장소인 미국 뉴욕 맨해튼의 ‘리버티 스퀘어’(주코티 공원)는 지난 ‘9·11 테러’ 때 무너졌던 세계무역센터 바로 옆에 있다. 세계무역센터가 있던 곳에는 지금 105층 높이의 ‘원월드무역센터’(One World Trade Center)가 건설 중이다. 알카에다의 공격을 받은 자리에서 미국에 대한 내부 공격이 시작됐다는 것은 참 묘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두 공격은 아주 다르다. 알카에다의 자살테러가 미국이 자행한 대외적 파괴가 끔찍하게 뒤집힌 버전이라면, 리버티 스퀘어에서 시작된 공격은 파괴보다는 활력에 기반하고 있다.

파괴가 아닌 활력이 낳은 시위
이 공원의 서쪽부터 살펴보면 우선 신나게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는 사람들이 있다.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Occupy Wall Street)는 구호를 섞어가며 흥겹게 드럼을 치고 색소폰을 불며 클래식 악기들을 연주한다. 그 뒤쪽에는 침낭들이 쌓여 있는데, 거기서 누워 자거나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공원 가운데로 들어가면 주방이 있다. 사람들이 음식을 장만하고 나눠먹는 곳이다. 음식은 대부분 선물로 들어온 것이다(유럽에서 누군가 주문해 배달된 피자도 있다). 주방 곁에는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쉬거나 간단한 치료를 받는 곳이 있다. 그 너머로 가면 미디어센터가 있다. 세계 곳곳에 이곳 상황을 알리고 거기서 들어오는 메시지를 여기저기로 퍼나른다. 미디어센터를 지나치면 사람들이 토론하거나 연설하는 장소가 나온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사람은 ‘마이크 체크’를 외치고 다른 이의 육성을 빌려 자기 말을 전달한다. 그 근처에는 책을 빌려주는 작은 도서관이 있다. 동쪽 끝에 이르면 피켓 든 이들이 도로를 따라 쭉 늘어서 있다. 여기서는 각종 퍼포먼스가 벌어진다. 그 외에도 ‘월스트리트 점거하라’는 문구를 붙인 채 뜨개질하는 사람, 마사지하는 사람, 작은 공예품 만드는 사람 등이 곳곳에 있다.
매번 리버티 스퀘어를 방문할 때 ‘도대체 이곳은 뭐하는 곳인가’라는 물음을 던져본다. ‘혁명’이니 ‘계급전쟁’이니 ‘직접민주주의’니 하는 말들이 넘쳐나는 장소인데, 그 모습은 권력 탈취를 노리는 사령부보다는 맨해튼에 새로 생겨난 작은 공동체, 작은 마을 같다는 인상을 준다. 옷을 벗어던진 채 춤을 추거나 바닥에 드러누워 잠을 자고 두런두런 음식을 나눠먹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태초의 어떤 공동체를 보는 것 같다. 그 옆에서 인터넷을 통해 다른 대륙의 사람들과 지지 메시지를 교환하고 그것을 프로젝터로 상영하는 것을 보면 미래의 어떤 공동체를 보는 듯하다.
한때 이 공원의 입구에는 ‘민주주의는 직접적이다’(Democracy is Direct)라고 쓰인 표지판이 서 있었다. ‘바로 여기가 민주주의의 직접성이 드러나는 곳’이라는 뜻일 것이다. 언젠가 ‘민주주의의 재탄생(Rebirth)을 지지한다’는 피켓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있어 그에게 그 의미를 물은 적이 있다. 그는 공화당과 민주당 사람들을 싸잡아서 “월스트리트 돈을 받아먹는 놈들”이라고 욕했다. 그럼 ‘재탄생한 민주주의란 어떤 것이냐’고 묻자 그는 손으로 공원 안쪽을 가리켰다.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리버티 스퀘어는 일종의 ‘해방구’라고 할 수 있다. 해방구란 삶을 통제하는 기존의 모든 명령이 그 효력을 상실한 장소다. 경찰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이곳이 뉴욕의 법과 행정의 바깥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를 해방구로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법적·제도적 영향력이 탈각되거나 부차화한 곳이라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사람들의 삶을 규정해온 모든 원칙, 그리고 사람들이 목표로서 인정하거나 꿈꾸던 모든 지향이 판단 중지되고 브레이크가 걸리는 곳이라는 의미가 훨씬 크게 다가온다.

‘불법’, ‘무자격’이라는 말이 오히려 효력 잃어
이 소박한 공원이 가진 급진성은 바로 거기에 있는 듯하다. 삶을 규정해온 원칙, 법과 제도가 판단 중지되는 곳이기에 여기서는 누구도 연령·직업·인종·문화·성적지향·국적 등을 이유로 자격 제한을 받지 않는다. 어느 미등록 이주자의 말처럼 여기서는 ‘불법의 인간’, ‘무자격의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각종 터부, 금기어들이 효력을 잃는 곳이다. 철학자 코넬 웨스트는 사람들에게 “‘혁명’이라는 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어떤 학자는 전후 수십 년간 미국 사회의 금기어이던 ‘자본주의’에 대해 이제는 솔직히 말하자고 주장했다. 결국 자본주의가 문제 아니냐는 것이다. 미국 사회가 좀처럼 용납하지 않던 각종 금기어들을 여기서는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이 아메리칸드림이라고 불러온 삶의 이미지에 대해 괄호를 치고 있다. 그동안 어쩔 수 없이 추인했거나 꿈처럼 받들었던 삶의 유형을 타도하는 것이다. 월스트리트는 한때 많은 미국인들이 꿈꾸던 삶의 이름이지만, 이제는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탐욕과 도덕적 파산의 상징이 되었다. 월스트리트를 점거한 이곳에서 사람들은 그와는 다른 삶의 형식, 대안적 삶의 어떤 원형을 재주조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주방에 결합한 생태주의자는 설거지한 물이 음식물 쓰레기를 거쳐 텃밭에 흘러가 채소에 양분을 제공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는 책을 가져와 도서관을 만들고, 누군가는 신문을 만들며, 또 누군가는 먹을 음식을 장만한다. 누군가는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고, 또 어떤 이는 노래와 춤을 선사한다.
이렇게 구축된 삶의 공동체를 보고 있노라면 이들이 원하는 게 단순히 일자리나 소득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수십 년간 자신을 지배해온 삶의 유형을 교체하고 싶은 것이다. 기존 삶을 지배한 원칙·관행·제도에 브레이크를 걸고 거기에 괄호를 친 뒤 대안적 삶의 원형을 주조해내는 힘이야말로, ‘법의 힘’도 아니고 ‘제도의 힘’도 아닌 ‘데모스의 힘’, 즉 ‘민주주의’일 것이다. 언뜻 허술하고 소박한 공동체로 보이지만, 리버티 스퀘어는 지금 세계 곳곳에서 수십만 명이 벌이는 투쟁의 중심에 무엇이 있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거기에는 민주주의가 있고, 새로운 삶의 유형이 만들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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