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16일 일요일

가치판단을 배제하는 주류 ‘변호사’

이글은 한겨레신문 hook 2011-10-11일자 기사 '가치판단을 배제하는 주류 ‘변호사’'를 퍼왔습니다.

영산대학교 교수. 독일 브레멘대학교 경제학 박사. 네이버 파워블로거(http://blog.naver.com/saintcomf) 소스틴 베블런(Thorstein B. Veblen)과 조셉 슘페터(Joseph. A. Schumpeter)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진화경제학적 방법론'에 따라 자본주의 구조를 연구하고 있다. "제도경제학"과 "지식경제학"에 관심을 갖고 학술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먹고 살자면 뭔가를 만들어내야 한다. 경제학은 그것을 근사하게 ’생산활동’이라고 부른다. 외딴 무인도에 홀로 사는 로빈슨 크루소도 먹고 살기 위해 생산해야 한다. 하지만, 그의 생산활동은 자신을 향한다. 그곳엔 자기 말고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무인도란 참 황당한 곳이지만 신고전학파 주류경제학의 경제행위자는 바로 로빈슨크루소와 같다. 그래서, 나는 이런 보수주의적 신고전학파경제학을 정말 황당무계한 경제학이라고 생각한다.(소설의 주인공도 난파 후 표류하다 도착한 이 섬에 ‘절망도’로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절망적 섬의 로빈슨크루소가 아니라면 시장의 모든 생산자는 자신을 위해 생산하지 않고 타인의 욕구를 염두에 두면서 생산한다. 타인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재화와 서비스여야 상품으로 팔리기 때문이며, 상품으로 팔려야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활에는 많은 재화와 서비스가 필요한 데 이 모든 것을 내가 스스로 생산할 수 없으니 타인으로부터 그것을 구매해야 된다. 구매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결국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는데, 돈 벌기 위해선 타인이 요구하는 것을 제공해야 한다.
먹고 살기 위해 돈 버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나처럼 지식을 팔면서 먹고 사는 사람이 있지만 자동차나 TV를 만들면서 먹고사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붕어빵이나 치킨을 팔아먹고 살지만 다른 이는 그 결과물인 똥을 치우면서 먹고 산다. 이 모든 것이 이 세상에 꼭 필요한 것들이어서 모든 사람들이 그 행위에 대해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자 한다. 똥 치우는 사람이 없으면 이 세상은 똥범벅이 되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이다.
그것만 있을까? 우리의 블로그 이웃인 님은 ‘운동’을 팔아서 먹고 살고 님의 따님은 ‘성악기술’을 팔아서 먹고 산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예체능에 대해 돈을 지불한다. 의료행위를 팔고 계시는 우리 이웃 님도 언급하자. 이 분 없으면 우린 다 죽는다.
계속해 보자. 어떤 이는 사람을 웃기면서 먹고 살고, 다른 이는 두들겨 맞아가면서 먹고 산다. 개그맨이나 복싱선수들이다. 아! 참 힘들겠다. 그래도 이런 직업들이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니 사회구성원들에 유익한 면이 없지 않다(그래도 코피 흘리며 눈두덩이 찢어지는 복싱선수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안타깝다).
이처럼 사람들은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먹고 산다. 이들이 공급하는 것들은 사회를 지혜롭고 풍요롭게, 청결하고 건강하게, 아름답고 유쾌하게 만든다. 적어도 이 사람들은 세상을 해롭게 만들지 않고 정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먹고 산다.
이와 달리 돈이면 뭐든지 공급하는 사람들도 있다. 해로워도 좋고 정의롭지 못해도 상관없다. 이 중, 선량한 사람들을 해치면서 먹고 사는 이가 있다. 오직 주먹과 회칼로 등을 쳐먹고 사는  “조폭” 이나 직업소개소를 가장한 인신매매상(!)이 그렇다.
폭력의 시장공급자인 ‘용역’도 그 점에서 둘째가라하면 서러울 것이다. 시장의 공급자는 시장수요자의 요구에 충실해야 한다. 수요자의 요구에 대해 가치 판단할 필요가 없다. 수요자가 무자비한 폭력과 살상을 요구하면 그러한 ‘서비스’를 판매하면 그만이다. 이들에겐 연민과 같은 감성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무지한 사이코패스들이다. 마르크스가 봤다면 분명 ‘룸펜프롤레타리아트’로 꾸짖었을 것이다.
이들이 제공하는 재화와 서비스의 특징은 폭력, 사기, 무정(無情), 그리고 ‘야만’이다. 그래서 그들이 ‘공공의 적’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 보다 더한 방식으로 먹고 사는 이도 있다.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키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다. 그것도 모든 사람들이 사려 깊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백주대낮에 국가권력을 앞에 두고 말이다.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키기 위해 동원하는 그들의 ‘문명’을 보라! 폭력대신에 학문과 문학, 예술이 동원된다. 목 놓아 부르짖으며 법과 정의에 호소하기까지 한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이들의 아름다운 수사를 듣고 있으면 무엇이 문명이고 무엇이 야만인지 헷갈린다.
용역처럼 그들은 추레하게 폭력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고 스마트하게 ‘지식서비스’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양심은 없다. 21세기 지식기반경제를 대표하는 직종일지 모르나 내가 보기에 이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사이코패스들이다.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런 짓을 할 수 없다. 용역보다 더하다. 이젠 누가 공공의 적이며 누가 ‘공공의 수호자’인지도 판단도 서지 않는다.
 누군가! 바로 변호사들이다. 그런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로펌(law firm)이다. 김&장의 변호사들이 이 동네에선 가장 유능(!!)하단다.
가치판단을 배제하는 주류 신고전학파 경제학은 이들의 가장 강력한 우군이다. 이 경제학에게 있어 시장의 수요는 항상 정의롭다. 나아가 그것은 “이윤”을 낳은 모든 행위를 “정의”로 승화시켜 준다. 그리곤, 수단에 대해 묻지 않는다. 그 결과 최대의 화폐량을 차지하는 자들을 유능하다고 평가해 준다. 이 경제학의 세계관으로부터 보면 이 모든 행위들은 가치 있다! 황당무계함을 넘어 뻔뻔하다. 
에서 실제 사건을 변호했던 변호사는 그 천인공노할 죄인들에 대해 “변호할 가치가 있었다”고 변호(!)한다. 공급자라면 수요자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어야 했기 때문이란다.
먹고 사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거짓서비스를 공급하여 번 돈으로 산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지, 그 돈으로 지출한 자녀교육비가 어떤 인간을 만들어낼 것인가 한번쯤 생각해 봤는지 궁금하다. 감히 묻겠다. 그 수려한 언변으로 밥을 먹고 자녀를 교육시킬 때, 말 못하는 벙어리들의 ‘소리없는 아우성’이 정녕 눈 앞에 어른거리지  않았으며, 그들의 탄식이 들리지 않더냐?
하기야, 거짓을 진실로 바꾸면서 착하고 힘없는 자들을 감옥에 쳐 넣어 눈물과 탄식을 주고, 추악하고 강한 자들에게 화평과 기쁨을 주는 변호사들이 이 땅에 그 뿐이겠는가! 얼마나 많은 퇴직 판검사나 공직자들이 이 면죄부를 얻어 홀가분한 마음으로 대형로펌에서 진실을 거짓으로 비트는 서비스를 제공했던가.
엊그제 로스쿨 입학을 준비하는 제자가 찾아왔다. 똑똑하고 바르게 사는 학생이다. 점수도 잘 받았으니 잘 될 것 같다. 뭘 하려고 하니? 인권 변호사가 될 겁니다. 아멘!
주여, 당신이 정녕 살아 계신다면 이 아이에게 길을 열어 주소서. 이제 그 길었던 침묵을 거두시어 당신의 공의가 이 땅에 임하시기를 비나이다. 아! 정의가 강물처럼. 지은이, 파이팅!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