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27일 목요일

[사설]시민들은 특권과 반칙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글은 경향신문 2011-10-26일자 사설 '시민들은 특권과 반칙을 용납하지 않았다'를 퍼왔습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원순 범야권 단일후보가 승리했다. 박 후보는 높은 득표율로 나경원 한나라당 후보를 여유있게 제쳤다. 한나라당의 참패이자, 범야권의 압승이다. 민선 3기인 이명박 전 시장으로부터 4, 5기인 오세훈 전 시장에 이르기까지 9년여 만에 서울시의 지방 권력이 교체된 것이다. 정권 심판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는 재·보선의 특성상 이명박 정권의 향후 국정 운영이나 여권 내부의 권력 쟁투, 서울 시정에도 일대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우리는 이번 선거가 범야권이나 박 후보의 선전보다는 집권층의 패착으로 갈렸다고 본다. 그중에서도 최대 패인은 선거 기간에 나온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이전 논란과 박 후보에 대한 무차별 색깔론 제기, 그리고 그 역풍으로서 불거진 ‘1억원짜리 피부 관리’ ‘족벌사학’을 비롯한 나경원 한나라당 후보의 도덕성 논란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미국 월가 시위의 구호가 시사하듯 1% 세상의 특권과 반칙에 대한 저항이 이번 선거 결과에도 반영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이번 보선 자체가 오 전 시장의 무상급식 주민투표 ‘꼼수’ 때문에 치러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울 시민들은 또 다시 특권과 반칙을 일삼는 여권에 준엄한 심판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시에 시민들은 ‘안철수 바람’으로 상징하는 새로운 정치에 대한 갈망과 변화의 기대를 표출했다.

이번 선거 결과가 여권의 행로 등 향후 정국에 미칠 파장은 간단치 않아 보인다. 당장 여권은 집권후 사실상 첫 지원 유세에 나선 박근혜 전 대표의 역할 등을 둘러싼 논란을 비롯해 친이(親李)니, 친박(親朴)이니 하는 계파 간 갈등이 심화될 공산이 커졌다. 승리는 서로의 잘못도 용인할 수 있는 용광로와도 같지만, 패배의 책임은 가급적 상대에게 넘기고 싶어하는 게 권력이 가진 속성이다. 임기 말을 바라보는 이 대통령으로선 대야관계는 물론이고 대내적으로도 국정운영의 동력이 급속히 떨어질 수밖에 없는 정치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셈이다. 보다 충격적인 것은 패배라는 단순한 결과보다 그 내용이 아닐까 한다. 박 후보의 득표율이 20대와 30대는 물론이고 40대에서도 거의 두배 이상 앞선다는 점에서 국정을 책임진 집권당으로서의 존재 이유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처지다. 이대로 가다간 젊은층에 대한 걱정이나 우려를 넘어 공포감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이명박 정권의 각종 정책도 그 영향권에 들 수밖에 없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비롯한 이명박표 정책에 대한 속도 조절은 물론 대폭적인 손질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질 것이다. 전체 국민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서울 시민의 선택은 이명박 정권의 행보에 강한 압박을 줄 것이 자명하다. 당장 ‘디자인 서울’과 ‘한강 르네상스’로 대표되는 서울시의 낭비적 전시행정이 수술대에 오를 것이다. 겉모습의 화려함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삶의 질을 높이는 복지의 제고가 향후 서울시정의 요체로 떠오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권이 이번 패배의 교훈을 뼈아프게 새기지 않는다면 민심을 배반하는 것은 물론이고 레임덕만 가속화시킬 뿐이다.

반대로 지난해 지방선거와 올 4·27 재·보선에서 선보인 야권연대는 이번 선거에서 꽃을 피웠다. 야권이 내년 총선이나 대선에서 모색 중인 야권 통합이나 연대의 실질적인 가능성을 성공적으로 시험한 것이다. 그렇다고 민주당 등 야당들이 마냥 환호작약할 수만은 없는 게 현실이다. 이번 보선은 여야 대결이라기보다 시민정치와 정당정치 간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역대 선거를 통틀어 여야 정당들의 존재감이 이번처럼 왜소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선거전 막판에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도 지적했듯이 현재의 정치 시스템이 유지되려면 정당 정치라는 틀이 존재해야 한다. 문제는 그것을 채울 역량이 부족한 것이 우리 정당 정치의 현실이고, 그것이 바로 범야권의 실상이라는 사실이다. 정당정치의 복원이라는 시급한 과제가 여야를 넘는 정치권에 남겨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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