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31일 월요일

[사설]대통령은 국회가 거수기로밖에 보이지 않나


이글은 경향신문 2011-10-30일자 사설 '대통령은 국회가 거수기로밖에 보이지 않나'를 퍼왔습니다.
정부가 그제 밤 당·정·청 모임에서 한나라당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을 오늘까지 통과시켜 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정부가 10·26 재·보선의 충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여당에 한·미 FTA 비준을 압박하고 나선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민심을 외면한 채 한나라당, 나아가 국회를 거수기로밖에 보지 않음을 새삼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 때문에 어제 오후 국회에서 예정됐던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 토론회도 야당의 반발로 무산됐다. 

정부는 한·미 간 ‘합의에 따라’ 내년 1월1일 발효하려면 준비기간 60일을 감안해 오늘까지 비준안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부는 당·정·청 모임에서도 똑같은 논리를 폈다. 하지만 내년 1월1일 발효는 한·미가 공식적으로 합의한 내용이 아니라 양국 수석대표가 암묵적으로 의견을 모은 것일 뿐이라고 한다. 협정문 24.5조는 ‘양 당사국이 적용가능한 법적 요건 및 절차를 완료하였음을 증명하는 서면통보를 교환한 날부터 60일 후 또는 양 당사국이 합의하는 다른 날에 발효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정부가 수석대표 간의 암묵적 합의를 근거로 내년 1월1일이 마치 시한인 것처럼 국민을 오도하면서 한·미 FTA 비준을 밀어붙이는 행위는 국민을 무시하는 태도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한·미 FTA에 대한 반대여론이 거세지자 정부는 엉뚱하게 노무현 전 대통령을 끌어들였다. 정부는 지난 27일 ‘2006년 2월3일 한·미 FTA 협상 출범 선언’이라는 자막과 함께 “국민 여러분 오로지 경제적 실익을 중심에 놓고 협상을 진행했습니다”라는 노 전 대통령의 육성으로 시작하는 TV 방송광고를 내보내 야당과 노무현재단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한·미 FTA에 관한 한 노무현 정권의 책임은 결코 회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현재 한·미 FTA의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노력은 제대로 하지 않고 자신들의 정적이었던 노 전 대통령을 끌어들인 것은 FTA가 안고 있는 본질적 문제를 호도하려는 저열한 꼼수일 뿐이다. 

한나라당이 10·26 서울시장 보선에서 패배한 가장 큰 이유는 이명박 정부의 실정이다. 바꿔 말해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바로잡지 못하고 무사 통과시켜 주는 거수기 역할을 했기 때문에 한나라당이 진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와 여당은 아직 이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한나라당이 거수기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미래는 어둡다. 제1야당인 민주당은 노무현 정부 때 체결한 FTA는 ‘좋은 FTA’라는 강변에서 벗어나 솔직하게 한·미 FTA의 근본적 문제점을 인정하고 보다 분명한 입장과 단호한 자세로 대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한나라당에 비준 합리화의 빌미를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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