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4일 화요일

박근혜식 말바꾸기, 패턴 분석 해보니


이글은 시사IN 2012-09-04일자 기사 '박근혜식 말바꾸기, 패턴 분석 해보니'를 퍼왔습니다.
박근혜 후보는 원칙을 핵심 브랜드로 내세운다. 정말 그럴까. 주요 발언을 모아 분석해본 결과 통념과 다른 말바꾸기 패턴이 드러났다. 다른 정치적 국면에선 필연적으로 말을 바꾸고 이를 원칙으로 포장한다.

원칙과 신뢰. 새누리당 대선주자로 선출된 박근혜 후보가 내세우는 핵심 브랜드다. 심지어 정치적 견해가 다른 이들로부터도 “박근혜는 적어도 자기가 한 말에는 일관성이 있지 않느냐”라는 평을 듣는다. 

박근혜 후보는 하루이틀 사이에 말바꾸기를 하는 정치인은 분명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메시지를 폭넓게 각인시킬 때까지 반복 강조하는 스타일이다. 이 때문에 그녀의 메시지는 늘 한결같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이런 평판은 진실일까. (시사IN)은 그녀가 국회에 입성한 15대 국회 때부터의 주요 ‘국회’ 발언과, 정치적 거물로 자리 잡은 2004년 총선 이후의 주요 ‘언론’ 발언을 모아 분석해봤다. 그 결과 통념과는 다른 ‘박근혜식 말바꾸기’의 패턴이 확인됐다.  

“세금을 거두어 국가가 해결할 수 있는 복지에는 한계가 있다.”(2005. 4. 8) “과감하게 세금을 낮추어야”(2004. 10. 27)

노무현 정부 내내 박근혜 후보는 비타협적인 강경 감세론자였다. 국회 대표연설에서도 그녀는 법인세·소득세는 물론 특소세·부가세·유류세까지 전방위 감세를 제안했다. ‘작은 정부 큰 시장’을 통한 고성장의 길을 되풀이해 주장하기도 했다. 감세론을 주장할 때 전제나 유보를 다는 경우는 없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까지, 감세를 통한 성장은 잘 먹히는 주장이었다.

ⓒ김흥구

2012년, 박근혜는 증세론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녀의 2012년 출마선언문에는 “복지와 조세의 국민 대타협”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사실상 증세론이다. 2008년 금융위기와 이명박 정부를 거치면서 성장 담론에 대한 여론이 급변했는데, 박근혜 후보는 이런 변화를 성공적으로 따라잡았다.

하지만 박 후보는 이런 ‘변신’의 이유를 제대로 설명한 적이 없다. 지난 7월 당내 경선 과정에서 김문수 후보는 박근혜 후보에게 이 점을 추궁한 적이 있는데, 박 후보의 답은 이랬다. “경제민주화는 2009년 스탠퍼드 대학에서 강연을 할 때부터 거의 같은 내용이었다. 벌써 몇 년 전부터 생각해왔던 것이다.” 

사실이다. 스탠퍼드 연설에서 박근혜 후보는 ‘원칙이 바로 선 자본주의’를 화두로 제시하며 인식의 단절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문서답이다. 이날 연설문은 물론이고 그녀의 역대 발언록 어디에도, 이런 인식 전환의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이미 몇 년 전부터 그렇게 말해왔기 때문에” 이 변신은 설명된 적도 없이 기정사실이 된다. 이제 ‘기정사실’에 문제를 제기하는 쪽이 괜한 시비를 거는 꼴이 된다. 

이는 과거사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를 때도 박 후보가 즐겨 사용하는 전술이다. 정수장학회 문제, 최태민씨 관련 의혹, 장준하 선생 타살 의혹 등이 불거질 때마다 박 후보는 “이미 지난 정권(혹은 경선)에서 검증이 끝난 문제다”라며 비켜가곤 한다. 해소되지 않은 의혹이나 새로 제기된 의혹을 말하는 목소리를 ‘의혹 재탕’으로 낙인찍는다.

“노무현 정부에서 공기업 민영화 방침도 거의 백지화됐는데, 우리가 집권하면 민영화를 추진할 것이다.”(2005. 11. 7)

영국의 대처 수상이 롤모델이라고 밝혀온 박근혜 후보는 대처처럼 확고한 공기업 민영화론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서 공기업 민영화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면서, 박근혜 후보는 인천공항과KTX 민영화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밝히지 않는다. 

이 발언이 나올 당시, 노무현 정부에서 추진하다 백지화한 민영화 대상 중 대표적인 것이 철도였다. 2012년 총선 당시 박근혜 비대위는 KTX 민영화에 대해 언급을 회피했고, 박근혜 후보 본인은 “이런 방식의 철도 민영화에는 반대한다”라는, ‘해석의 여지가 풍부한’ 말로 논란을 우회했다. 총선 이후에도 박 후보는 핵심 현안인 KTX 민영화 찬반 여부를 밝히지 않고 있다. 여론이 공기업 민영화에 비판적인 쪽으로 돌아서자, 박 후보의 ‘민영화 소신’도 더 이상 듣기가 힘들어진 셈이다.


감세·민영화론자, 갑자기 돌변“국가가 공공자금으로 기업을 지배하려는 연기금 사회주의”(2004. 10. 27)

위 발언은 2004년 10월 국회 대표연설에서 나왔다. 2004년의 박 후보는 국민연금 등 연기금이 민간기업 주식을 사들이는 것을 ‘연기금 사회주의’라 부르며 노무현 정부의 ‘좌파적 속성’을 상징하는 것이라 몰아붙였다.

2012년, 박근혜 후보의 최측근인 김재원 의원은 연기금이 보유한 주식의 의결권 행사를 강화하는 법안을 냈다. 친박계 인사들은 이를 ‘경제민주화’의 핵심 법안으로 언급하곤 했다. 연기금의 의결권을 무기 삼아 재벌에 사회적 타협을 압박한다는 구상이다. 주식 투자만으로도 “연기금 사회주의”로 낙인찍었던 2004년 발언과는 괴리가 크다. 박 후보는 올해 8월16일자 (조선일보) 설문조사에서도 연기금 주주권 행사 문제에 ‘중립’으로 답변해 모호한 태도를 유지했다.

“아버지는 매달 기자들과 오찬을 할 정도로 언론에 문을 열었다. 내용이 잘못 알려지면 설명해야지 취재를 막아서는 안 된다.”(2007. 6. 2)

노무현 대통령이 기자실 폐쇄와 개방형 브리핑룸을 들고 나와 주류 언론과 마찰을 겪던 2007년, 박근혜 후보는 언론 관련 발언을 쏟아냈다. 박정희 대통령의 ‘기자단 오찬’ 발언은 대놓고 노무현 대통령을 겨냥한 것이었다. 6월13일에는 “저에 대해 문제가 있으면 제가 설명하고 국민에게 말씀드리는 것이 정도다”라고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박근혜 캠프의 좌장인 홍사덕 당시 선대위원장도 “똑같은 질문을 100번 묻는다면 100번 다 성실하게 답하라는 게 박근혜 후보의 엄격한 지시다”라고 했다.

이보다 한 해 전인 2006년 12월에는 “언론사가 대선주자 인터뷰를 보도하는 것은 국민과 공익을 위한 것이지 자사의 이익이나 대선주자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새누리당의 ‘원톱’이 된 2012년의 박근혜는 언론관이 완전히 달라지다시피 했다. 2007년 대선 경선 이후 박 후보는 개별 언론사 인터뷰를 전폐했다. 종편이 개국한 2011년 11월에 4개 종편과 개별 인터뷰를 한 것이 ‘사건’으로 기사화될 정도였다. 이후 다시 언론 접촉을 극도로 줄였다. 박 후보의 언론기피증은 취재진 사이에서는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가 됐다.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 기간에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박근혜 캠프는 경선 기간 30일 동안 미디어데이를 세 번만 갖겠다고 통보했다. 그나마 대상은 통신사와 종합 일간지로 한정해 주간지·월간지, 온라인 언론 등은 배제했다. “하루에 세 팀씩 몰아서 진행하자”라고 제안해 격한 반발을 샀고, 결국 없던 일이 됐다. 언론을 접촉해야 할 절박함이 없는 ‘원톱’이 되자, 언론관 자체가 달라졌다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 변화다.

“사조직과 금권선거 등을 안 하겠다고 약속을 드렸고 그것을 지켰다.”(2007. 5. 19)

대선 경선이 한창이던 2007년, 박근혜 후보는 사조직을 만들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다고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하지만 2012년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박 후보의 ‘사조직’이 일으킨 사건만 모아 봐도 상당하다. 박 후보가 직면한 최대 위기인 공천 뇌물 사건은, 부산 지역 친박 외곽조직인 ‘포럼부산비전’에서 터져나왔다. 뇌물을 준 것으로 지목되는 현영희 의원과 받았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현기환 전 의원이 모두 포럼부산비전에 속했다. 박근혜 후보는 거의 매년 포럼부산비전을 찾아 축사를 했다.

회원 수 30만명으로 알려진 ‘국민희망포럼’은 박근혜 후보의 조직책인 홍문종 의원과 이성헌 전 의원 등이 핵심으로 활동한다.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의 ‘선진국민연대’와 유사한 핵심 외곽조직이라는 평이 많다.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는 서울희망포럼에서 박근혜 후보 관련 책자를 대회장 주변에서 판매하다가 선관위가 선거법 위반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다. 세종시에서는 세종희망포럼 관계자들이 지역 대학생들을 룸살롱에 데려가 술을 샀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당론을 수정하려면 의원총회를 거쳐야 하고, 당론 변경 전에 개인 의견을 이야기하면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2005. 3. 29)

이 발언은 국가보안법·과거사법·사학법 등 이른바 ‘3대 쟁점 법안(4대 법안에서 언론법 제외)’을 전향적으로 처리하자는 당내 소장파의 주장을 진압하면서 나왔다. 

행정복합도시법 본회의 투표를 앞뒀던 2005년 3월2일에도 박 후보는 “천재지변이 아니고서야 확정된 당론을 번복할 경우 국민들이 앞으로 한나라당의 당론을 어떻게 믿겠느냐”라고 비슷한 말을 했다. 여기까지 보면 박근혜식 원칙주의가 어김없이 관철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완고한 태도는 5년 후에 정반대로 뒤집어진다. “세종시 수정안이 당론으로 확정되더라도 반대한다.” MB가 세종시 수정안을 들고 나와 공세를 펴던 2010년 1월7일, 박근혜는 소속 의원 3분의 2가 찬성해 당론이 바뀐다 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반대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당시 한나라당은 친이계와 친박계가 대략 2대1로 갈라져 있었다. 세종시 수정안은 모든 야당과 여당 내 친박계의 반대에 부딪혀 본회의 통과는 불가능했다. 그 때문에 당 주류였던 친이계는 세종시 수정안을 당론으로 확정해 친박계에게 당론에 따를 것을 요구한다는 전략이었다. 이에 박근혜가 미리 ‘저지선’을 치고 나선 것이 “당론이라도 반대” 발언이다.

5년 전 행정복합도시 논란 때와 상황은 정확히 같았다. 다른 점이라면 박근혜 후보가 당 대표에서 소수파의 수장으로 처지가 바뀌었다는 점 하나다. 하지만 그녀가 ‘당론 원칙주의’를 접어두는 이유로는 충분했다. 

“17대 국회 무정쟁 선언”(2004. 4. 29) “4대 입법을 힘으로 밀어붙인다면 실력 저지라도 할 수밖에 없다.”(2004. 12. 1)

17대 총선 직후 박근혜 후보는 17대 국회 무정쟁 선언을 한다. 민생과 관계없는 문제로 다투지 않겠다는 다짐이 여러 차례 이어졌다. 이는 1년도 못 되어 뒤집어진다. 그해 12월 박근혜는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의 ‘4대 입법’(국가보안법·과거사법·신문법·사학법)에 맞서 끝장투쟁을 선언한다. 정국 경색은 17대 국회 전반기 내내 이어진다. 2005년에도 “박 후보는 당의 모든 힘을 사학법 무효투쟁에 쏟겠다”라며 강경 투쟁을 주도했다.

ⓒ국회사진기자단 2005년 12월9일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사학법 반대 대국민담화문을 낭독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4대 입법이 민생과 상관없다고 비판하던 박근혜 후보는 돌연 민생 경제에 해악을 끼친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박 후보가 ‘민생’이라는 키워드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주목할 만하다. 박 후보는 노무현 정부의 4대 입법을 “먹고사는 문제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이슈라고 규정한다(2004년 10월27일 교섭단체대표연설). 이때는 4대 입법이 민생 이슈가 아니다.

하지만 ‘무정쟁 선언’까지 해놓고 “먹고사는 문제와 아무 상관도 없는” 4대 입법으로 정쟁을 지속한다는 비판에 직면하자, 4대 입법은 돌연 민생 이슈가 된다. 박 후보는 그해 11월28일에 4대 입법과 ‘민생’을 이어 붙였다. “4대 법안이 안보와 민주주의, 민생경제에 얼마나 해악을 끼치는지 알려야 한다.” 이렇게 ‘민생’은 마법의 키워드가 된다. 


2008년 ‘물갈이’ 반대, 2012년은?“물갈이를 한다는데, 밀실정치와 사당화가 있거나 공천에 사심이 개입돼서는 안 된다.”(2008. 1. 10)

박근혜 후보는 4년 전인 2008년 18대 총선에서, 당시 당 주류였던 친이계의 공천 물갈이 방침을 ‘밀실정치’ ‘사당화’ ‘사심 공천’으로 규정했다. 일련의 물갈이 발언에 대해서는 당 대표(당시 강재섭 대표)가 “모욕감을 느껴야 한다”라고 강하게 질타하기도 했다.

2008년 총선에서 ‘물갈이’는 친박계를 정리할 명분으로 이재오·이방호 등 친이계 핵심이 들고 나온 키워드였다. 친이계는 ‘50% 물갈이 합의설’을 흘리며 압박했고, 박근혜는 직접 나서서 “그런 합의를 해줬다는 우리 쪽 사람을 밝히라”고 반박했다(3월13일). 

이어 친이계가 ‘비리 연루자 공천 금지’를 들고 나왔지만, 박근혜 후보의 저항은 여전히 완강했다. 1월31일 박 후보는 “그런 규정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 적용 기준 자체가 모호하다”라고 말했다.

4년 후인 2012년, 상황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당을 장악한 박근혜 후보의 공천 대표상품은 이른바 ‘25% 룰’이었다. 물갈이를 ‘밀실정치’ ‘사당화’ ‘사심 공천’으로 규정했던 박 후보는, 4년 만에 물갈이의 ‘커트라인’까지 제시하며 한 발 더 나갔다. 박근혜 비대위는 또 비리 연루자는 애초에 공천에서 배제한다는, 4년 전 “적용 기준 자체가 모호하다”라고 했던 원칙을 고스란히 되살렸다.

“내가 질문받기 전에 먼저 아버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느냐.”(2004. 7. 20) 

박근혜 후보는 자신이 아버지의 후광을 이용한 적이 없다고 되풀이해 주장한다. 과거를 자꾸 물어보기 때문에 답할 뿐 먼저 언급한 적은 없다는 것이다. 5·16 쿠데타 관련 발언 등이 논란이 된 최근에는 “언제까지 과거만 말할 것이냐. 미래를 이야기하자”라는 반론을 즐겨 사용한다.

“제가 누구의 딸입니까? 저는 어릴 때부터 대통령이 어떻게 해야 경제를 살릴 수 있는지 직접 보며 자랐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아버지 못지않게 제2의 한강의 기적을 만들겠습니다.” 이명박 후보와 경선이 한창이던 2007년 8월6일 경남 창원 합동연설회 발언이다. 후보 연설이니만큼, 따로 질문한 사람은 없었다.

“대통령이 헌법에 대해 도발하고 체제를 부정한다면 나라는 근본부터 흔들리고 말 것.”(2004. 10. 27)

2004년 국회 대표연설에서 나온,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정면 비판이다. 당시는 노 대통령이 수도 이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에 불만을 내비칠 때다. 박 후보는 헌법을 존중할 것을 강하게 주문했다.

8년 뒤 박근혜 후보는 정확히 같은 요구에 직면했다. ‘5·16 혁명’이라는 표현을 전문에서 삭제한 1987년 헌법정신을 존중하느냐는 질문을 수차례 받았다. 하지만 박 후보의 대답은 “과거에 머물지 말고 미래를 이야기하자” 정도가 고작이었다. 헌법정신에 대한 제대로 된 대답은 없었다. 박근혜식으로 말하면, “대통령 후보가 헌법정신을 존중하지 않아 나라가 근본부터 흔들릴 일”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상황이다. 

국면에 따라 늘 ‘최적의 위치’ 찾아

‘박근혜식 말바꾸기’는 일반적 정치인의 말바꾸기와는 성격이 판이하다. 보통의 말바꾸기가 메시지 관리 실패의 산물이라면, 박근혜식 말바꾸기는 메시지 전략 성공의 결과물이다.

그녀 특유의 말바꾸기 패턴은 이렇다. 첫째, 단기간의 메시지는 매우 일관성이 높지만, 장기간을 놓고 보면 메시지가 자주 모순되고 충돌한다. 이는 정치적 국면에 따라 늘 ‘최적의 위치’를 찾아가는 그녀의 성공적인 정치 감각 때문인데, 그 결과 서로 다른 정치적 국면을 비교해 보면 거의 필연적으로 말바꾸기가 발생한다. ‘성공의 역설’이다. 

둘째, 그녀는 이런 ‘변신’의 이유를 절대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일정 시점에서 자신의 달라진 포지션을 이미 기정사실로 간주해버린다. 말바꾸기 이전의 기존 지지층을 설득해야 한다는 부담과 말바꾸기에 따른 정치적 부담을 정면으로 감당하기보다는 성공적으로 회피한다. 그녀는 자신의 ‘변신’이 지적·정치적 각성이나 숙성의 산물이라고 볼 근거를 한 번도 제시한 적이 없는 셈이다. 이는 ‘원칙과 신뢰’라는 박근혜 브랜드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셋째, 포지션은 정반대여도 포장하는 메시지는 같다. 그녀가 다수파일 때 말하는 ‘원칙’과 소수파일 때 말하는 ‘원칙’은 전혀 다른 의미를 담는다. 하지만 어쨌거나 드러나는 메시지 자체는 달라지지 않는다. 세종시 당론에 대한 그녀의 ‘원칙’이 2004년과 2010년에 어떻게 바뀌는지를 보면 이는 단적으로 드러난다. 2008년과 2012년을 비교하면, ‘공천의 원칙’도 의미가 정반대로 바뀌었다. 덕분에 박 후보는 내용상완전히 반대되는 주장을 하고도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과거에 어떤 정치를 해왔는지를 보는 것은 그 정치인의 미래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잣대다.” 이 말대로라면, 박근혜 후보가 과거에 어떤 정치 궤적을 남겼는지 돌아보면 그녀의 미래도 알 수 있다.

저 말 역시 박근혜 후보가 2007년에 한 말이다. 박근혜 후보는 다른 어떤 질문보다도 먼저, 과거의 자신이 현재의 자신에게 한 수많은 질문에 답해야 할 듯하다.

천관율 기자 |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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