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8일 금요일

박정희 '권력 욕심 잘못' 빠진 게 문제다


이글은 프레시안 2012-09-28일자 기사 '박정희 '권력 욕심 잘못' 빠진 게 문제다'를 퍼왔습니다.
[오홍근의 '그레샴 법칙의 나라'](72)박근혜 지지율 왜 계속 흔들리나?

'사과'한 후에도 지지율이 빠지고 있다. 그게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의 고민이요, 괴로움이다. 수년 동안 지지율 선두자리를 놓치지 않았고, '자랑스런' 아버지의 후광이 줄곧 그녀를 굳게 뒷받침 해주는 듯했다. 조중동과 거의 모든 TV등 언론의 절대적인 지원까지 받고 있었다. 그래서 "5·16은 구국의 혁명이요,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며, "유신도 국민과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는 입장을 고집스럽게 밀고 여기까지 왔다.

급기야 "하나의 사건을 놓고 재판결과가 두 개"라는 터무니없는 이야기까지 했다. 인혁당 사건에 대한 '견해'를 말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그랬다. 괜찮을 줄 알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리고는 기울기 시작했다. 조선일보가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영웅 만든 박정희 씨도 그렇게 함께 기울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람들이 인혁당 사건에 대해 전모를 알아가면서 느끼는 분노는 생각보다 큰 것 같다.

양자 대결에서 그녀는 안철수·문재인 두 사람 모두에게 밀리는 조사결과가 나오기 시작했고, 다자 대결에서도 2위와의 차이가 좁혀졌다. 일찍이 불행한 사건으로 부모를 잃고 결혼도 안한 일생을 살아온 그녀였다. 일부에서 독재자라 말하는 아버지를 복권시키기 위해, 정치를 시작했다는(대변인으로 내정됐다 자진사퇴한 김재원 의원의 말) 그녀로서는, '사과'라는 내키지 않는 절차를 통해, 아버지를 '깎아 내리기'도 참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사과했는데도 지지율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게 문제다.

역시 문제는 사과가 자발성(自發性) 없는 타발적(他發的)이라는 데 있어 보인다. 사과라는 카드를 꺼내든 것부터가 본인이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진심이 담겼을 리 없다. 진정성이 없으니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리 없다. 사람들이 박 후보의 그런 속내를 모를 리 없다.

▲ 과거사 관련 사과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박근혜 후보 ⓒ연합뉴스

사람들은 대부분 엎드려 절 받는 것 좋아하지 않는다. 처삼촌 묘 벌초하듯 하는 거 좋은 모양새도 아니다. 전체 국민들에 대한 죄송스러움이나 송구스러움 표시도 없었다. 게다가 박근혜 후보의 기자회견문을 찬찬히 읽어보면 문제의 핵심을 일부러 회피해 간 듯한 느낌까지 주고 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는 경제발전과 국가안보라는 시급한 국가목표, 다시 말해서 국민을 잘 살게 하고야 말겠다는 간절한 목표가 있었다"고 강조했다. 그 경제발전 이면에 노동자들의 희생이 있었고, 안보를 지켜내느라고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가 있었다고 했다. 그 때문에 5·16, 유신, 인혁당 사건 같은 헌법가치 훼손과 정치발전 지연이라는 결과가 (불가피하게) 빚어졌고 그걸 사과한다고 했다.

그러나 사과 대상에서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될 대목이 있었다. 여러 사과 대상 가운데 그냥 포함될 수도 있고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런 '하나'가 빠진 게 아니다. 고의인지 고의가 아닌지는 알 수 없어도, 가장 핵심이 되는 '잘못'이 빠져 있다. 그것이 국민들을 허전하게 하고 껄적지근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말이 분명한 표현으로 반드시 들어갔어야 했다. "게다가 아버지에게는 사리사욕이 있었고 특히 장기집권 욕심이 넘쳐 났습니다." 힘들었겠지만 그 말이 필요했다. 너무 심하다거나 사실이 아니라고 항변 할 수도 있겠으나, 그랬다면 박근혜 후보의 지지율은 지금과는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따져보면 답은 금방 나온다.

박정희 '정'과 육영수의 '수'자가 합쳐 이름 지어진 정수장학회는 왜 어떤 과정을 거쳐 생겨났는가. 부산일보는 어떤 역사 속에서 오늘에 이르렀고 왜 편집국장은 지금 쫓겨나 있는가. 독립 운동가들이 세웠다가 정부에 헌납당한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은 어떻게 해서 정부 아닌 대통령 개인의 소유가 되어 영남대학이라는 이름을 달았는가.

이것들의 소유권 이전과정이 '박정희 씨의 시급한 국가목표'였던 경제발전과 국가안보와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국민을 잘 살게 하고야 말겠다던 박정희 씨의 간절한 목표'와는 무슨 연관성이 있는가. 박정희 씨는 5·16 쿠데타 직후 "(반드시) 군 본연의 임무에 복귀하겠다"고 약속했다. 얼마 뒤 "3선개헌 않겠다"고 약속했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때는 "다시는 나를 대통령으로 뽑아 달라고 이야기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다시는 나와 같은 불행한 군인이 없어야 한다"며 본연의 임무에 복귀하지 않았다. 1969년엔 일요일 새벽 2시 '환장(換場)해서' 국회별관으로 옮겨 3선개헌 안을 통과 시켰다. 1972년엔 유신헌법을 만들어 영구집권의 길을 텄다. 유신헌법에 의한 체육관 간접선거였으므로 국민에게 "나를 대통령으로 뽑아 달라"고 직접 말하지는 않은 셈이었다.

중앙정보부가 유신을 반대한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를 타살한 사건이 국민을 잘 살게 하기위한 것 아니었다. 고려대학교에 휴교령 내리며 탱크 밀어 넣은 긴급조치 7호나 9호에, 4호인 인혁당 사건조차도 경제발전이나 국가안보와는 관계없는 사건이었다. 국민을 하늘처럼 떠받들며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줘야 할 공인(公人) 가운데 공인이요, 머슴 가운데 상머슴인 대통령으로서의 할 일과 몸가짐을 이야기 하는 중이다.

박근혜 후보는 박정희 씨 개인의 '사리사욕'과 '장기집권 욕심' 때문에 빚어진 참혹한 사태였음을 분명하게, 알기 쉽게 큰 목소리로 사과 했어야 했다. 물론 박 후보의 이번 사과는 국민들의 지지율 하락에서 비롯됐으나, 사과 그 자체만으로도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잡았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5·16과 유신과 인혁당 사건에 대해, 이른바 보수정당인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가 분명하게 견해를 밝히며 성격을 규정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바로 "5·16과 유신과 인혁당 사건은 헌법가치를 훼손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대목이다. 그동안 5·16이나 유신 등에 대한 비판은 '좌빨들이나 하는 짓거리' 쯤으로 알고, 억지를 부리던 일부 인사들에게도 분명한 '교범(敎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일부 군부대에서 실시 중이던 '종북세력 실체 인식평가'같은 코미디 같은 짓도 사라질 것이다. 진급과 휴가에도 반영되는 그 시험문제는, 유신체제하에서의 유신반대 운동이 종북세력 확산을 기도한 것처럼 출제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 짓하면 안 된다.

박정희 씨 같은 남로당 전력이 전혀 없는데도, 5·16이나 유신을 비판했다하여 오히려 빨갱이로 낙인찍힌 인사들, 예컨대 김대중·노무현 씨도 '오해'가 풀리는 효과를 기대해 본다.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씨는 한국의 안전보장과 관련해, 미·일·중·소 4대국 보장론을 설파한다. 박정희 씨는 이때 언론 총 동원령을 내리는 등 거국적으로 김 씨를 빨갱이라 몰아붙인다. 그러나 그때의 4대국 보장론은 지금 남북한을 포함한 6자회담이 되어있다.

박근혜 후보는 1989년 한 TV와의 인터뷰에서, 5·16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북한의 밥'이 되었다고 강변했다. 박근혜 후보의 팬 카페인 '근혜동산'에는 유신이 우리국민 900만 명의 목숨을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구했다는 이야기가 적혀있다. 다 '반공장사'들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행태들이다. 그런 짓거리 하지 말아야 할 때가 되었다.

유신 전후해서 박정희 정권은 2차례나 '유신결행'을 김일성에게 통보해 준다. 그리고는 그해 1972년 12월 김일성도 주석제를 도입하고 그 자리에 앉는다. 적대적 의존관계요, 짜고 친 고스톱이었다. 물론 그때 900만 명이 죽을 수 있는 그런 상황도 아니었다. 참고로 6·25의 참화 속에서 우리국민 사상자가 300만 명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900만 명은 나가도 너무 나갔다.

이 나라에는 오래전부터 반공하는 권리를 신주 단지처럼 모시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빨갱이 제조공장'을 차리고 '빨갱이 생산권'도 쥐고 있다. '빨갱이 딱지 부착권'도 물론 그들에게 있다. 내용적으로 빨갱이 인지 여부는 중요치 않다. 그저 자기편 아니면 그냥 낙인 찍혀 빨갱이가 되는 수밖에 없다.

박근혜 후보가 대선결과와 상관없이 이번 사과를 계기로, 그런 행태 바로 잡는데 기여한다면, 그녀는 역사에 기록되는 인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그런 분야에서만이라도 모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다.

 /오홍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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