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16일 일요일

겁쟁이 MBC


이글은 한겨레21 2012-09-17일자 제928호 기사 '겁쟁이 MBC'를 퍼왔습니다.
[기획 연재] 릴레이기고3- 정상화를 위한 릴레이 기고 3- 겁에 질려 작가들까지 ‘청소’한 이 시대의 집단 참주는 현실을 직면하시라

정성주 드라마작가·(아줌마) (아내의 자격)

“쌤, 이거 진짜 후져요. 작가들 싹 다 청소해버렸대요!” 함께 일하는 젊은 친구들이 숨이 턱에 차서 전해주는 소식에 기사를 봤다. 그리고 이틀 뒤, ‘ 작가 전원 해고’에 항의하는 작가들의 시위에 나온 후배 이정혜의 사진을 봤다. 22년 전, 이정혜는 갓 100일 된 둘째아이를 두고 나와 의 첫 회를 준비했다. 그는 KBS의 다큐멘터리와 등 탐사 프로그램, 종합 구성 프로그램 시대를 연 작가들 중 하나로, 전무후무한 괴력의 여인이다. 두 아이를 시간제 도우미 아주머니한테 맡긴 그 사정을 누가 봐주나. 그러니 괴력을 발휘할 수밖에. 이정혜는 과연 언제 잘까 싶었다. 사진 속 이정혜 곁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는 젊은이가 22년 전 100일이던 딸 이승현이다.

100일 된 아기가 저만큼 클 동안

이 모녀를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그간의 세월이 한심해서다. 100일 된 아기가 저만큼 클 동안, 이 바닥도 웬만큼 컸어야 하지 않나. 드라마나 코미디가 아닌 프로그램에도 작가가 있다는 걸 이해하게끔 설명하는 데 한참이 걸리고, PD들조차 ‘교양프로의 작가란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고 눈먼 돈 집어가는 사람들 아니냐’는 말을 내뱉던 미개한 시절을 지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작가들은 참으로 많은 일을 겪으며 방송의 한 축을 담당해왔다.
물론 방송작가란 언제든 잘릴 수 있는 직종이다. 대본이 늦게 나오거나 방송에 차질을 초래한다면 잘려 마땅하다. 그런데 이번에 해고된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그런 중대 사유가 도무지 없다. 해고 작가 중 한 명은 행여 에 누가 될까봐 은행 대출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무책임하지도 게으르지도 않았고 심지어 유능하기까지 했는데 왜 불시에 청소를 당했나 싶어 그간의 전말을 살펴보니, 시사교양 국장이, MBC 경영진이, 이들을 정말 꾸준히 미워한 것이 분명하다. 그 작가들, 노조 파업에 동조하고 해고 및 전보 발령된 PD들과 같은 무리다. 성분이 고약하다. 당연히 밉겠지.
문제는 그 미움이, 단순한 미움이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데 있다. 결정권자의 두려움은 시대의 한 불길한 징후로서 민주주의의 탈을 쓴 참주정의 예고란다. 힘을 잃을까 두려워 비판을 수용하지 못하고 그 두려움에 의해 판단하고 결정하곤 한단다. 시사교양 국장을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께서는 이라는 프로에 겁먹은 나머지 작가들까지 ‘청소’한 이 시대의 집단 참주다.
920명의 구성작가들이 대체 작가 거부를 결의했고 이렇게 가다간 10월 방송도 불투명하다는데, 경영진 중 한 명은 작가협회를 방문해 도와달라고 했단다. 복직도 안 되고 사과도 할 수 없지만 ‘이제 그만 화를 푸시라’고 했다. 딱한 노릇이다. MBC는 그렇듯 겁쟁이 참주 체제로 퇴행했다. 아테네 내전 당시 저항군들이 ‘우리가 함께 누리고 살아온 이 도시를, 우리가 꽃피운 모든 것을 배반하지 말자’고 했을 때 30명의 참주들은 폭정을 끝내기로 결단을 내렸지만, 작금의 그들은 좋은 방송을 함께 누려본 경험이 없으니 작가들의 결의를 절대 이해 못할 것이다.

좋은 방송을 함께 누려본 경험이 없으니

많은 사람들이 이 싸움에서 작가들이 이길 수 없다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 멀쩡히 계약된 상태로 일하다가 생계와 자존과 이상이 동시에 짓밟힌 작가들은 결의로 뭉쳤고 그쪽은 칼을 쥐고는 있으나 전열이 불안하다. 언제 바뀔지 모르는 그들의 주군은 애초부터 아테네의 주인, 방송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디 이번 기회에 간도 키우시고 판도 크게 보시라.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길은 본질과 직면하는 것이다.

정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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