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16일 일요일

폭력의 산업화, 용역


이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09-12일자 제48호 기사 '폭력의 산업화, 용역'을 퍼왔습니다.

직장을 폐쇄한 만도공장 정문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용역. <한겨레>

최근 경기도 안산의 자동차부품업체 SJM에서 벌어진 용역폭력 사건이 사회를 뒤흔들었다. 경비업체를 감독·관할하는 김기용 경찰청장은 지난해 유성기업 폭력사태가 터진 지 1년도 안 돼 재발한 용역폭력 사건에 유감을 표하고, 전담반을 꾸려 강도 높게 단속하기로 했다. SJM 사 쪽과 용역경비업체 컨택터스는 노조원에 대한 폭력진압을 사전에 모의한 것으로 드러나 관련자들이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현장에서 부실 대응한 경찰관들에겐 징계 절차도 진행 중이다. 정치권도 나섰다. 민주통합당은 진상조사단까지 꾸렸다. 컨택터스는 서울과 경기 법인의 경비업이 허가 취소됐다. 겉으로는 이번 사태가 마무리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뭔가 허전하다. 앞으로 다시는 용역폭력사태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는 사람도 드물다. 자본의 힘으로 폭력을 고용하는 행태는 단순한 처벌과 법령 강화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경찰은 유성기업 용역폭력 사태 재발 방지를 위해 '용역폭력 재발방지 종합대책'을 내놓기도 했다. 뭔가 근본적인 처방이 없다면 재발은 단지 시간 문제일 것이다.

용역과 경비의 차이

우선, 용어의 통일이 필요하다. 언론에서는 경비와 용역을 혼돈해 사용하고 있다. 정확한 용어는 '경비'다. 관련 법도 '경비업법'이다. 경비업체들이 관계법을 준수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경비원들이 선량한 시민을 폭행하는 사태는 법으로 규정한 '보호와 방어'라는 경비의 테두리가 아닌, 인간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용역의 테두리 안에서 벌어진다(그것이 불법일지라도!).
경비원은 법으로 자격 요건을 엄격히 규정했다. 관련 법과 인권 보호 등의 내용이 담긴 28시간의 교육과정을 이수해야 경비원 자격이 주어지고, 한 달에 4시간씩 소양교육을 추가로 받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정체불명의 복면을 쓴 용역들이 나타나 폭력을 행사하고 사라진다. 그래서 이 글에서 다루는 경비원들의 폭력 행위는 마땅히 용역 차원으로 바라봐야 하고, 선량한 경비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불법적 경비 활동을 포함한 '용역'이라는 용어로 통일하는 것이 옳다.
용역의 역사는 길다. 원시인들의 '자경주의'(Vigilantism)도 엄밀한 의미에서 용역의 범주 안에 속한다. 모두가 빈곤했던 자급자족 시대에는 별다른 보호 활동이 필요 없다. 훔쳐갈 '무언가'가 생기기 시작할 때쯤 자신들이 수확한 농산물과 가축을 지키기 위한 '누군가'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국가의 틀이 잡혀가면서 용역의 역할은 더욱 커진다. 이른바 권력자들을 위한 '사병'의 역할을 한 것이다. 지방 호족이나 중앙의 세도가들은 자신의 부와 권력을 지키기 위한 사병을 고용한다. 중앙집권화를 꿈꾸던 왕에게 사병은 골칫거리였다. 조선 건국 직후 사병을 없애기 위해 의흥삼군부를 설치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병 조직은 만만하지 않았다.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조선 초기 '왕자의 난'도 중앙에서 미처 컨트롤하지 못한 사병을 동원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병을 통해 집권한 이방원은 자신이 집권한 뒤 사병을 혁파하기 시작한다. 시대가 흐를수록 사병은 노비를 중심으로 한 소극적 경비 형태로 축소된다. 바꿔 말하면 역사의 발전 과정은 권력을 이양받은 자의 '지엄한 명령' 하나로 움직이는 중앙집권화한 공권력이 얼마나 체계화됐느냐로 판단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용역이라는 형태가 자리잡은 것은 한국전쟁 직후다. 미군과 미국 회사의 시설을 보호하기 위한 사설 경비원인 셈이다. 1953년 '용진보안공사'라는 회사가 군납 형태로 용역 업무를 제공한 것이 최초의 근대적 용역업체 기록이다. 이후 대부분의 용역은 미군을 중심으로 한 시설 경비에 집중 투입됐다. 본격적인 산업화 단계에 접어든 1960년대에는 석유 시설 등 산업화 시설의 경비를 위한 업체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인 민간경비 시대로 접어들었다.
원시인들의 초보적 자경주의부터 산업 시설을 관리하는 민간경비에 이르기까지 용역 형태는 계속 발전을 거듭해왔다. 하지만 공통점은 있다. 용역을 구입하는 것은 지배층(또는 부유층)이고, 용역은 철저하게 돈과 권력의 주문에 의해 움직인다. 이번 SJM 사건도 이런 맥락에선 전혀 다른 점이 없다. 용역을 구매하는 쪽은 자본가이고, 불법적 폭력을 써서라도 구매자의 요구에 응하는 쪽은 용역이었다. 이들은 SJM 공장에서 사실상 사병의 역할을 했다.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이 부분에 대해선 경찰 조사 중이다) 폭력을 행사했다. 경비업법에 의하면 공격적 행위는 절대 할 수 없음에도, 법을 넘어선 무언가가 이들을 움직인 것이다. 무인 순찰헬기와 히틀러가 기르던 순찰견에 물대포까지 보유하고, 수천 명의 용역을 투입할 수 있다고 광고한 컨택터스는 군대와 유사했다. 민간 군사업체인 셈이다. 외국 경우는 더 심각하다. 미국의 민간 군사업체 블랙워터는 나라 간의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 이미 사병의 수준은 넘어 민간 복합군수업체로 발전해나가고 있다.
이 부분에서 역사의 아이러니가 또 발견된다. 앞서 살펴보았듯, 역사는 사병의 혁파와 공권력의 조직화 과정으로 발전한다. 그럼에도 현대 들어(정확히 말하면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사병이 다시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역사의 퇴보일까? 한국은 MB 정부 들어 무려 700여 개 용역업체가 늘어났다. 물 만난 고기처럼.

자본가의 손에서 부활한 봉건 용역

용역은 자본가의 입맛에만 맞는 게 아니다. 국가 처지에선 '안성맞춤' 서비스를 제공한다. 여러 갈등의 현장에서 이른바 '손 안 대고 코 풀기'가 가능하다. 경찰이 계속해서 용역폭력 현장에 대해 소극적 자세로 일관한 것은 용역이 투입되는 공간이 이른바 '사적 공간'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시대, 그리고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러 사적 공간 안에서의 자유는 방만할 정도로 보장되기 시작한다. 자본가는 공권력의 투입을 적절하게 통제한다. 경찰 처지에서 봐도 사적 공간에 경찰을 투입해봤자 나중에 법적 문제가 생기면 골치만 아프다.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라는 자유주의적 대전제 아래서 경찰들은 책임을 회피한다.
이런 역사적 퇴보는 위르겐 하버마스가 말한 '재봉건화 현상'(Re-feudalism)을 떠오르게 한다. 말 그대로 근대를 지향하면서 발전해온 인류의 역사가 다시 봉건주의로 퇴보한다는 것이다. 봉건시대를 상상해보자. 왕은 말 그대로 허수아비다. 지역의 봉건 토호들은 사병을 조직하면서 중앙권력을 차단하고 온갖 권력을 행사한다. 왕은 방임의 선에서 권력행사를 그친다. 중앙권력이 침범하지 못하는 봉건 영토 공간은 '짐이 곧 국가'라는 절대국가의 축소판 모델인 셈이다.
물론, 한국 사회 전체가 재봉건화 현상에 젖어 있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특정한 공간(특히 노조쟁의 현장이 일어난 공장) 안에서는 재봉건화 현상이 충분히 진행되고 있다. 경찰은 팔짱을 끼고 있고, 그 안에서는 무자비한 살육이 벌어진다. 자본가(공장 안에서의 봉건영주)는 용역업체를 선정하고 사전에 폭력 진압을 모의하며 '돈'을 지불한다. 용역업체는 무법 지대가 된 사적 공간 안에서 자본가의 주문대로 일을 '처리'한다.
지난 8월 14일, 민주당 주도로 국회에서 '용역폭력 피해사례 보고대회 및 경비업법 개정 토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토론자들은 현행 경비업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개선 방안을 모색했다. 발표자로 나선 김남근 변호사는 해외 사례를 들었다. 대통령이 줄기차게 외치는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 기준에서 보면 이번 SJM 폭력사건은 일어날 수 없는 범죄였다.
우리 경비업법이 많은 부분을 참고한 일본 경비업법의 경우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더라도 조직폭력배 같은 불법행위를 할 우려가 있는 사람이라면 경비원 취업이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개인이나 단체의 정당한 활동을 방해해선 안 된다는 조항도 명확하게 규정돼 있다.
미국은 아예 경비원 면허제를 도입하고 있다. 업무 수행 중엔 항상 면허증을 지니고 있어야 하고, 자신의 임무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할 경우 바로 면허가 취소된다. 잘못하면 생업이 끊기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경비원 투입 전 '수박 겉 핥기 식' 교육 정도만 거치는 우리나라와는 질적으로 다른 자율규제를 유도하는 것이다.
독일은 제3자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경비업체가 책임보험에 가입하는 것을 의무화했다. 교육도 학급당 인원을 20명으로 제한해 질 높은 교육을 보장받게 했다.
프랑스는 경비 업무의 구체적 활동 사항까지 세세히 규정했다. 가방 검사는 보는 것만 가능하고, 몸 수색은 경찰관의 통제 아래서만 가능하다.

쟁의 현장의 공적 정의가 필요하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해외 사례뿐 아니라, 현행 경비업법의 구체적 개정안이 제시됐다. 경비원 배치 신고제를 허가제로 바꿔야 한다는 안에서부터, 불법을 저지른 업체에 대한 행정처분과 형사처벌 수위를 높이는 안까지 제시됐다. 시설주의 책임을 강화하는 안도 나왔다. 경비업체 허가 기준을 높여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법에는 허점이 있기 마련이다. 또 아무리 법을 개정해도 현재와 같은 경찰과 경비업자, 그리고 시설주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실효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최근 학계·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노동쟁의가 일어나는 노동현장을 '사적 영역'이 아닌 '공적 영역'으로 봐야 한다는 근본적 인식 개선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노동쟁의 현장에 대한 일종의 '사회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자는 것이다.
현재 사업주는 '내가 소유한 시설에서 사람들을 몰아내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인식한다. 경찰은 '사적 영역에 간섭할 수 없다'며 소극적 자세로 일관한다. 경비업체는 '공권력이 신경 쓰지 않으니' 마음껏 활개를 친다.
서울 명동 거리 한복판에서 용역들이 시민을 폭행할 수 없는 것은 명동 거리가 시민의 공동 소유 공간이며, 공권력이 언제든 개입할 수 있는 공적 영역이기 때문이다. 노동쟁의 현장도 이같은 논리로 접근하면 근본적으로 용역폭력이 개입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다신인권센터의 박진 활동가는 "공장이란 공간은 기업만의 공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노동자가 없는 공장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노동 제공자와 자본 제공자가 공동으로 소유한 개념으로 봐야 한다"고 인식 전환을 주문했다.
노동권이 관계돼 있기 때문에 당연히 공적 영역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공익법무법인 공감의 윤지영 변호사는 "노동쟁의 현장을 마치 집안 일처럼 사적 공간으로 축소하려는 인식이, 용역이 폭력을 행사하고 경찰들이 방관을 낳는 근본 원인"이라며 "노동권에 대해 회사가 폭력을 사용해 진압하는 행위는 당연히 공적 영역 내에서 벌어진 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쟁의 현장에선 확대된 소유권 개념을 적용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이계수 교수(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는 "헌법에서 말하는 재산권의 정신은 타인을 배제하는 민법상의 소유권보다 훨씬 넓은 의미"라며 "노동현장에서의 소유권은 민법이 아닌 사회법적 인식으로 바라보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즉 사업주가 쫓아낼 권리만 행사할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함부로 쫓겨나지 않을 권리까지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논란은 있다. 사적 영역에 개입하는 공권력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바람직한지, 아니면 공권력의 범위를 계속 축소시켜 시민들이 자유롭게 참가하는 공론의 영역을 통한 자율 규제가 바람직한지 말이다.
하지만 이 논란은 시민이 정의로운 물리력이라고 인정해, 자신의 권력을 이양한 정당한 공권력에 의해 시민이 외부의 정당하지 못한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았을 때 성립되는 것이다. 지금처럼 공권력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공권력 행사 범위 논란은 되레 논점을 호도할 수 있다.
실제 경찰이 사적 영역을 대하는 잣대는 이중적이다. 최근 경찰은 각종 강력범죄가 생기자 112 신고를 받은 경우 집주인 허락 없이 집을 수사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른바 영장주의를 정면으로 무시한 경찰력 확대를 꾀하는 것이다. 이런 경찰이 유독 자본가의 공간에는 개입을 꺼린다. 현 정부 들어 용역폭력이 시도된 발레오만도, 한국쓰리엠, KEC, 유성기업, 그리고 최근 SJM까지 경찰은 '사적 영역'이라며 개입을 거부했다. 경찰마저 오락가락한 상황에서 웃음짓고 있는 것은, 용역폭력 사건이 일어나도 여태껏 단 한 차례도 사법 처리를 받은 적 없는 자본가들일 것이다.

글/이정국 (한겨레) 사회부 24시팀 기자. 서강대 언론대학원 졸. 2012 언론인권상 본상, 제261회 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을 받았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