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2일 토요일

진실 말했다고 기자 고소하는 나라, 또 있을까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09-22일자 기사 '진실 말했다고 기자 고소하는 나라, 또 있을까'를 퍼왔습니다.
명예훼손 형사처벌 폐지 추세… 장자연 리스트, 안기부 X파일 등 “의혹 보도 못하면 권력 감시 어떻게 하나”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문제가 불거진 지난 4월 언론노조 YTN지부(지부장 김종욱·YTN 노조)는 한건의 문건을 폭로했다. YTN 주요 간부들이 민간인 불법사찰 증거 인멸이 이뤄지던 시기(2010년 7월)를 전후해 원충연 전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점검 1팀 조사관과 여러 차례 통화한 내역이 담겨 있는 검찰의 수사기록이었다.
YTN 노조가 YTN 주요 간부들이 불법사찰과 증거 인멸에 조직적으로 공모했을 가능성을 제기하자 많은 언론이 이를 보도했다. 그러자 해당 간부 중 일부는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기자 6명을 형사고소하고 4개 언론사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이런 기류와 달리 참여연대 공익법센터(소장 박경신 고려대 교수)가 지난 4일 국회에 형법상 모욕죄와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폐지 등을 담은 형법개정 입법청원안을 제출했다. 특히 대선을 앞두고 이명박 정부 내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비판을 받아온 형법상 명예훼손죄 규정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참여연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 입법청원=형법 307조 1항에 따르면 사실을 적시해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벌금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307조 2항은 허위 사실을 적시했을 경우 처벌 조항을 담고 있다.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 규정은 언론사 기자가 허위가 아닌 사실을 기사화해도 기소되는 근거조항이 됐다.
실제 검찰은 지난 7월 배석규 YTN 사장이 폭우로 직원들이 비상근무에 들어간 평일에 골프를 쳤다는 이른바 ‘황제골프’를 보도한 미디어오늘 기자에게 징역 8개월을 구형했다. 애초 이 사건은 배석규 사장이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사건이었으나 검찰과 경찰 조사과정에서 기사에 적시된 내용이 사실로 밝혀졌다. 그랬더니 검찰이 허위사실 적시가 아닌 사실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기자를 기소한 것이다.
참여연대는 지난 4일 △형법 307조 1항의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 폐지 △형법 307조 2항의 허위사실에 의한 명예훼손의 경우 공직자의 직무에 관한 내용 제외 △명예훼손죄를 본인의 고소가 있어야 수사에 들어갈 수 있는 ‘친고죄’로 변경 △형법 311조 모욕죄 폐지 등을 담은 형법개정안을 입법청원했다. 참여연대는 “진실한 사실을 적시한 표현에 대해서도 명예훼손으로 처벌하는 법조항 때문에 국가정책에 대한 비판이나 위법적인 행위에 대한 의견 제시, 정치적 풍자나 비평, 패러디나 기사화 논평 또는 사설마저 명예훼손죄로 처벌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박영선 의원, 6월 형법개정안 대표발의=국회에서도 지난 6월 비슷한 내용의 형법개정안이 발의됐다. 국회 법사위 소속인 박영선 민주통합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형법개정안에 따르면 참여연대 입법청원안과 마찬가지로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처벌 조항을 삭제하고,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허위 사실임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요건을 추가했다. 또한 공공의 이익을 주된 목적으로 하거나 상대방이 공인일 경우, 사회 여론형성에 기여하는 경우에는 명예훼손죄로 처벌하지 않도록 했다.
현행법상 명예훼손죄는 ‘반의사불벌죄’다. 피해당사자가 원치 않으면 처벌할 수 없지만, 고소를 하지 않더라도 수사기관이 독자적 수사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이 때문에 이 조항은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검찰이 정치적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참여연대는 형법개정 입법청원안을 제출하면서 명예훼손죄를 친고죄로 변경하는 내용을 넣었다. 박영선 의원이 대표발의한 형법개정안에도 이런 내용이 포함됐다.

▷PD수첩 제작진에서 정봉주 전 의원까지=언론의 보도를 형사상 명예훼손으로 처벌하려고 했던 대표적인 사례는 MBC (PD수첩) ‘광우병’ 편 제작진을 기소한 사건이다. 검찰은 이 보도로 제작진이 허위사실을 적시해 정운천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과 민동석 전 농림수산식품부 농업통상정책관의 명예를 훼손하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업자의 업무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제작진 5명을 기소했다. 제작진에게는 수갑이 채워지고 포승줄에 묶여 검찰청까지 이송되는 사상 초유의 일도 벌어졌다. 이명박 정부 초기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 사건은 대법원에서 제작진의 무죄로 판명났다. 이 밖에도 제작진은 6건의 민사소송에서 모두 승소했다. 대법원은 “정책 결정에 관여한 공직자 개인의 명예훼손이라는 형태로 언론인을 처벌할 때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고 판결했다. 검찰의 무리한 기소를 지적한 것이다.
형법상 명예훼손죄는 공직선거법으로 그대로 이어진다는 점도 문제이다. 선거에서 허위사실을 공표했을 경우 형사처벌하도록 한 것이다. 당선자가 형사사건으로 100만원 이상의 벌금형을 확정 받으면 당선 무효가 돼 정치인들에게 특히 민감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봉주 전 민주통합당 의원은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와 BBK의 연관성을 언급했다가 허위사실유포 및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돼 지난해 12월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아 현재 실형을 살고 있다. 이에 반해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했던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지난 8월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이 나 형평성 논쟁을 낳기도 했다.

▷노조 성명에도 명예훼손죄를 적용한다면?=서울중앙지법(형사25단독 서정현 판사)은 지난달 31일 배석규 YTN 사장의 ‘황제골프’를 비판하는 성명을 올려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김종욱 YTN 노조 위원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서정현 판사는 판결문에서 “배석규 사장은 사회의 여론형성을 주도하는 뉴스 전문 방송사인 YTN의 대표이사로 공적 인물”이라며 “김종욱 위원장은 주관적으로 공공의 이익을 위해 그와 같은 사실을 적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런데 만약 이 판결에서 유죄 선고가 났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됐을까.
노조에서 성명을 내는 경우 비판 대상은 대부분 회사 경영진이다. 노조가 내는 성명에까지 명예훼손죄를 들이댄다면 노조의 일상적인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우장균 전 한국기자협회장(YTN 해직기자)은 “명예훼손죄의 취지는 거대 언론사가 힘없는 개인의 명예를 훼손할 경우 보호하자는 것”이라며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권력이나 돈 있는 사람들이 시민과 노동자·언론사 기자들을 상대로 자신의 권리를 더 보호받기 위해 남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는 대다수의 기업에 노조가 있는데 노조 성명서에 명예훼손죄를 적용한다는 것은 사장 기분이 나쁘면 기소된다는 의미”라며 “(유죄 판결이 났을 경우) 자칫 엄청난 노동과 언론 탄압 위기의 순간을 맞을 뻔 했다”고 말했다. 

▷의혹 보도 못하면 기업·정부 권력은 누가 감시하나=선진국에서는 언론보도에 의한 명예훼손 사건은 주로 민사소송을 통해 처리된다. 명예훼손죄에 대한 형사처벌을 폐지하는 것이 국제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뉴질랜드는 1992년, 아프리카 가나는 2001년, 스리랑카는 2002년, 멕시코는 2007년 명예훼손죄를 폐지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정반대의 길을 고수하고 있다. 특히나 언론보도에 형사적 책임을 묻겠다며 고소하는 일도 잦다. 손동권 건국대 법학과 교수는 18일 “언론매체 종사자를 고소해 그들이 구속되거나 형사재판을 통해 처벌받도록 해 다소나마 피해감정을 보상받고 재범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겠다는 취지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민사소송과 합의를 유리하게 이끄는 방책으로 형사절차가 활용되는 면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형사고소를 하면 수사기관이 직접 증거를 수집하기 때문에 피해자 스스로 증거를 수집하는 어려움을 덜 수 있고, 가해자에게 합의를 종용하는 심리적 압박도 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현행법에 따르면 허위 사실이든 진실이든 간에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가 인정되면 형사처벌이 가능하다. 하지만 의혹을 제기하는 언론은 수사권이 없기 때문에 불완전한 정보를 근거로 할 수밖에 없고, 허위 사실과 진실 사이의 경계가 모호한 경우도 있다.
안기부 X파일에 등장하는 검사가 실제 떡값을 받았는지, ‘장자연 리스트’에 거론된 언론사 사장이 성상납을 받았는지, 미국산 쇠고기가 광우병 감염 가능성이 얼마나 높은지 등의 경우 문제를 제기하는 언론이나 정치인이 모든 것을 다 입증할 수는 없는 사례들이다. 그런데도 검찰은 떡값 검사 명단을 공개한 노회찬 의원을 기소했고, PD수첩 제작진을 체포했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장자연 리스트와 안기부X파일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고 그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며 “비리의 단서를 제시하는 자체까지 처벌하는 것은 권력비리에 대한 고발을 어렵게 한다”고 지적했다.

조현미 기자 | ssal@media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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