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9일 일요일

산업재해 환자에서 그들 돕는 벗 되다


이글은 한겨레21-2012-09-10일자 제927호 기사 '산업재해 환자에서 그들 돕는 벗 되다'를 퍼왔습니다.
[2012 만인보]산재당한 자신 도와준 산재노협 몸담다 대표 된 박영일씨… “형편 어렵고 내일 막막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싶어”

» 산재노협 대표 박영일씨.

영일은 시계를 봤다. 9시57분. 요의가 느껴졌다. 남은 분량을 보니 20개짜리 한 묶음 중 겨우 하나가 남았다. 에잇, 화장실은 남은 거 마저 하고 가지 뭐. 영일은 작업을 시작했다. 프레스 기계가 올라가 멈춘 사이 철판을 넣고…. 그러나 프레스는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내려앉았다. 프레스가 눌러 만드는 철판의 두께가 2mm. 그 프레스가 철판 대신 영일의 손을 누르고 있었다.

수술 55번 끝에 잘라낸 손가락 3개

“닭발 눌러놓은 것처럼 손이 완전 퍼져가지고. 처음 간 병원에서는 손목을 절단하자 그래서 그건 못한다 하고 광명성혜병원으로 갔어요. 거기서는 손 상태가 너무 안 좋다, 그렇지만 한번 해보겠다 그래서 수술에 들어갔고 뼛조각을 하나하나 맞춘 거죠.”
1998년 4월17일, 박영일의 나이 23살이었다. 한때는 레슬링 선수를 꿈꿨고, 사춘기를 지나면서는 기술 배우는 재미에 빠진 공고생이었다. 사고가 나던 때는 해병대 입대를 기다리다 지쳐 방위산업체 사업장에 일을 하러 간 청년이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잃어버릴 거라 생각했던 다섯 손가락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움직이기까지 했다. 희망적이었다. 그러나 몇 달 뒤, 손에서 고름이 나기 시작했다. 이상했지만 마침 담당의가 외국에 가고 없었다. 담당의가 돌아온 날 바로 영일은 수술실로 내려 보내졌다. 골수염이 손 전체에서 진행 중이었다. 손가락 관절을 모두 뽑아냈다. 간신히 지켜낸 손가락 3개를 잘라야 했다.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술도 안 먹던 놈이 영안실 가서 술을 달라고 해서 먹고. 그래도 손목까지 절단해야 한다고 했는데 상태가 호전돼서 손가락 몇 개는 살린 거죠. 이게 수술을 55번 한 손이에요.”
6개월 동안 천국과 지옥을 분주하게 오갔다. 어쨌든 대부분의 날들은 지옥에 있었다. 그때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이하 산재노협)를 만났다. 아니, 협의회 사람들이 영일을 찾아왔다. 당시 영일이 치료받던 병원에는 남동공단에서 일을 하다 사고를 당한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병원이 봉합 수술로 유명하기도 했지만 공단 내 사고가 그만큼 잦다는 말이었다.
산재노협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병원을 방문했다. 그리고 영일과 같은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산재 신청은 했나요?”
영일은 눈이 불편하고 손이 잘려 있는 그 사람들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그리고 물었다. 그게 뭔가요? 산재라는 줄임말로 흔히 불리는 ‘산업재해’가 무엇인지 정확히 몰랐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다치면 그에 따른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이 간단한 법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들은 영일에게 산업재해 보상 신청을 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 결과 영일은 55번의 수술에 들어간 비용을 산재보험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산재가 승인될 때까지 도와주었지만, 이 모든 것이 무료였다. 고마웠던 영일은 6개월간의 병원 생활이 끝난 뒤 산재노협을 찾았다.
“사무실에 가보니까 어떤 사람이 마우스를 막 움직여요. 보니까 손가락 3개가 있는 형이 되게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퇴원을 한 뒤 막막하기만 했던 영일에게 그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병원 신세를 지고 있을 때도 산재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공공기관 직원 한 명 만나본 적 없었고, 병원을 나와서도 재활이나 사회 적응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산재보상만 간신히 받았을 뿐, 나머지는 다 개인이 알아서 해야 했다. 공단에 직업재활사가 있다고 들었지만, 만난 적도 없고 어떻게 만나는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산재노협은 영일에게 더 큰 의미였다.

자발적 후원만으론 버거운 단체 운영

산재노협은 산업재해를 당한 노동자들로 이뤄진 단체다. 공장에서 사고를 당하고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가 산재노협을 만나 산재보상 신청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 그들은 영일처럼 고마움에 산재노협을 다시 찾았고, 이후 함께 활동을 하고 후원을 했다. 산재노협은 그렇게 유지되고 있었다.
“병실 사람들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나 말고도, 나보다 더 모르는 사람들도 다 산재노협 도움을 받았다는 거예요. 가서 보니까, 우편물 발송 외주 일을 하며, 산재로 인한 중증 장애인들이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고, 거기서 나온 수익으로 병원 방문이나 무료 상담 때 쓸 홍보물 책자도 만들고, 정말 보람 있는 일을 한다 그래서 같이 하게 된 거죠.”
영일은 그곳이 좋았다.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끼리니 말 한마디를 해도 편했다. 그래서 남게 되었다.
15년이 흘렀다. 예전처럼 산재가 무엇이냐고 되묻는 이는 많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산재 신청은 기름밥 먹어온 이들에게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산재노협의 무료 상담도 병원 방문 사업도 계속된다. 서울은 물론 경기도 곳곳을 돌며 산재노협 사람들은 산재 환자를 찾는다. 그리고 묻는다.
“산재 신청은 했나요?”
환자의 다친 모양새를 보면 일반 사고로 인한 것인지 산재로 인한 장애인지가 한눈에 들어온다는 영일씨는 돌팔이가 다 된 거라며 웃는다. 산재노협의 일에 상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산재를 당한 처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예방임을 안다. 그리고 예방이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임을 안다. 산재 예방이 가능한 사회 조건을 만들고자 교육활동을 하고 노동권 확보 운동도 한다. 재활산업, 산재보험 제도 개혁 등 할 것이 너무도 많다.
산재노협 대표를 맡게 된 영일씨는 요즘 이것저것 고민이 많아졌다. 가장 큰 고민은 산재노협의 막내가 여전히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지지 않는 단체는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 형들은 나이를 먹고 가정이 생겼다. 더불어 생계에 대한 걱정도 커졌다. 단체 사정이 좋지 않기에 걱정은 줄지 않는다. 하는 일은 많은데 자발적인 후원으로만 단체가 운영되고 있으니 버거울 만 하다. 물론 영일씨 자신도 형들과 같은 고민을 한다.
“혼란스러워요. 나이도 찼고. 처음 일할 땐 20만원, 30만원 받고 활동했거든요. 모아놓은 돈은 없고 장가도 가야 하고. 내 살길을 만들어놓은 게 없으니까. 옛날에는 일을 하는 게 마냥 즐거웠던 거예요. 전혀 지금을 생각 못했던 거죠. 이제 뭐하지 생각하면 할 게 없는 거예요. 나는 해온 게 산재 일밖에 없는데.”
그래도 그에게는 여전히 산재 일뿐이다. 19살에 양손이 잘린, 회사는 개인 부주의라며 본체만체하던 아이를 데려가 산재 신청을 해주었더니, 그 뒤로 말도 많아지고 웃기까지 했다. 산재는 팔다리가 잘리는 것인 줄만 알았는데 직업성 암, 과로사 등 다른 종류의 산재를 겪은 이들을 만나게 됐다. ‘내가 그때 저곳에서 일하지만 않았다면….’ 산재 피해자들이 하는 말을 그는 누구보다 공감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이 백번 천번 한 생각들이기 때문이다.

“술잔도 잡고, 최고지 뭐”

여전히 산재노협 형들과 술 먹으며 노닥이는 일은 삶의 큰 즐거움 중 하나다. 2개의 손가락이 유용하게 쓰이는 순간이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면서도, 사고가 난 날의 시와 분까지 기억하는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며 말한다.
“엄지도 살려주고 이 손가락도 반은 살려주고. 이게 어디예요. 컵이라도 잡을 수 있고 술잔도 잡고. 최고지 뭐. 의사 형이 그랬어요. 나 술잔 잡으라고 해준 거라고.”
그 2개의 손가락으로 영일씨는 산재노협 형들과 술잔을 기울인다. 산재 환자들과 잔을 부딪친다.

상담 문의 02-868-2379, 후원 계좌 국민은행 804-01-0479-320 산재노협.

글 희정 제2회 손바닥 문학상 당선자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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