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9일 일요일

삼성이 꺼내든 ‘혁신’을 삼성에 다시 묻는다


이글은 한겨레21 2012-09-10일자 제927호 기사 '삼성이 꺼내든 ‘혁신’을 삼성에 다시 묻는다'를 퍼왔습니다.
[곽정수의 경제 뒤집어보기] 애플 소송 결과에 “시장은 혁신하는 회사 손을 들어줄 것”이라는 삼성… 비밀 경찰식 내부통제 걷어내고, 총수는 ‘신’의 자리에서 땅으로 내려와야

» 삼성 임직원들은 새벽 출근으로 몸살을 앓는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새벽에 출근하자 미래전략실과 계열사들까지 이를 추종해 벌어지는 진풍경이다. 이건희 회장이 서울 서초동 본사에 출근하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아시아경제

세기의 전쟁으로 불리는 삼성-애플 간의 미국 특허소송 결과에 대해 상반된 시각이 팽팽하다. 미국 배심원은 8월24일(현지시각) 삼성이 애플의 특허를 침해했다며 10억4939만달러를 배상하라고 평결했다. 애플의 최고경영자인 팀 쿡은 “오늘은 애플이 승리한 중요한 날”이라고 환영하며, 삼성을 ‘카피캣’(모방꾼)으로 묘사했다. 반면 대다수 한국 언론은 미국의 편파 재판이라고 비판했다, ‘미 법원 애플 편들기’ ‘애플 동네 사람들, 애플 손들어줘’…. 미국의 보호무역주의·국수주의에 대한 지적도 뒤따랐다.

애플의 교훈은 1등 노리는 모두에게 해당

주가 폭락으로 하룻새 15조원(시가총액)이 날아간 삼성도 격앙된 모습이다. 삼성은 “시장에서 ‘혁신’을 통해 정정당당하게 경쟁하지 않고, 법정에서 ‘특허’라는 수단을 활용하여 경쟁사를 누르려고 한 회사가 소비자들로부터 인정받으며 성장을 지속한 사례는 역사적으로 없다”고 독기를 품었다. 이건희 회장도 “소송에 잘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삼성은 9월 말로 예상되는 판사의 최종 판결에서도 패소하면 즉각 항소할 방침이다.
국내 언론의 보도가 일종의 국수주의나 또 다른 편파로 비칠 수 있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도요타가 최대 위기에 빠진 2010년 리콜 사태 때 ‘미국 음모론’이 제기됐다. 리콜 사태는 도요타가 미국의 자존심인 지엠을 제치고 세계 1위 자동차업체로 등극한 직후 터졌다. 삼성은 도요타와 묘한 외견상 일치를 보여준다. 삼성전자는 2011년 하반기 애플을 제치고 스마트폰 세계 1위에 올랐고, 2012년에는 그 격차를 더욱 벌렸다. 삼성-애플의 특허소송 결과를 정치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지만, 미국의 자국 산업 보호 분위기가 작용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삼성은 소송 이후 “시장과 소비자들은 소송이 아닌 혁신을 지향하는 회사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 굳게 믿는다”고 강조했다. 혁신을 통해 애플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겠다는 결의다. 옳은 얘기다. 삼성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기업으로 거듭난다면 위기를 기회로 바꾸며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있다.
후발 기업(국)이 선발 기업(국)을 빠르게 추격할 수 있는 유효한 전략 중 하나는 선발 기업의 기술이나 디자인을 ‘카피’하는 것이다. 한국은 이런 전략을 가장 성공적으로 수행한 나라다. 불과 40여 년 만에 세계적인 정보기술(IT)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전자도 예외가 아니다. 삼성은 기술 선진국인 일본의 기술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요즘에는 중국이 한국인 ‘기술고문’을 적극 활용한다.
후발 주자의 카피 전략을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다. 기술이나 자본이 없는 상황에서 자력 갱생은 요원하다. 한국이 후발 개도국들에 가장 성공적인 롤모델로 꼽히는 이유다. 하지만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1위를 넘보게 되자 카피 전략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됐다. 1등 자리를 놓고 경합하는 경쟁자들이 좌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애플 사태의 교훈은 삼성만이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 1등 자리를 노리는 한국 기업들 모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 기업들은 창의와 혁신을 통해 새로운 기술과 마케팅으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때만 진정한 1등이 될 수 있는 전환기를 맞고 있다. 애플이 2007년 아이폰을 선보이며 휴대전화에 컴퓨터 기능을 결합한 스마트폰의 대중화 시대를 연 것은 좋은 본보기다. 그동안의 패스트팔로어(Fast Follower·빠른 추종자) 전략을 퍼스트무버(First Mover·시장선도자) 전략으로 바꿔야 한다.

‘자율출근제’ 해봤자 총수가 새벽 출근하면…

창의와 혁신을 통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쉽지 않다. 삼성은 몇 년 전부터 이를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조직문화 구축을 위한 시도도 뒤따랐다. 아이디어만 좋으면 기존 업무에서 벗어나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자유롭게 도전할 수 있는 ‘창의개발연구소’ 신설(2011년), 출근 시간을 아침 6시~오후 1시 사이에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율출근제’(2009년),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재택·원격근무제’(2011년), 복장 자유화(2008년), 창의적 인재를 뽑으려고 필기시험을 없앤 ‘창의 플러스 전형’(2011년) 등이 사례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씨가 좋아도 토양이 척박하면 풍성한 열매를 기대하기 힘든 법이다. 창의와 혁신이 꽃피려면 토양이 되는 기업문화, 지배구조, 임직원 인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창의와 혁신이 기업문화의 핵심 DNA로 내재화해야 한다. 군대식 상명하복의 분위기에서는 창의와 혁신의 꽃이 피기도 전에 시들 수밖에 없다. 배임·횡령 혐의로 실형 선고와 함께 법정 구속된 김승연 한화 회장의 수사 과정에서 총수를 신에 비유하고 절대적인 충성의 대상으로 묘사한 내부 문서가 발견됐다. 총수가 신으로 떠받들어지는 조직은 사이비 종교집단이나 조폭에나 어울리지, 창의와 혁신을 기대하는 기업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흔히 황제경영으로 불리는 한국 재벌의 기업문화가 비단 한화뿐일까? 삼성 임직원들은 요즘 새벽 출근으로 몸살을 앓는다. 이건희 회장이 새벽에 출근하고, 그룹의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과 계열사들까지 이를 추종해 벌어지는 진풍경이다.
삼성 임직원들은 사적인 자리에서, 특히 외부 사람과 있을 때 회사 얘기를 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20만 명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거대 조직에서 왜 직장과 상사에 대한 불만이 없을까? 창의와 혁신은 억압되고 폐쇄적인 조직문화 속에서는 제대로 싹틀 수 없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나오려면 때로는 엉뚱할 수도 있는 자유로운 사고와 치열한 논쟁이 가능해야 한다. 비밀경찰식 내부 통제를 걷어내려면 먼저 조직의 속살을 다 드러내도 꺼릴 게 없도록 자정이 필요하다. 삼성은 최근 몇 년간 비자금 사건, 담합, 공정위 조사 방해, CJ 미행 사건과 상속소송 등 대형 스캔들이 줄줄이 터졌다. 국민이 드라마 (추격자)에서 악덕 기업 회장이 나오는 장면을 보다가 누구 회장을 그린 것 아니냐고 수군대는 일이 사라져야 한다. 윤리경영, 준법경영, 사회책임경영, 인간중심경영의 실천이 시급하다.
삼성 미래전략실의 한 고위 임원은 30여 년의 직장생활 동안 단 한 번도 여름휴가를 가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총수와 회사에 대한 충성심의 증표가 될지 모르지만 창의와 혁신이 꽃필 수 있는 풍토와는 거리가 있다. 한국은 연간 노동자 노동시간이 2100시간을 넘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멕시코에 이어 두 번째로 길다. 하지만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연간 1600시간 일하는 선진국에 훨씬 못 미친다.

중소기업·벤처 숨쉬려면 대기업 탐욕 버려야

창의와 혁신은 대기업 혼자만의 힘으로는 안 된다. 수많은 창의적인 중소기업, 벤처와 협업이 이뤄져야 한다. 1976년 애플이 처음 태동한 곳은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의 차고였다. 국민의 경제민주화 요구가 아니더라도, 대한민국의 중소기업과 벤처가 숨을 쉬려면 대기업이 탐욕을 버려야 한다. 불공정 하도급 관행을 과감히 청산해 중소기업들도 기술개발과 우수인력에 과감히 투자할 수 있는 여력이 있어야 한다.
과연 이런 일들이 가능할까.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기업의 중심인 총수가 바뀌어야 한다. 총수가 신의 경지에서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

한겨레 경제부 선임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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