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3일 일요일

서울시민 보호하는 시민인권보호관 생긴다


이글은 한겨레21 2012-09-24일자 제929호 기사 '서울시민 보호하는 시민인권보호관 생긴다'를 퍼왔습니다.
[초점] 서울시의회 ‘서울특별시 인권기본조례’ 의결로 지자체 최초 옴부즈만 제도 ‘시민인권보호관’ 생겨 서울시 기관에 인권침해 당하면 구제받을 길 생기지만, 독립성 부족에 지속성 우려도

1997년 7월30일 세계 최초의 ‘인권도시’가 탄생했다. 체 게바라의 출생지로 유명한 아르헨티나 제2의 도시 로사리오가 인권도시를 선언한 것이다. 익숙한 단어 ‘인권’과 ‘도시’가 합쳐졌음에도 인권도시란 말은 영 생경하다. 인권도시란 시민 참여와 공공기관의 정책적 노력을 통해 인권의 보호와 증진을 도시 공동체 삶의 중심 가치로 설정하고 실행하는 도시를 지향한다. ‘인권’ 하면 유엔이나 국가인권위원회가 떠오르는 게 사실이다. 애초 인권에 대한 관심은 전세계, 국가 차원에서 진행됐다. 인권도시 구축은 지역 차원에서 인권침해를 예방해, 사회 갈등이나 범죄를 줄이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이런 움직임은 전세계적인 자본주의의 확산과 더불어 심화되는 빈부 격차, 이주노동자 거주권 등 인권의 중요성이 새삼 강조되는 상황과 맞물려 등장했다.

»  지난 9월11일 한 어린이가 어린이·청소년 인권정책에 반영됐으면 하는 내용을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서울시는 최근 인권도시로 나아가려는 제도적 기반인 인권기본조례를 제정했으며, 전국 지자체 최초로 ‘어린이·청소년 인권조례’ 제정을 추진 중이다. 서울시 제공

서울특별시 인권위원회 설치 명시

로사리오는 지역 민간단체 대표들과 함께 인권도시를 선언한 뒤, 공무원 및 시민사회를 대상으로 한 인권교육을 도입하고 주요 정책을 인권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아르헨티나에선 군부 독재시절(1976~83년) 시민에 대한 국가 폭력이 횡행했고, 1990년대에는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빈곤·실업 문제가 심화됐다. 이런 역사는 로사리오의 인권정책에도 영향을 주었다. 국가 폭력에 의한 실종자 문제부터 시작해 어린이 인권교육, 소수자 보호, 도시 교외에 거주하는 이주민 주거복지 문제로까지 관심이 확대되고 있다.
2009년 광주를 시작으로 ‘인권도시’를 외치는 국내 지방자치단체가 늘고 있다. 최근 서울시도 인권도시로 나아가려는 첫발을 내딛었다. 지난 9월10일 열린 서울시의회 임시회에서 ‘서울특별시 인권기본조례’가 의결됐다. 서울시 인권조례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독립적으로 인권침해를 조사하고 정책 권고를 할 수 있는 ‘시민인권보호관’ 제도다. 시민인권보호관은 일종의 인권 옴부즈맨(행정기관에 의해 침해받는 국민의 각종 자유와 권리를 제3자 입장에서 신속·공정하게 조사·처리해주는 제도)으로, 국내 지자체 가운데 서울시가 처음 도입했다. 시 소속 행정기관, 투자출연기관, 시 지원을 받는 복지시설 등에서 인권침해를 당했다면 내년 1월부터 피해 당사자나 이 사실을 아는 제3자는 서울시 인권센터에 구제를 요청할 수 있다. 시민인권보호관은 인권센터를 통해 접수된 인권침해 사건을 독립적으로 조사해 시정권고 사항을 시장에게 통지한다. 시장은 이를 다시 상담 신청인 및 조사 대상 기관의 장에게 통보하게 돼 있는데, 시정 권고를 받은 조사 대상 기관의 장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그 내용을 존중해 조처해야 한다. 인권조례 적용 대상이 되는 ‘서울 시민’은 시에 주소를 둔 사람뿐 아니라 체류자, 시 소재 사업장 노동자까지 포함한다. 서울시는 공개 모집을 통해 인권 관련 민간 전문가 5명을 시민인권보호관으로 임명할 계획이다. 조례에는 인권정책 기본계획, 인권센터 운영, 인권 상황에 영향을 끼치는 법규 등에 대한 심의 및 자문을 하기 위한 서울특별시 인권위원회 설치를 명시하고 있다. 인권정책 기본계획과 시행계획 수립, 인권보고서 발간, 인권교육, 서울시 인권헌장 제정 등도 포함됐다. 시는 분야별 시민의 권리를 규정한 ‘인권헌장’을 민관이 함께 만들어 선포하고,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서울시 인권정책의 분야별 핵심 과제와 사업계획 등을 담은 ‘인권정책 기본계획’을 수립할 예정이다.

“시민이 ‘뭔가 달라진다’ 느껴야 지속 가능”

서울시 인권조례 제정에 대해선 일단 긍정적 평가가 많다. 지자체한테 인권침해를 당한 시민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곳이 하나라도 더 마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김덕진 천주교인권위 사무국장은 “관 주도로 조례가 제정된 것은 아쉽지만, 어떻게 운영되느냐에 따라 다른 지자체에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서울시장이 서울시에서 최소한 이런 일은 없게 하자고 관련 정책을 펼 수도 있고, 서울청이나 서울교정청 등 지자체 소재 기관과 인권침해 방지 협약을 체결하는 활동을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지자체에서 인권조례를 마련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9년 광주광역시는 ‘인권 증진 및 민주·인권·평화도시 육성 조례’를 제정했는데, 이는 전국 최초의 인권기본조례로 평가된다. 이후 경남, 전북, 경기도 광명, 서울 성북구 등 광역·기초지자체 10여 곳에서 인권조례를 제정했다. 그러나 대개 시민들의 아래로부터의 요구가 아닌 관 주도의 ‘보여주기식’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인권조례를 만들어놓고도 조례에 명시된 전담기구조차 설치하지 않거나, 전담기구를 설치하더라도 한두 명의 인력만 배치하는 현실 탓이다. 지역 특성이 담긴 인권조례도 드문 형편이다. 인권도시 운동이 지닌 가치를 실현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구호나 이벤트성에 그친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서울시 역시 시민들의 인권 보호를 실질적으로 구현해내려면 넘어서야 할 과제가 많다. 더구나 지방자치제의 권한이 여전히 제한적인 상황에서 조례만으로 구현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아래로부터 요구로 만들어진 학생인권조례만 보더라도 중앙정부의 정책에 부딪쳐 실행이 쉽지 않다.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장은 서울시 인권조례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시민인권보호관 ‘독립성 확보’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서울시장 직속 기구인 사회혁신기획관이 인권센터·시민인권보호관에 예산·인력을 지원하도록 돼 있는 규정은, 모니터링 대상인 서울시 행정 당국에 의해 인권센터가 좌우될 여지를 남겨둔다는 것이다. 김 소장은 “제도라는 건 사람이 바뀌더라도 업무의 안정성과 일관성을 도모해야 하므로, 사회혁신기획관과 인권센터 등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며 “국가인권위의 경우 ‘조직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는 조항을 빌미 삼아 (이명박) 정부가 인권위 조직 축소를 강행했고, 이는 결국 독립성을 훼손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말했다. 시장이 바뀌더라도 인권정책을 지속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안정된 시스템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충분히 역할을 수행할 만한 능력을 지닌 인사가 시민인권보호관과 인권위원이 될 수 있도록 투명하고 공개적인 인선 절차가 필요하다는 주문이 나오는 까닭이다. 서울시 인권조례 제정 과정에 참여한 박래군 인권재단 상임이사는 “시민들에게 인권센터나 시민인권보호관이 생겨 ‘뭔가 달라진다’는 느낌을 줄 만한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이런 정책이 계속 유지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아래로부터 참여와 압력이 인권도시 만들어

법과 제도만으로는 인권 보호와 증진이 담보되지 않는다. 성공했다는 평가를 듣는 국외 인권도시 사례를 살펴보면, 민관 협력과 인권교육이 필수적으로 든든한 기반 구실을 하고 있다. 지자체의 의지와 시민들의 아래로부터의 참여, 지속적인 인권교육을 통한 인권친화적 문화를 조성하지 않고는 지속 가능한 성과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울시 인권조례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시민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뻔한 이야기지만, 결국 서울을 인권도시로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추동력은 시민들의 아래로부터의 참여와 압력이다.

참고 문헌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의 인권도시 프로젝트’, 정근식, 2012 한국인권회의 발표문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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