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1일 금요일

[아침 햇발] 안철수 출사표에 빠진 것 / 김이택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09-20일자 기사 '[아침 햇발] 안철수 출사표에 빠진 것 / 김이택'을 퍼왓습니다.

김이택 논설위원
역시 안철수식 정치는 문법이 달랐다. “대통령 한 사람의 힘으로 5년 만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고, 자기 혼자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목청 돋우며 나만이 해낼 수 있다는 식의 익숙한 정치판 연설은 없었다. 국민 눈높이에서 해온 ‘솔직토크’ 화법 그대로다. “분열과 증오의 정치를 넘어서” 미래를 내다보고, “국민의 생각이 하나로 모아지는 첫걸음을” 시작하고 싶다는 말도 했다. 박근혜가 말하는 ‘100% 대한민국’이랑 비슷한 얘기지만 ‘진정성’의 농도는 달라 보였다.안철수뿐 아니라 박근혜가 ‘국민대통합’을 앞세우고, 문재인이 ‘소통과 화합’을 내세우는 것도 그만큼 우리가 당면한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뜻이다. 정치·경제·사회·외교 어느 것 하나 온전치 못하다. 성장 엔진은 멈추기 직전이고 민생은 벼랑 끝에 몰려 있다. 뻥 뚫린 가슴들을 보듬지 않고서는 누가 대통령이 돼도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다.문재인이 첫 민생행보 자리에서 일자리 만들기를 위해선 노·사·민·정의 ‘사회적 대타협’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박근혜가 국민이 바라는 복지와 조세부담의 수준을 정하기 위한 ‘국민대타협’을 언급했던 것도 상황의 절박성을 감지한 때문일 것이다. 안철수는 국민이 원하는 게 “덧셈의 정치, 통합의 정치”라며 후보들끼리 미래를 위한 협력을 약속하자고 제안했다. 지금의 국회 구도를 보더라도 여야의 협력과 타협이 없으면 어떤 경제위기도, 사회갈등도 풀어나가기가 쉽지 않다. 이런 면에서 세 후보의 출사표는 일단 긍정적으로 봐줄 만하다.그러나 여기에는 전제가 있다. 증오의 정치를 넘어서 대타협을 이루려면 그동안 권력과 이익을 독점해온 수구보수세력이 더 많이 양보할 수밖에 없다. 반공 이데올로기로 40년, 시장만능주의로 20년,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를 독점해온 수구보수 기득권 동맹체제를 스스로 허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박근혜의 최근 행보를 보면 전망이 어둡다. 겉으로는 경제민주화와 복지사회를 내세우지만 당내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그 진정성을 확인하기 어렵다. 동맹체제의 이해관계자들에게 기득권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5·16과 인혁당 발언에서 드러나는 그의 속마음은 여전히 유신시대에 머물러 있고 ‘아버지 복권’의 집념은 강고해 보인다.수구보수 동맹체제를 떠받쳐온 다른 한 축은 수구보수언론이다. 역사의 중요 시기마다 시대의 흐름과 민심을 왜곡하면서까지 기득권 체제를 지키려 애써왔다. 최근 박근혜의 인혁당 발언, 정준길 협박전화 소동을 어떻게 보도했는지를 되짚어보면 이들의 본모습이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화방송 사태를 방관해온 박근혜가 어제 문화방송 드라마 촬영장을 방문한 게 이명박 정부가 장악해놓은 방송구도를 그대로 가져가겠다는 의사표시는 아닌지 의심스럽다.박근혜는 이 동맹체제의 수호자 격인 검찰도 손댈 뜻이 없어 보인다. 수사권은 전혀 건드리지 않고 특별감찰관으로 고위층 비리를 없애겠다는 건 제도개혁에 저항해온 검찰 손을 들어준 거나 마찬가지다.수구보수 동맹이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으면 타협도 통합도 불가능하다. 진실이 외면당하고 민심의 통로가 막히면 증오와 대결로 흐를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증오정치를 불러온 주범은 바로 수십년 기득권을 독점해온 수구보수 동맹체제다.엊그제 안철수의 출사표에는 증오정치의 뿌리에 대한 성찰이 안 보인다. 어제 이승만·박정희 묘소까지 참배했지만, 그 후계자들이 대타협의 길로 나설 것이란 전망은 여전히 밝지 않다.

김이택 논설위원ri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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