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1일 토요일

탈원전 외치는 ‘제복향상위원회’… 이런 걸그룹 보셨나요


이글은 경향신문 2012-8-31일자 기사 '탈원전 외치는 ‘제복향상위원회’… 이런 걸그룹 보셨나요'를 퍼왔습니다.

ㆍ일본 최장수 걸그룹 … 반전, 친환경 노래 ‘사회파 아이돌’

사람들은 ‘반핵’ 혹은 ‘반체제 아이돌’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사회파 아이돌’을 표방한다. 이들이 불러온 노래들은 ‘북극곰의 일기’ ‘세이브 더 칠드런(save the children)’ 등 환경, 아동학대 등 관심 분야가 다양하다. 1992년 결성돼 만 20년을 맞는 일본 10대 걸그룹 ‘제복향상위원회’는 ‘모닝구 무스메’ ‘AKB48’ 등 메이저 걸그룹과 같은 반열에 올리긴 어렵지만 어쨌든 일본 최장수 걸그룹이다.

제복향상위원회는 지난해 6월 탈원전을 주제로 한 ‘탈, 탈, 탈원전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두 가지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깜찍한 소녀들이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수습과정과 일본 원전정책의 문제점을 정면으로 비판한 노래를 부른 것이 첫번째다. 또 다른 이유는 이들의 노래가 대중매체에 철저히 봉쇄된 점이다. 음반 발매 기념으로 연 팬미팅에서조차 ‘이 노래만은 부르지 말라’는 압력이 들어왔다. 광고로 뒤덮여 있는 일본 지하철의 한 귀퉁이에 붙이려던 홍보 포스터도 금지됐다. ‘원전 마피아’로 불리는 세력의 압력 때문이다.

제복향상위원회는 가수 활동 이상으로 자원봉사에도 열심이다. 음반 판매와 라이브 공연 등 ‘걸그룹’ 본연의 활동을 해나가면서 노인·아동 복지시설 위문, 담배꽁초 버리기 금지 등 다양한 캠페인을 벌인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음반 판매 수익금의 일부는 후쿠시마현 농가에 기부한다. 지난 10일 도쿄 신주쿠에 있는 소속사 아이돌재팬레코드 사무실에서 멤버 7명 중 오가와 안나(小川杏奈·18), 가토리 유카(香取優花·16), 시미즈 가린(淸水花梨·15)을 만났다. 소녀들은 밝고 상큼한 목소리로 “우리가 ‘탈원전’ 노래를 더 이상 부르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일본의 아이돌그룹 ‘제복향상위원회’ 멤버 가토리 유카, 오가와 안나, 시미즈 가린(왼쪽부터)이 지난달 10일 도쿄 신주쿠에 있는 소속사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의 인터뷰가 끝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도쿄 | 서의동 특파원 phil21@kyunghyang.com

▲ 원전 비판 노래로 주목 받았지만외부압력에 대중매체선 활동 차단“반체제 아이돌 딱지도 개성이라 좋아우리 그룹엔 사랑 노래 더 많아요”

-그룹 이름도, 노래도 독특하네요. 

“원래 매달 학교 선생님들을 모시고 여는 중·고교생 교복 콘테스트에 참가하는 학생 모델들이 그룹을 결성하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해요. 반전, 환경보전, 아동학대 방지 같은 메시지 있는 노래들이 많지요. 최근에는 부모에 의한 아동학대 현상을 비판한 ‘세이브 더 칠드런’을 부릅니다.”

‘아직 어린아이들이/ 부모로부터 이지메를 당하다니/ 참을 수 없는 이 현실을…’로 시작되는 ‘세이브 더 칠드런’은 지난 5월 발매된 앨범 (protester·저항자)의 첫번째 수록곡이다. 최근 젊은 엄마들의 학대로 아이들이 숨지는 사건이 빈발하는 것에 착안했다. 이번 앨범에는 아동보호시설의 남자 어린이와 자원봉사자로 온 10대 소녀의 우정을 담은 ‘마이 리틀 보이프렌드’도 눈에 띈다. ‘좋아해’ ‘안녕’ 같은 10대 감수성으로 충만한 노래들도 있다. 

역시 이들이 주목받은 이유는 ‘탈, 탈, 탈원전의 노래’ 때문이다. 소녀들이 지나치게 정치성이 강한 이 노래를 어떤 기분으로 불렀는지, 팬들의 반응은 어땠는지 궁금했다. “탈원전 집회에서 부르면 ‘노래해줘 고맙다’는 인사를 많이 받지만, 다른 그룹들과의 합동공연에서는 ‘얘네 뭐야’라는 식으로 싸늘하게 반응하는 분들도 있어요.” 

이 노래를 부르기까지는 진통이 꽤 있었다고 한다. ‘이 노래만큼은 부르게 하고 싶지 않다’며 찾아온 부모님들도 있었다. 일본 최강의 권력 집단인 ‘원전 마피아’를 정면에서 비판하는 노래라 부모들조차 걱정됐던 게 틀림없다. 

“워낙 민감하고 그만큼 파급력이 강한 주제이기 때문에 저항감을 느끼는 멤버도 있었죠. 하지만 지금은 부르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고, 집회나 시위현장에서 공연하면서 사회 공부도 많이 됩니다.”

지난 7월16일 도쿄 요요기공원에서 17만명이 모인 ‘원전 재가동 반대’ 집회에서도 ‘탈, 탈, 탈원전의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대중매체들은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라디오에서 몇 번 노래가 나갔고, 탈원전 운동을 하는 여성들을 소개하는 민영방송 TV 아침 프로그램에 잠깐 비친 게 고작이다. 

“그래도 올해에는 공연해 달라는 요청이 늘어났어요. 집회 현장에서 음반을 구입하는 분들도 늘어났고요.” 사실 라이브 공연이 중심인 만큼 TV나 라디오에 못 나갔다고 해서 그리 큰 타격은 없다고 한다. 

주먹을 하늘로 향해 뻗은 채 ‘탈, 탈, 탈원전’을 외치며 시작하는 이 노래는 가사도 매우 직설적이다. ‘위험한 사고가 벌어졌는데도/(정부는) 당장 건강에 문제없다고 거짓말 한다/ (원전이 안전하다는) 원전 추진파 당신이 가서 살아봐….’ 사람에 따라서는 위화감을 느낄 수 있다. ‘너희들이 뭘 알고나 부르는 거냐’는 눈총을 받기에도 안성맞춤이다. 

-가수가 가사를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하면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텐데요. 

“곡을 받은 뒤 멤버들이 모여 가사 하나하나를 뜯어가며 공부했어요. 원전사고를 다룬 신문기사를 스크랩해서 돌려보기도 하고 책도 읽었어요. 처음엔 지식도, 관심도 없었지만 차츰 마음을 실어 노래를 할 수 있게 됐어요.”

오가와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일본에서 가장 신뢰받는 원자력공학자인 고이데 히로아키(小出裕章)의 책 도 읽었다고 한다. 

“노래를 계기로 여러 가지로 공부가 많이 됐어요. ‘탈원전’ 집회에 수만명씩 모이는 걸 보면 많은 이들이 우리 노래에 공감하는구나 싶어 반갑기도 해요.”

오가와와 가토리는 초등학교 6학년, 시미즈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활동해 벌써 6~7년차다. 그룹 규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학업과 가수활동의 양립’이다. 매달 한 번씩 라이브 공연, 매주 3회 연습이 있지만 학교수업은 거의 빠지지 않는다. 일본 중·고생들이 대부분 하는 ‘부카츠’(部活·방과후 활동)를 좀 더 열심히 하는 정도다. 고교 3년생인 오가와는 진학 준비 때문에 수업을 빠지기도 힘들다. “그래도 우리 공연을 보러 오는 팬들이 있으니 엄연한 프로지요. 부카츠 정도의 감각이긴 하지만 취미활동은 아닙니다.”

선입견과 달리 제복향상위원회의 노래는 의외로 밝고 가볍고, 율동도 상큼하다. 에 들어 있는 ‘악마, 노(No)다! 민주당’은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민주당 내각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가사이지만 선율은 후크송처럼 귀에 쏙쏙 들어온다. 명문 여학교 교복이 기본 공연복장이고, 메시지가 무겁다는 점을 빼면 여느 아이돌과 다를 바 없다. 1992년 결성됐을 때부터 멤버가 졸업하고 새로 바뀌더라도 변함없이 응원하는 팬들이 의외로 많다. 30대 후반에서 40~50대의 삼촌 팬들이 많긴 하지만.

제복향상위원회는 일본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전대미문’의 아이돌임에 틀림없다. 이들이 일본 가요계의 정상에 오를 가능성도 희박해 보이지만, 애초부터 지향점이 다른 듯하다. ‘좌파·반체제 아이돌’이라는 딱지가 붙을 우려도 있지만 이들은 “이것도 개성이니 좋지 않느냐”며 그다지 맘에 두지 않는 표정이다. 그저 자신들의 노래를 좋아해주는 팬들과 현장에서 교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내수시장이 커 음악적 다양성이 유지되는 일본 음악계의 넉넉함이 제복향상위원회 같은 걸그룹이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토양이다. 

“탈원전 노래만 부른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우리 그룹이 대대로 부른 1300곡에는 예쁜 사랑노래가 훨씬 더 많아요. 오해마시길….” ‘사회파 아이돌’의 마지막 당부가 귀엽다.

■ 음반 수익금 기부·다양한 사회캠페인

‘절전을 위해 TV는 방송을 단축하라.’

제복향상위원회가 최근 TV방송의 방송시간 단축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1970년대 오일쇼크 때처럼 심야와 낮시간 TV방송을 줄이면 엄청난 절전효과를 가져와 원전을 재가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다. 명색이 아이돌 그룹인데 대중문화계의 권력인 방송사에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이 선뜻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가수활동이 현장 라이브 중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뮤지션 출신으로 반골기질이 강한 다카하시 히로유키(高橋廣行)가 결성한 제복향상위원회는 노래 공연 못지않게 다양한 사회활동을 벌이고 있다. 

1997년 공연 및 음반판매 수익금으로 ‘SKi기금’을 설립해 일본 내 아동보호시설과 복지시설, 열대삼림보호단체, 국제앰네스티 일본지부, 베트남 고엽제 피해자 시설 ‘평화촌’ 등에 기금의 일부를 증정했다.

또 ‘이지메 추방’ ‘휴대전화 규제’ ‘담배꽁초버리기 금지’ ‘스토커법 시행’ ‘야생생물 보호’ ‘자전거 매너향상’ 등 갖가지 사회캠페인을 벌이는 등 관심분야도 폭넓다. 최근에는 일본 교전권을 부정한 평화헌법 수호, 정치인의 매니페스토(공약) 위반 문제 등 정치색이 강한 쪽으로도 활동범위를 넓히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신음하는 후쿠시마현의 낙농가에는 의 싱글CD가 1장 팔릴 때마다 300엔의 수익금을 모아 보내고 있다.

다카하시 대표는 창작의 독립을 위해 ‘아이돌재팬레코드’라는 음반회사를 별도로 설립하기도 했다. 10~18세 여학생이 가입대상인 제복향상위원회는 일본의 아이돌에서 처음으로 가입·졸업 시스템을 도입해 현재 17기까지 결성됐다.

도쿄 | 서의동 특파원 phil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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