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1일 토요일

‘건망증’ 홍사덕! 유신을 가르쳐주마①


이글은 민중의소리 2012-08-31일자 기사 '‘건망증’ 홍사덕! 유신을 가르쳐주마①''을 퍼왔습니다.
 ‘박통’은 박정희 대통령 아닌, 박정희 총통

새누리당 홍사덕씨는 1972년 유신독재의 성립에 대해 8월 29일 기자들과의 만남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유신을 한 게 아니라 수출 100억 달러를 넘기기 위해 한 것”이라고 밝혔다. 일간지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는 한 술 더 떠 “우리나라가 와이셔츠, 가발을 만들고 쥐와 다람쥐까지 잡아 팔아서 1971년까지 수출 10억달러를 달성했지만, 1977년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했다”면서 “불과 6년 만에 그렇게 가려면 중화학공업, 장치산업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특별한 권력집중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요컨대 한국 현대사에서 전대미문의 유신독재가 잘살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치일에 이 무슨 망발인가. 유신독재 피해자가 들으면 당장 귀싸대기 올릴 말이다. 

단언하건대 유신체제는 경제성장과 아무 관계가 없다. ‘대통령 니 맘대로 하세요’ 만이 유신의 본질이다. 못 믿겠다고? 유신독재가 어떻게 성립되고 박정희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주 살짝 맛만 보기로 하자. 그래도 끔직한 맛이다.

ⓒ민중의소리 박정희

5대와 6대 대통령을 지낸 박정희는 1971년 대통령 중임제의 헌법을 날치기로 뜯어고쳐 삼선개헌을 해 7대 대통령직에 도전했다.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는 이번이 마지막 출마라고 호소하면 표를 구걸했다. 7대 대통령 선거는 유례없는 관권부정선거로 얼룩졌고 박정희는 신민당의 후보 김대중을 간신히 이겼다. 이어 5월에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선거는 박정희가 3선 개헌에 이어 영구집권을 꾀하기 위해 다시 개헌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총선 결과 야당은 전체 153석 가운데 65석 즉 재적의원 3분의 1이상의 의석을 차지해 개헌저지선을 확보했다.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은 86석으로 단독 개헌선을 확보하지 못했다. 정치 풍향계라 할 대도시의 투표 내용 또한 야당의 약진이었다. 서울에서 공화당은 1석 신민당은 18석을, 부산에서는 공화당은 2석 신민당은 6석으로 대도시는 박 정권에게 등을 완전히 돌렸다. 

공개적으로 국민을 협박한 대통령과 유신

영구집권을 꿈꾸었던 박정희는 3선은 했지만 다시 한번 개헌을 하려해도 국회의원 의석수가 재적 의원 2/3에 미달해 개헌을 통한 합법적 종신집권의 길은 불가능했다. 여기서 박정희는 협박과 폭력을 동원했다. 1971년 말 국가비상사태를 뒤이어 계엄령을 선포해 국회를 해산하고 유신헌법 제정이 진행되었다. 1971년말부터 1972년 10월까지 대략 1년에 걸쳐 위수령 발동-국가비상사태선언-7`4남북공동선언-계엄령 선포-국회 새산-유신헌법 통과 등 일련의 유신쿠테타가 진행되었다.

1971년 10월에 각 대학에서 정권반대 시위가 일어나자 박정희는 서울에 위수령(衛戍令)을 발동했다. 군이 서울 시내 곳곳에 무장 주둔하는 사실상의 계엄령에 준하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리고 12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곧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법’을 선포했다. 박정희는 국가비상사태 선포와 함께 1972년을 ‘총력안보의 해’로 규정하고 다음과 같은 대국민협박문을 발표했다. 

“2. 나라를 지키고 보존함에 있어 스스로의 허점이 되는 사회불안은 용서할 수 없으며 받아주지도 않으려니와 이 같은 불안의 씨를 없앤다”“3. 언론기관은 되거나 말거나 책임없이 나라를 지키고 보존하는 일에 왈가왈부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4. 모든 국민은 나라를 지키는 일에 스스로의 책임을 다하는 것은 물론 이에 자진하여 정성과 열성을 바쳐야 한다.”“6. 만일 사태가 더욱 나빠졌을 때는 우리가 오늘날 누리고 있는 우리의 자유 가운데 어떤 것들은 이를 뒤로 미루어 스스로의 한계를 지켜야 된다”

조선시대 왕도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마치 국민을 적국 포로나 노예를 대하듯이 협박으로 일관한 이 비상사태 조치에 어디 경제성장이 있는가. 100억불 수출도 1000불 국민소득도 없다. 오직 하나, "꼼짝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이 한마디가 비상사태선포의 핵심이다. 경제에 관한 내용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가관이다. 

“잘 살기 위해 스스로의 자유를 제한하자”

자유를 제한하는 게 잘 사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게다가 박정희는 “특별조치법(국가보위법)은 계엄령을 막는 예방주사다”라고 공언했다. 말을 안들으면 계엄령을 내리겠다는 것이다. 요컨대 ‘총력안보’를 내걸고 온 국민을 협박하면서 유신쿠데타의 첫 단계를 디뎠다.

ⓒ민중의소리 박정희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은 종신집권을 위한 대반전극이었다.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을 북에 밀파해 7`4남북공동선언을 합의한 뒤 통일에 대비해 체제를 정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명분으로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강제해산시켰다. 이것이 이른바 10월유신이다. 그리고 살벌한 계엄령 하에서 11월 21일 공무원들을 부정선거에 대규모 동원한 국민투표를 통해 유신헌법을 통과시켰다.

유신독재체제는 계엄령 아래 국회 해산을 하고 공포와 부정으로 강행한 것이다. 투표율과 찬성률만 보아도 대번에 확인할 수 있다. 유신헌법의 투표율이 91.9%이고 그 가운데 찬성률이 92.2%라는 게 정상적인가. 1971년 박정희와 김대중이 맞붙은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그 엄청난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총투표의 51.2%(유효투표의 53.2%)를, 김대중 후보는 43.6%(유효투표의 45.3%)를 얻었다. 그런데 1년 만에 야당 후보 지지표 거의 전부가 박정희의 유신독재를 지지하는 데로 갔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를 두고 박근혜는 유신헌법도 대다수의 국민이 지지했다고 말하니 정말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다.

‘박통’은 박정희 대통령 아닌, 박정희 총통

유신독재는 5.16에 이은 또 하나의 쿠데타였다. 유신헌법 이전에는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이 없었다. 그런데도 박정희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법’과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제로 국회를 해산시키고 유신헌법을 제정했다. 명백하게 위헌이자 국가반역행위이다. 명심하자. 10 월유신은 제2의 5.16쿠데타이다. 5.16쿠데타나 유신독재를 적법하다 주장하는 자는 민주주의의 적이며 반국가사범이다. 국가보안법은 이들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유신헌법의 내용 또한 전제군주를 능가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대통령에게 부여해 사실상 총통제였다.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박대통령이라 부르지 않고 ‘박통’이라 불렀다. 히틀러 총통 장개석 총통과 같은 독재자와 동격으로. 심하지 않냐고? 헌법 내용을 살펴보자. 

첫째 대통령 연임 제한을 없앴다.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김대중 후보가 삼선개헌 이후 박정희는 종신집권으로 갈 것이라는 예언대로 박정희는 행동했다. 

둘째 대통령이 국회의원 재적수의 3분의 1을 추천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케 했다. 이들이 유신정우회(유정회)라 불린 대통령 친위대들이다. 결국 선거에 의해 여당 1/3 야당 1/3 대통령 추천한 유정회 1/3이 되도록 의원수를 배정해 언제나 박정희 추종세력이 국회의원 2/3석을 차지할 수 있게 했다. 

세 번째로 국론이 분열되고 낭비가 많다는 명목으로 대통령직선제를 폐지하고 전국에서 2,395명의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어용조직의 대의원을 선거로 뽑아(물론 지역 유지나 지역 관변단체 사람들이 뽑혔다) 이들이 대통령을 간접적으로 뽑았다. 더 웃긴 것은 토론 없이 단독출마하고 통대의원들은 이에 대해 찬성과 반대 둘 중 하나만 표시하는 투표였다. 이렇게 해서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을 선출(실은 추대)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체육관선거라 불렀다. 1972년부터 1987년까지 무려 15년간 국민은 자신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지 못했다. 그런데 간접선거로 8대 9대에 선출될 때 박정희가 얻은 지지율은 99.9%였다. 일당독재도 이렇지는 않다. 이건 조국근대화가 아니라 조국낙후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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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용(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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