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일 일요일

부산의 조선일보? 박근혜가 부산일보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09-02일자 기사 '부산의 조선일보? 박근혜가 부산일보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를 퍼왔습니다.
[서평] ‘부산언론사 연구’… 부산일보 기자들은 ‘정권의 하수인’이길 거부해왔다

이 서평은 채백 부산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가 쓴 ‘부산언론사 연구’ 중 부산일보와 관련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이 책은 근대 이후 부산언론의 역사를 톺아보는 ‘사료’이면서 당시 언론인들의 투쟁에서 현재적 의미를 찾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 이상’입니다. 직접 인용한 문장에는 인용부호를 넣었습니다. /편집자주

1948년 2월 24일 부산일보 기자들은 4가지 결의사항을 사장에게 제출하고 파업에 돌입했다. 그리고 이튿날 지면에 사장이 친일파와 결탁하고 있고, 역량이 없는 자를 관리자로 들이고, 신망이 높은 편집국장을 퇴진시켰다며 파업에 이르게 된 경위를 밝혔다. 경영진은 ‘해고’로 답했다. 부산일보는 기자들이 파업에 돌입한 날 공채 출신 사회부차장 등 10명을 해임하고 사회부 기자 1명을 면직처분했다. 최종 해임된 11명은 전원 복직을 거부했다.

파업과 비슷한 시기 시작해 사회의 모순을 풍자하던 4컷 만화 ‘윤첨지’는 한 달을 조금 넘기고 끝난다. ‘제2 편집권 독립 투쟁’을 벌이고 있는 부산일보의 창간 초기 모습이다. 부산일보는 중도를 표방했지만 ‘여당지’로 평가받고 있었다.

1949년 7월 12일 부산일보 박수형 초대 사장은 경영상의 이유로 사업가 김지태에게 회사를 넘긴다. 670만 원의 부채를 갚는 조건이었다. 그는 대신 박 전 사장의 친족을 해고했다. 김 사장은 대중신문을 흡수‧합병한다. 대중신문은 파업으로 해고된 기자들이 이직한 신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사옥을 징발했고 부산일보는 전시체제에 들어갔다. 김지태 사장은 신문사 외적 문제로 부산일보 일선에서 물러났다 1952년 돌아온다. 그러나 한국전쟁과 이승만 정권을 겪으면서 부산일보는 ‘여당지’로 점차 변모하게 된다. 가장 큰 이유는 정권의 탄압이다. 부산일보는 1959년 5월 7일 조봉암 관련 기사를 실었는데 며칠 뒤 치안국은 경남도경에 이 기사와 관련해 진상 파악을 지시했다.

부산일보뿐 아니라 부산 언론 대부분이 치안당국의 감시망 아래 있었다. 부산 경찰은 당시 야당지로 평가받던 동아일보를 읽지 말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경찰은 부산 시민의 추천을 받아 부통령에 입후보한 백성욱이 시민들의 추천장을 강탈당한 사건을 보도한 자유민보 1956년 4월 5일자를 일부 압수했다. 같은 해 자유당 경남도당 간부는 민주신보 기자를 폭행했고 국제신보(현 국제신문) 기자도 경찰에게 폭행당했다. 채백 교수는 “자유당 정권 후반으로 오면서 언론 특히 야당지에 대한 탄압이 부산에서도 여러 가지 형태로 자행됐음을 알 수 있다”고 평가했다.

부산지역 언론, 특히 부산일보가 언론으로서 제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 시기는 1960년이다. “당시 부산일보는 4‧19의 직접적 도화선이 됐던 3‧15 마산의거 때 행방불명된 김주열 군이 시체로 마산 앞바다에 떠 있는 사진을 신문으로서는 최초로 보도했다.” 이 사진은 4월 12일자에 보도됐고 AP통신을 통해 전세계에 퍼졌다. 현재까지도 ‘4‧19 혁명의 불씨’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반혁명’의 분위기도 만만치 않았다. 같은 해 6월 1일 동아대 학생 다수가 부산일보 편집국을 파괴해 신문을 발행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동아대 재단과 인척관계인 교수가 기사에 대한 불만 때문에 학생들을 동원한 것이다. 앞서 부산일보는 동아대 총장의 독재성을 지적했고 사학재단의 기업성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 시기 부산의 언론에서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사실은 4‧19 혁명 이후의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언론노조운동이 대두됐다는 사실이다.” 1960년 부산일보는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국제신보, 부산문화방송 등과 함께 노조연합회를 만들었다. 부산일보가 4‧19 혁명의 중심에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1961년 5‧16 쿠데타가 일어났고 박정희가 집권했다. 김지태 사장은 이듬해 6월 20일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 한국문화방송의 주식을 비롯해 부일장학회 운영권과 부산 서면의 일대 토지 10만 평을 포기하는 각서를 썼다. “그러나 이는 당시 박정희의 지시에 의해 중앙정보부가 나서서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채백 교수는 “이 자산을 모태로 해 5‧16 장학회가 출범했으며 이 장학회가 부산일보와 문화방송의 소유주로 부상하게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부산일보 강탈 과정은 박정희의 직접적 지시에서 시작됐다. 거사를 앞두고 부산에서 2군 부사령관으로 있던 박정희는 대구사범 동창인 부산일보 주필 황용주를 통해 김지태 사장에게 자금 500만 환을 구해달라 요청했다. 박정희는 직접 사장실을 찾아갔으나 김 사장을 만날 수 없었다. 강탈을 주도한 당시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 박용기의 증언도 이를 뒷받침한다. “박용기의 증언에 의하면 박정희가 1962년 연초에 만난 자리에서 김지태를 조사하라고 직접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해 7월 김지태는 사장에서 물러나고 황용주가 그 자리를 꿰찼다.

박정희 집권 19년 동안 부산시민들은 부산일보를 ‘유신정권의 시녀’로 평가했다. 1979년 부마항쟁 당시 부산의 언론사들은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채백 교수는 “이는 박정희 정권의 철권 통치하에서 언론이 통제된 가운데 언론들은 침묵 내지는 자발적 협조를 하는 가운데 이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과 비판 의식이 높아만 갔기 때문이었다”고 평가한다.

10월 16일부터 이틀 동안 피습당한 언론사는 총 3곳으로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 한국방송공사였다. 부산일보보다는 야당지적 성격이 있다고 평가된 국제신보와 부마항쟁 발발 사실을 유일하게 보도한 기독교방송은 피습당하지 않았다.

‘정권의 하수인’이란 비판을 받았지만 부산일보 내부에서는 저항의 움직임도 있었다. 1973년 부산일보는 경영 위기를 이유로 ‘전사원의 판매요원화’를 추진했고 기자들을 판매 지원과 광고 확장에 동원했다. 경영진이 외신부 기자를 판매부로 발령한 날 부산일보 기자협회는 철야 농성에 들어가며 제작거부를 결의했다. 

채백 교수는 이에 대해 “기자를 판매에 동원하는 인사 조치에 대한 불만이 계기가 된 이 농성과 제작거부는 그동안 편집권 침해와 권력의 언론 통제에 대한 누적된 문제의식이 바탕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실제 기자협회의 요구사항에는 편집국원의 타국 전출 금지뿐 아니라 ‘편집권 침해 방지’, ‘기관원의 편집국 출입금지’가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 시절 부산일보는 ‘언론통폐합’의 수혜자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1도 1사 원칙에 따라 국제신문과 부산일보는 통합된다. 국제신문이 발행을 정지하고 신문사 등록을 자진 취하하는 방식이었다. 국제신문은 윤전기 등 기자재 일체를 부산일보에 양도했다. 부산일보는 1980년대 부산지역 유일한 일간신문, 전국 최대 지역신문으로 성장했다.

당시 보안사 보고서를 보면 통폐합의 본질이 ‘언론 장악’에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보안사는 국제신문을 ‘비판적’, 부산일보를 ‘자발적 협조’로 평가했다. 채백 교수는 “지면의 논조나 기자들 성향 등이 통폐합의 세부 내용을 결정한 중요한 원인이 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라고 했다.

▲ 부산언론사 연구
그러던 부산일보가 1987년 민주화 이후 언론사 최초의 파업을 벌인다. 1988년 1월 22일 재차 결성된 부산일보 노동조합은 회사와 단체 협약에서 편집국장 추천제, 유니온숍 제도, 임금 체계 조정 등 3개 항을 두고 회사 측과 타협을 이루지 못해 7월 11일 파업에 이르게 됐다.

사장 퇴진 요구와 함께 6일 동안 지속한 파업에 전국의 언론사 노조들이 연대했고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부산일보의 간부 사원들도 노조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같은 달 16일 사장은 퇴진했고 노조의 요구는 대부분 관철됐다. 채백 교수는 “부산일보 노조의 이 파업은 박정희 정권 당시부터 소유권이 정수장학회로 넘어가면서 친정부 일변도의 논조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구성원들의 오랜 불만이 밑거름이 돼 민주화 국면에서 편집권 독립이라는 이슈를 제기하며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2011년부터 부산일보는 제 2의 편집권 독립 투쟁을 벌이고 있다. 1948년 편집국장을 지켜내려는 기자들의 모습은 현재 ‘직무정지’ 이정호 편집국장과 편집국 기자들 사이에서 재현되고 있다. 1973년 편집권 침해 방지와 기관원의 편집국 출입금지를 내걸고 제작을 거부한 기자들의 모습은 지난해 정수장학회 특별취재팀 구성으로 다시 나타나고 있다. 1988년 파업으로 노조의 요구를 대부분 관철시킨 기억은 2012년 파업을 앞둔 지금 상황과 닮아 있다.

부산언론사 연구/ 채백 부산대 교수 지음/ 도서출판 산지니 펴냄/ 2012년 8월

박장준 기자 | weshe@media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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