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13일 목요일

역사의 판단 받을 사람은 바로 박근혜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09-12일자 기사 '역사의 판단 받을 사람은 바로 박근혜'를 퍼왔습니다.

새누리당 대통령후보 박근혜의 ‘역사에 판단 맡기기’라는 주장이 비판의 도마에 오른 지는 이미 오래다. ‘정치적 책임 역사에 위탁하기’라고 불러야 마땅한 그의 주장은 주로 아버지 박정희가 저지른 5·16 쿠데타와 ‘10월 유신’ 헌정쿠데타, 그리고 1975년에 일어난 ‘인혁당 관련자 8명’에 대한 ‘사법살인’을 둘러싸고 나온 것이었다.

지난 10일 박근혜가 MBC라디오 에 출연해서 대담을 한 내용이 알려지면서 진보적 언론은 물론이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그의 ‘무지한 역사관’과 ‘안이한 현실 인식’을 꾸짖는 여론이 들끓었다. 손석희가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에게 사과할 생각이 있느냐고 묻자 박근혜는 “그 부분에 대해선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습니까”라고 되물으며서 “그 부분에 대해서도 앞으로의 판단에 맡겨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단언했다.

참으로 무지한 발언이었다. 옛날 사람들이 즐겨 쓰던 표현을 빌리면 ‘자다가 봉창 뜯는 소리’ 같았다. 인혁당 사건에 대해 대법원이 언제 두 가지 판결을 내렸던가?
첫 번째 확정 판결은 1975년 4월 8일 ‘유신독재의 꼭두각시’라는 비난을 받던 대법원에서 내려졌다. 판결 요지는 ‘인혁당을 재건하여 국가전복을 기도했으므로 피고인 8명에게 사형을 선고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자 스위스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4월 8일을 ‘사법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2007년 1월,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부는 사형을 당한 인혁당 관련자 유족들의 청구에 따라 진행한 재심을 마치고 선고 공판을 열었다. 재판장 문용선은 8명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피고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송상진, 우홍선, 여정남에 대해 판결을 선고합니다. 원심을 파기합니다. 피고 각 무죄.” 재심의 피고인 국가가 항소를 포기함으로써 그 판결은 확정되었다. 항소도 상고도 없는 형사사건이 대법원으로 갈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박근혜가 대선캠프의 법률전문가들에게 한 마디라도 조언을 구했다면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재심은 사실 인정에 중대한 오류가 있는 확정판결의 당부(當否)를 다시 심리하는 절차이다. 사법부의 재심은 관례적으로 아주 엄격하게 심사를 해서 개시 결정을 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확정된 재심 판결은 법치주의 사회에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박근혜는 기초적인 법리도 모르는 채 ‘인혁당 사건을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고 주장하고 있다.
박근혜는 지난 11일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서면서 인혁당 사건에 대한 평가를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같은 대법원에서 상반된 판결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조직에 몸담았던 분들이 최근에 여러 증언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감안해서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습니까?” 언론은 이 말이 한나라당 전 의원과 서울대 명예교수의 증언(‘인혁당은 실재했다’)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누가 증언했건 간에, 박근혜는 박정희 정권이 인혁당 사건을 두 차례나 조작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든지, 알면서도 짐짓 두 사건을 동일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든지 둘 가운데 하나임이 분명하다.
1964년 6월 재야와 학생운동권의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무력으로 침묵시킨 박 정권은 8월 14일 ‘제1차 인혁당 사건’을 발표했다. 당시 검찰총장 신직수는 기자회견을 열고 혁신계 인사, 언론인, 학생 41명을 검거했다고 밝혔다. “그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노동당으로부터 지령을 받아 반정부 조직인 인민혁명당(인혁당)을 결성하여 각계 인사를 모으면서 국가 사변을 기획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41명이 구속된 그 사건을 중앙정보부로부터 송치받은 서울지검 공안부 부장검사 이용훈과 검사 김병리, 장원찬, 최대현은 9월 5일,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으며 공소를 유지할 자신이 없다”면서 공소장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신직수는 당직검사를 통해 그 가운데 26명을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 결성’ 혐의로 기소했다. 이용훈, 김병리, 장원찬은 거기 반발하면서 사표를 냈다.
이 사건이 정치·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자 국회에서 ‘고문에 의한 조작’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검찰은 재수사를 통해 12명만 국가보안법이 아닌 반공법으로 다시 기소했다. ‘국가변란’ 혐의는 사라지고 없었다. 1965년 1월에 열린 1심 판결공판에서 피고인 12명 가운데 도예종과 양춘우만 반공법으로 유죄를, 다른 피고인들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2심과 대법원의 상고심도 ‘인혁당이라는 조직을 만든 증거가 없고, 서클 수준의 모임을 만든 것이 반공법 위반’이라고 판결했다.
박근혜가 국회도서관에 가서 두어 시간쯤 인혁당 관련 자료를 뒤져보면, 아니 그럴 시간이 없을 경우 인터넷에 들어가서 검색창에 ‘인혁당’을 치면 제1차 인혁당 사건과 1974년의 제2차 사건(이른바 ‘인혁당 재건위원회’)에 관한 기록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나는 인혁당 관련 혐의를 쓴 8명이 사형 집행을 당한 1975년 4월 9일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는 동아일보사에서 자유언론실천운동을 펼치던 언론인 113명이 박정희 정권의 강압과 회유를 못 이긴 그 회사 경영진에 의해 강제해직 당해 종교·시민단체들과 함께 항의운동을 벌이고 있던 시기였다. 그날 오후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인혁당 사람들 불법 사형집행’에 관한 보고회가 열렸다. 8일 오전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이 난 지 18시간만인 9일 새벽 4시부터 8명에 대한 교수형이 집행된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가족들이 아침에 서대문구치소로 면회를 갔을 때 그들은 모두 이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는 사실이 그 모임에서 알려지자 참가자들은 유족을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사형을 당한 송상진의 유족이 4월 10일, 연미사를 드리려고 고인의 주검을 차에 싣고 서울 응암동성당(주임신부 함세웅)으로 가던 길에 녹번동 세거리에 이르렀을 때 경찰이 주검을 빼앗으려고 했다. 종교인들과 유족이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던 과정에서 버스 앞에 누워 항의하던 신부 문정현은 경찰에게 폭행을 당해 지금도 한쪽 다리를 절고 있다. 송상진의 주검을 탈취한 경찰은 어딘가에서 화장을 해버렸다. 고문 흔적을 없애려는 의도가 분명한 일이었다.

인혁당 관련 피고인들의 가족은 그들이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던 한 해 동안 단 한 번도 면회를 하지 못했다. 어린 자녀들은 동네 아이들이 ‘빨갱이의 새끼’라고 놀리면서 매질까지 하는 바람에 눈물로 날을 보냈다. 2007년 8월 21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8부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희생자 8명의 유족 46명에게 국가가 총 245억원을 배상하고, 사형 집행일인 1975년 4월 9일부터 현재까지 연 이자 5%로 계산한 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그래서 배상액은 모두 637억원이 되었다. 유족들은 배상금의 일부를 모아 희생당한 이들을 기리는 재단을 설립했다.

최근 ‘민청학련·인혁당 진상규명위원회’는 “국가기록원으로부터 건네받은 사형집행명령서 등을 검토한 결과 사형당한 인혁당 사람들이 대법원 사형 판결 전에 이미 사형이 확정됐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던 사람이 누구인지는 자명하다.

박근혜가 5·16 쿠데타, ‘10월 유신’ 헌정쿠데타, 인혁당 사건에 대해 ‘역사의 판단에 맡기겠다’고 말할 때, 그 ‘역사’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역사는 인간과 자연이 함께 만들어 나가는 변화의 총체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박근혜가 ‘불가피한 구국의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5·16 군사반란이 4월 혁명의 소산인 민주정부를 뒤엎은 쿠데타라는 사실은 새누리당 간부들 가운데 일부도 인정하고 있다. ‘10월 유신’이 개인의 종신집권을 위해 헌정을 파괴했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하물며 조작된 인혁당 사람들에 대한 ‘사법살인’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박근혜는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그 역사에 대한 판단을 언제 누구한테 맡기려고 하는가? 어제 일어난 일이 오늘에는 역사가 될 수도 있다. 박근혜가 요즈음 즐겨 쓰는 ‘역사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말은 하루가 지나면 역사의 판단을 받게 된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인물은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고 역사를 발전시키겠다는 확고한 의지와 정책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박근혜는 막연하게 ‘국민대통합’과 ‘국민 행복’을 외치고 있다. 그 ‘국민’ 속에는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인혁당 사람들의 유족도, 박정희 정권의 비인간적 노동정책에 항의하면서 스스로 몸에 불을 지른 전태일의 형제자매도, 그리고 박정희 독재체제 아래서 인권 유린을 당하고 생존권을 박탈당한 수많은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박근혜는 명확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김종철·언론인·전 연합뉴스 사장 | cckim99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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