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16일 일요일

현대판 연옥의 발명자들


이글은 한겨레21 2012-09-17일자 제928호 기사 '현대판 연옥의 발명자들'을 퍼왔습니다.
[특집] 인간이길 포기한 범죄자 처벌한다며 물리적 거세, 불심검문 부활 등 인권침해 대책 쏟아내는 정권과 언론… 지난 10년 강력범죄 증가로 보기 힘들지만, 하층민 낙인찍기로 공포 ‘만드는’ 세력에 희생되는 인권

» 중세 교회는 가상의 연옥을 발명함으로써 현실을 연옥화했다. 잠재된 위험을 과장해 공포를 확산하고, 내부의 적을 만들어 예외 상태를 항구화하는 지금은 1천년 전의 현실로부터 얼마나 멀리 와 있는가. 지난 9월2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 거리에서 경찰이 오토바이 운전자를 검문하고 있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문제는 국가의 폭력(공권력)이 ‘인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라는 정당한 목적을 넘어, 폭력의 독점 자체나 국가의 자기보존(권력의 유지와 강화)을 위해 행사될 때 발생한다. 이때 국가는 외부의 위협을 과장하거나 있지도 않은 내부의 적을 날조해냄으로써 폭력의 사용을 정당화하곤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올 심판(종말)에 대한 두려움은 중세 유럽인의 사고와 행동을 통어하는 강력한 규율 수단이었다. 그 공포는 예수 탄생 1천 년이 되는 첫 밀레니엄을 전후해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임박했다던 종말은 오지 않고, 심판에 대한 두려움도 12세기에 접어들며 현저히 약화되기 시작한다. 기독교(가톨릭)의 내세관에 천국과 지옥의 중간지대인 ‘연옥’이 도입(발명)된 게 이즈음이다.
“고대적 보복론으로의 회귀”
연옥은 천국에는 갈 수 없으나 지옥에 보내기도 애매한 죄인들이 지옥에서와 유사한 형벌을 받으며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는 대기소요 정화 공간이었다. 중요한 건 연옥의 죄인들이 감당해야 할 고통스런 정화 기간이 교회와 산 자들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경감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천국에 가리란 확신이 부족한 산 자들은 먼저 간 부모·형제를 위해서는 물론, 자신의 불확실한 사후 미래에 대비하는 차원에서라도 교회의 권위와 가르침에 복종해야 했다. 연옥 신앙을 통해 교회는 신이 전적으로 관장해온 죽음 이후 세계에 대해서까지 지분을 행사하게 됐고, 그 지분은 약화되던 현세의 교회권력을 재활성화하는 수단이 된다. 연옥은 말하자면, 미래(사후 세계)에 속하는 고통의 잠재성을 현행의 공포로 이전시켜 지배 질서를 회복하는 효과적인 권력 장치였던 셈이다.
‘연옥의 정치학’의 핵심은 ‘가공된 공포’의 동원이었다. 유사한 메커니즘을 역사 속에서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폭력의 정당한 독점체”(막스 베버)인 근대국가는 인간의 벌거벗은 본성이 지배하는 ‘자연상태’(만인 대 만인의 전쟁)에 대한 공포를 존재의 근거로 삼았다. 문제는 국가의 폭력(공권력)이 ‘인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라는 정당한 목적을 넘어, 폭력의 독점 자체나 국가의 자기보존(권력의 유지와 강화)을 위해 행사될 때 발생한다. 이때 국가는 외부의 위협을 과장하거나 있지도 않은 내부의 적을 주조해냄으로써 폭력의 사용을 정당화하곤 한다. 지난 세기 숱하게 명멸했던 제3세계 독재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법과 질서 회복을 명분으로 비정상적 통치행위를 정당화했던 20세기 후반의 선진 제국들이 좋은 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치안 조처들은 또 어떤가.
수도권 지하철역과 서울 여의도 대로상에서 일어난 이른바 ‘묻지마’ 칼부림, 전남 나주에서 벌어진 여아 성폭행 사건의 여파가 심상찮다. 윤리와 도덕이 무너지고 국가의 법질서가 무력화된 초유의 비상사태라도 벌어진 듯 언론은 범죄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고 피의자의 성장기와 최근 행적, 수사 과정에서 보였다는 행동 하나 말 한마디를 상세히 전달하는 데 여념이 없다. 당국은 언론의 요청에 부응해 연일 강경한 치안 대책들을 쏟아내고, 여론에 민감한 정치권도 뒤질세라 ‘인간이길 포기한’ 일탈자들에 대한 관용 없는 처벌과 강화된 형사 입법들을 서둘러 약속한다.
사건 발생 뒤 치안 당국이 내놓은 대책이란 한결같이 실효성은 의심되는데 인권침해 여지가 큰 것들이다. 전시행정 혐의가 짙은 특별 방범활동 강화나 수사 전담반 편성이야 국민 불안감 해소 차원에서 불가피한 면이 있다. 전자발찌와 화학적 거세 대상 확대는 인권침해 가능성으로 인해 입법 과정부터 논란거리였던데다, 실효성이 확증된 바 없다는 전문가들의 지적도 적지 않다. 우려스런 대목은 불심검문과 보호감호, 사형제처럼 이미 폐지됐거나 사문화된 조처들이 민심의 동요를 틈타 부활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성범죄자에게 물리적 거세형을 도입하겠다는 황당한 입법안까지 나왔다. “근대적 법의식의 완전한 포기, 원시적 복수 감정에 기초한 고대적 보복론으로의 회귀”(진중권 동양대 교수)라는 비판이 나올 만도 했다.

휴대전화 보급, 신고율 상승 영향

과연 당국과 언론이 우려하듯 한국의 치안 상태는 사회의 안전과 질서를 뒤흔들 만큼 극도로 취약해진 게 사실일까. 경찰이 집계한 지난 10년 동안의 범죄 통계를 보자. 5대 범죄(살인·강도·성폭행·절도·폭력) 발생 건수는 2001년 53만2243건에서 지난해 61만2357건으로 15%가량 증가한 것으로 나온다. 물론 모든 범죄가 늘어난 것은 아니다. 강도는 5692건에서 4126건으로 28%가량 줄었고, 폭력도 33만8045건에서 30만4882건으로 10% 남짓 감소했다. 반면 성폭행은 6751건에서 1만9573건(2.9배)으로, 절도는 18만704건에서 28만2525건(1.5배)으로 늘어 증가세가 가파르다. 살인은 1051건에서 1251건으로 19% 남짓 늘었지만 2009년(1374건)에 비해선 9% 정도 줄어든 수치다.

휴대전화 등 개인 통신기기의 보급이 확대되며 신고율은 지속적으로 상승해온 것으로 보고된다. 특히 성범죄(성폭행) 통계의 경우 신고율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이런 추세를 고려하면 살인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강력범죄의 발생 건수는 오히려 줄어든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가 한층 설득력 있다.

유의할 사실은 이런 공식 통계 역시 범죄의 실상을 정확히 보여주는 것은 아니란 점이다. 공식 범죄 통계는 경찰과 검찰에 신고된 범죄와 자체적으로 인지한 범죄를 합산한 것이다. 발생한 범죄라도 신고되지 않거나 사법 당국에 인지되지 않으면 통계에서 누락될 수밖에 없다. 신고율이 핵심 변수인 셈인데, 휴대전화 등 개인 통신기기의 보급이 늘면서 신고율은 지속적으로 상승해온 것으로 보고된다. 특히 성범죄 통계의 경우 신고율 변수가 절대적이다. 수치심과 2·3차 피해에 대한 우려 때문에 극도로 낮았던 신고율이 여성의 지위 상승과 성범죄에 대한 인식 개선으로 꾸준히 늘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신고율의 상승 추세를 고려하면 살인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강력범죄의 발생 건수는 오히려 줄어든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가 한층 설득력 있다.
이런 현실과 달리 치안에 대한 불안이 가중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 상당수는 언론의 자극적 보도에서 원인을 찾는다. 강력범죄를 보도하는 언론의 최근 행태를 봐도 그렇다. 범죄의 양상이 일반적 형태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예외 없이 범죄의 폭력성과 잔인성을 적나라하게 부각한다. 특정 사건이 사회적 이목을 끌면 평소엔 단신 처리에 그칠 지역의 사소한 사건조차 유사 사례로 묶어 의미를 과장하는 게 예사다. 사실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모방범죄 확산에 대한 우려를 부풀려 사회적 공포심을 키우는 건 관례가 됐다. 지하철역 살인사건 직후인 지난 8월24일, (조선일보) 기획의 문패 제목은 ‘“내가 당할 수도” 국민은 불안하다’였다. 당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으니 불안감을 가져야 한다고 윽박지르는, 전형적인 의제설정형 기획이다.

예비검속 성격마저 가진 ‘주폭과의 전쟁’

물론 언론의 선정적 보도를 특유의 상업주의 탓으로만 돌리는 건 지나치게 평면적이다. 미디어 평론가들은 자극적 범죄 보도를 주도하는 매체들이 대체로 보수 성향의 거대언론이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실제 조두순·김길태·오원춘 사건 같은 충격적 범죄가 발생했을 때 피의자 얼굴을 공개하고 범행 수법과 주변 인물, 과거 행적 등을 가장 적극적으로 보도한 것은 조·중·동을 위시한 보수언론이었다. 한 예로 조두순 사건(2008년 12월) 당시의 기사 건수를 보면 (조선일보)(74건)가 (한겨레)(49건)에 비해 1.5배 남짓 많다. 사건에 접근하는 두 신문의 방식도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 김길태 사건(2010년 2월) 당시 (조선일보)는 ‘감시·처벌 강화’(25%), ‘범인의 일탈성’(20.0%), ‘경찰 부실 대처’(15%) 등의 순으로 기사의 초점을 맞춘 반면, (한겨레)는 ‘수사 과정’(20.0%), ‘경찰 부실 대처’(18%), ‘감시와 처벌 강화’(14.2%) 등의 순이었다. 눈여겨볼 점은 (한겨레)에 비중 있게 등장한 ‘인권옹호’(12.2%)와 ‘사회제도’(8.2%) 프레임이 에선 아예 없거나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양정혜 ‘뉴스 미디어가 재현하는 범죄 현실’)
보수언론의 뉴스 프레임에 의해 만들어지는 메시지는 단순하면서도 명확하다. 흉악한 하층민 일탈자로부터 나와 가족, 사회의 안전을 지키려면 강화된 경찰력으로 신속히 범죄자를 검거해 엄중 처벌하고, 이를 통해 법과 질서를 회복함으로써 사회의 정상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논리를 연장하면, 질서 회복을 위해선 예방적 검속(檢束)이나 출소 뒤 보호감호 같은 초헌법적 조처들도 얼마든지 도입될 수 있다.
지난 5월부터 (조선일보) 후원 아래 경찰이 대대적으로 펼쳐온 ‘주폭과의 전쟁’이 그 징후다. 9월5일 이 신문의 1면 머리기사는 제목에서부터 섬뜩함이 풍긴다. ‘주폭 300명 잡았더니 살인 31% 줄었다’. 기사의 주요 내용은 경찰이 주폭 단속을 시작한 올해 5월부터 3개월간 강력범죄 발생 건수를 셈해보니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살인은 31.2%(77→53건), 강도는 36.6%(246→156건), 성범죄는 5.9%(1633→1537건) 줄었다는 것이다. 통계의 유의미성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이 보도는 국가와 유력 언론이 거리의 주취자를 예비 범죄자로 공식 인증하는 내용이란 점에서 문제가 간단치 않다. 나아가 이 기사는 주폭 단속이 사실상 예비 범죄자에 대한 예방 구금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마저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영구적 실업으로 실추된 국가 권위

눈여겨볼 지점은 또 있다. 단속된 주폭들의 사회적 처지다. 지난 8월17일 주폭 단속 100일을 맞아 서울경찰청이 펴낸 보도자료에는 검거된 주폭 300명의 연령대가 주로 40~50대(75%)이고 노숙인도 40여 명 포함돼 있다는 언급만 있을 뿐 전체 피검자의 직업 분포는 나오지 않는다. 단속 초기 구속된 주폭 피의자 100명 가운데 82명이 무직자였다는 사실([한겨레] 6월19일치)로 유추컨대, 절대다수가 집이 없거나 사는 곳이 일정치 않은 40~50대 실업자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들이 저지른 범죄라는 것도 식당·주점 등에서 행해진 업무방해(구걸·무전취식) 같은, 평소였으면 훈방이나 합의로 마무리됐을 경범죄가 주종이다.

» 치안 불안이 가중되는 이유를 전문가들 상당수는 언론의 자극적 보도에서 찾는다. 주폭 300명을 잡았더니 살인 범죄가 31% 줄었다는 <조선일보>의 자신에 찬 언명은 거리의 주취자들을 '예비 살인자'로 재현하는 효과를 산출했다.

주폭 단속에서 보이는 하층민 일탈자에 대한 처벌과 낙인찍기는 비단 한국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그 기원은 1980년대 영국 대처리즘이다. “사회는 없다. 존재하는 건 개인뿐”이라는 대처의 말은 빈곤과 일탈의 책임을 사회가 아닌 개인에게 묻겠다는 정치적 선언이었다. 그 선언에 담긴 통치 이데올로기는 보수당 집권기 다음과 같은 조처와 상황들로 현실화됐다. 하층민 범죄에 대한 검경의 의도적 이름 붙이기→선별적 정보 유출→보수신문들의 경쟁적 보도→충격과 공포 확산→법질서 회복을 위한 공권력 투입 여론 형성.
스튜어트 홀 등 비판적 연구자들이 볼 때, 오늘날 하층민들이 공권력의 표적이 되는 것은 현대 자본주의 국가가 직면한 ‘정당성 위기’와 결부돼 있다. 고용(노동)이 성장의 함수가 되지 못하는 사회(‘고용 없는 성장’ 사회)에서 실업은 일시적 단계가 아닌 영구 상태가 된다. 사회는 그들의 기여 없이도 충분히 존속할 수 있다. 사회의 부를 키우지는 못하면서 비용(공공지출)만 증가시키는 그들은 ‘존재 자체가 민폐’인 쓰레기로 취급된다.
그런데 국가엔 이 쓰레기(구조적 하층민)를 양산하는 시스템을 변화시킬 능력도 의지도 없다. 여기서 국가는 통치의 정당성 문제에 직면한다. 내부에서 쓸모없고 위험한 존재들이 끊임없이 산출된다면 국가의 통치는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국가는 이제 지배를 정당화할 근거를 다른 데서 찾게 되는데, 다름 아닌 내부의 위험요소를 격리하고 세척하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민폐적 존재인 하층민들은 범죄시되고 격리된다. 이 일련의 절차 속에서 “궁핍의 언어로 쓰였던 이야기는 타락의 언어로 다시 쓰인다.”(지그문트 바우만)
가난이 타락과 범죄로 재정의되는 순간, 빈곤층을 보호해야 한다는 도덕적 부채감은 사라진다. 대신 시민들의 정상적 삶을 범죄로부터 보호하는 일이 국가의 중요 과제로 떠오른다. 결과는 신자유주의 체제 30년 동안 영국과 미국, 이탈리아 등에서 목격한 바대로다. 더 많은 수용시설, 범죄에 대한 무관용, 형량의 강화, 일상의 구석구석까지 파고든 전자 감시장치. 전후(戰後)의 복지국가(사회국가)를 대체한 치안국가의 현실이다.

결국 그들이 바라는 것은 치안국가

이 체제가 지속되는 한 전자발찌·불심검문·보호감호·예비검속 따위의 비정상적 치안 조처들은 꾸준히 양산될 수밖에 없다. 이 예외적 상태를 정상적 상황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은 안전에 대한 확산된 두려움이다. 예외 상태는 이제 일상화·항구화된다. 이 과정에서 희생되는 것이 하층민의 생존권만이 아니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중세 교회는 가상의 연옥을 발명함으로써 현실을 연옥화했다. 민초들이 감내해야 했던 이중(봉건영주와 교회권력)의 수탈이야말로 연옥의 형벌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잠재된 위험을 과장함으로써 공포를 확산시키고, 내부의 적을 만들어 예외 상태를 항구화하는 지금은 1천 년 전의 현실로부터 얼마나 멀리 와 있는가. 그러니 우리는 되물어야 한다. 이 현대판 연옥의 발명자들이야말로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사회의 진정한 파괴자들 아닌가.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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