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16일 일요일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이글은 한겨레21 2012-09-17일자 제928호 기사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를 퍼왔습니다.
[표지이야기]민교협 등 4개 단체 ‘민중후보 추대 위한 연석회의’ 제안했지만 민주노총은 방침 못 정하고 통합진보당은 사실상 분당 과정에 돌입

»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평통사,진보교연등 지난9월5일 오후 서울 민주노총에서 노동자 민중 후보 추대를 제안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그들은 늘 이상주의자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야당과의 연합을 목표로 하는 범민주후보 단일화론이나 야당과의 연합을 목표로하는 전술적 차원의 개방적 독자후보론은 결국 부르주아 야당에 대한 지지 내지는 추종론에 불과한 것.”(1987년 민중후보 추대 단체 성명)

거의 실패, 단 한 번 성공

1987년 겨울, 1971년 이후 16년 만에 민주적 대통령 선거를 치르게 됐다. 그들은 사형선고를 받아가며 민주화 투쟁을 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단식을 하며 싸운 김영삼 전 대통령 둘 다 충분히 진보적이지 않다고 봤다. 김대중·김영삼을 비판할 때 ‘부르주아지’나 ‘부르주아 야당’이라는 일상에서 잘 쓰이지 않는 사회과학 용어도 사용됐다. 그들은 ‘민중후보’라는 온도 높은 단어를 주저 없이 깃발로 내걸었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 지지자부터 진보정치 지지자까지 죄다 뭉쳐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군사독재의 유산과 기득권이라는 더 큰 악에 반대하기 위해서다. 이런 야권연대론자들에게 ‘그들’은 이상주의자였다. ‘그들’은 더 많은 진보적 열정, 더 굳은 진보적 원칙, 더 높은 이상주의가 결국 한국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진보정치 지지자’가 그들을 한국적으로 표현하는 적절한 말일 것이다.

"후보도 찾아야 한다. 이들 단체는 비공식적으로 김상곤 경기도교육감과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 등을 가능한 민중후보군으로 언급했지만, 둘 다 출마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대선에서 거의 실패했고 단 한 번 성공했다. 1987년 민중후보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대선 직전 사퇴했다. 1992년 다시 나선 백기완 소장은 23만8648표(1.0%)를 얻었다. 1997년 ‘국민승리21’의 이름으로 나온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는 30만6026표를 얻었다. 2002년 권영길 전 대표는 95만7148표(3.9%)를 얻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2007년 세 번째 나선 권영길 전 대표는 71만2121표(3.0%)를 득표했다. 그리고 2012년 대선을 앞두고 그들이 다시 나섰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와 전국교수노조, 진보세력 연대를 위한 교수·연구자 모임,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등 4개 단체는 지난 9월5일 서울 중구 정동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분단과 신자유주의 체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노동자·민중 후보 추대를 위한 사회단체 및 인사 연석회의를 제안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2012년에 민중후보를 추대할 필요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극단의 생존의 위기에 있는 노동자·민중의 의사를 수렴하고 이해를 대변할 후보를 추대하여 2012년 대선 국면에서 신자유주의 체제와 분단 체제 극복에 기여하는 진보적 의제들을 전 민중적 요구로 공론화함. 대선 국면을 통하여 위기에 처한 진보정치를 재활성화할 수 있는 노동 중심의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의 초석을 놓음. 인물 구도로 형성되어 패배 가능성이 짙은 대선의 판 자체를 새로운 프레임에 의한 진보적 의제와 담론, 정책 대결의 장으로 전환하여 대선에서 민중 승리의 장을 창출함.”
이들은 특히 민주통합당과 안철수 원장의 한계를 지적했다. “민주통합당의 후보와 안철수 교수만으로 대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 변화를 갈망하는 국민들은 ‘도가니’에 분노하고, 정당을 불신하여 마치 메시아를 기다리듯 안철수의 대선 출마를 고대하고 있다. 하지만 민주통합당의 대선 후보만이 아니라 안철수 교수도 진정으로 고통받는 민중들의 피눈물을 닦아주고 이들이 사람답게 살 세상을 만들어주기에는 뚜렷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야당에 대해서는 “야권도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본질적으로 부르주아지 정당이자 기득권과 연관관계를 맺고 있는 민주당은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민중의 대변자여야 할 진보정당은 자정능력을 상실한 채 사분오열의 상태에 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노동자 중심의 새로운 진보 단일 정당 건설’을 목표로 내세우며 현재 통합진보당과도 명확히 선을 그었다.

완주 대 야권 연대, 반반씩

주체, 전망, 실행 계획, 강령 모든 점에서 ‘민중후보’ 추대 움직임은 아직 빈칸이 많다. 진보정치의 태반과 젖줄 역할을 해온 민주노총은 아직 대선 방침을 정하지 못했다. 민주노총은 이날 회의에 참관 형식으로 참가했다. 대의원대회 등 복잡한 의결 절차를 거쳐야 한다. 9월26일로 예정된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대선 방침이 정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도흠 민교협 상임의장은 (한겨레21)에 “민주노총 없이는 연석회의가 의미 없다. 후보 선출부터 완주까지 민주노총과 함께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과 안철수 원장에 일단 날을 세웠지만, 투표 방침은 여전히 정해지지 않았다. 통합진보당 사태로 진보정치 지지표가 흩어진 까닭이다. 연석회의 준비모임의 한 참석자는 “준비모임 내부 분위기는 민중후보가 완주해야 한다는 사람이 반, 완주하지 말고 야권 연대를 해야 한다는 사람이 반”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후보도 찾아야 한다. 이들 단체는 비공식적으로 김상곤 경기도교육감과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 등을 가능한 민중후보군으로 언급했지만, 둘 다 출마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교육감의 경우 시간도 촉박하다. 선거법상 총선에 출마하는 공직자는 선거 90일 전에 사퇴해야 한다. 김 교육감이 정말 대선에 나오려면 9월 말 교육감직을 사퇴해야 한다. 연석회의 준비모임에 참석한 김종철 진보신당 부대표는 “(후보군은) 여러 분들을 찾아봐야 한다. 비정규직 운동의 상징성이 있는 분을 찾을 수도 있다. 진보신당에서는 홍세화 대표가 (후보 선출이) 어려우면 본인도 출마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설명했다.
늘 그래왔듯, 이번 민중후보 움직임도 ‘야권연대론’과 싸워야 한다. 2002년과 2007년 민중후보 운동에 비해 단점도 있다. 최근 두 번의 대선에서 통합진보당 구당권파 일부도 민중후보 활동에 참여했다. 그 세력은 지금 사실상 난파한 통합진보당에 묶여 있다. 한 참석자는 “연석회의 기준은 그들(구당권파)이 우리가 추대하는 후보를 지지한다면 받겠다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 같이할 수 없다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스스로 제명 한편에선 원내대표 선출

한편 통합진보당은 9월7일 사실상 분당 과정에 들어갔다. 김제남·박원석·서기호·정진후 등 비례대표 의원 4명은 이날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강기갑 대표와 함께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 국민이 바라는 진정으로 혁신된 모습의 진보정치를 만들어가는 데 함께하고자 한다”며 ‘스스로 제명’ 형식을 빌려 탈당했다. 비례대표 의원은 탈당 즉시 의원직을 상실하기 때문에 제명 형식을 빌린 것이다. 구당권파는 이날 오전 오병윤 의원을 신임 원내대표로 선출해 ‘스스로 제명’을 가로막겠다는 뜻을 비쳤다. 강기갑 대표 쪽은 이석기·김재연 의원이 당권 정지 상태라는 점 등을 근거로 원내대표 선출이 무효라고 반박했다.
‘민중’이라는 단어는 뜨겁고 ‘부르주아지’라는 비판은 단호해 보이지만, 현실은 차갑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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