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17일 월요일

“경제파탄은 박정희 책임” 발언한 택시 승객에 징역 2년형


이글은 경향신문 2012-09-17일자 기사 '“경제파탄은 박정희 책임” 발언한 택시 승객에 징역 2년형'을 퍼왔습니다.

ㆍ1970년대 긴급조치 1호~9호 위반 재심만 589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 때문에 논란이 촉발됐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에게 적용된 혐의는 긴급조치 위반이다. 이들 중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은 사람은 24명이다.

그러나 이들 외에 긴급조치 위반으로 형사처벌된 인사는 무려 1140명에 달한다. 대법원이 2010년 긴급조치 전반에 대해 위헌을 선고함에 따라 이들은 모두 재심을 신청할 경우 뒤늦게나마 무죄선고를 받을 수 있다. 암울한 유신정권을 지탱하기 위해 급조한 긴급조치가 40년 가까이 된 지금도 한국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4년 1월8일 긴급조치 1호를 발표하면서 “대한민국 헌법(유신헌법)을 부정, 반대 또는 비방하는 행위를 금지한다”며 “이를 위반하는 사람은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돼 비상군법회의에서 15년 이하의 징역을 받는다”고 밝혔다. 다음해 5월13일에는 1호~7호의 모든 조항을 하나로 담은 긴급조치 9호(국가안정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가 선포된다. 긴급조치 9호는 1979년 12월8일 해제될 때까지 유신정권을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 됐다.

1975년 4월8일 대법원의 인혁당 재건위 사건 상고심 판결문. 서도원·도예종씨 등의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 4·9 통일평화재단 제공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법원 영장없이 체포·구속 가능… 비상군법회의서 초법적 처벌장준하·백기완은 징역 12년형… 정권 비판 시민들 묻지마 탄압

긴급조치는 박 정권에 비판적인 재야 정치인, 교수 등 지식인층을 탄압하는 도구로 쓰였다. 

1974년 1월 전 신민당 국회의원이자 잡지 ‘사상계’를 출판한 장준하씨와 3선개헌 반대투쟁활동을 벌인 백기완 백범사상연구소장은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12년형을 받았다.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였다는 이유 때문이다.

신문기자로 일하던 추영현씨는 “긴급조치 4호는 위기설이 나오니까 정부에서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이라며 “민청학련 사건은 정부에서 조작한 것”이라고 말했다가 1974년 9월 징역 12년을 받았다. 추씨는 37년이 지나서야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명예를 회복했다. 당시 서울고등법원은 “추씨의 발언은 대부분 당시의 국제정세나 남북한 경제 사정 등 시사적인 관심사에 대해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표명한 것뿐”이라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줄 위험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긴급조치 4호는 정부에 비판적인 대학생들에게 재갈을 물렸다. 당시 대학생이던 유인태, 이철씨를 비롯한 민청학련 관련자 32명은 징역 15년부터 사형까지 중형을 받았다. 당국은 ‘인혁당 재건위’의 배후조종을 받아 폭력을 통해 정부를 전복하려 한다는 죄목을 덮어씌웠다.

1974년 9월 비상고등군법회의는 학생시위와 관련된 이해찬, 권일씨 등에게 징역 10년을 내렸다. 대규모 학생시위를 조직하고 민청학련과 관련된 사실을 수사 정보기관에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지난해 10월13일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유신헌법 긴급조치의 위헌 여부를 가리는 공개변론. | 경향신문 자료사진

학생을 변론하던 변호사에게도 긴급조치를 적용했다. 민청학련 관련자 나병식씨 등 11명을 변호하던 강신옥 변호사는 군법회의 법정에서 “애국학생을 빨갱이로 몰아 사형을 구형하는 것은 사법살인”이라며 “악법은 역사적으로 후일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 변호사는 이 발언으로 1974년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을 받았다. 그는 1988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얻었다.

1975년 1월 교회 전도사로 활동하던 ㄱ씨는 “박정희는 장기집권을 위해 긴급조치를 발동했다. 국민들은 벙어리 행세를 하게 됐다”고 이웃들에게 말했다가 징역 2년형을 받았다. ㄴ씨는 이웃에게 “박정희의 3선개헌, 10·17조치, 긴급조치는 현 정권이 무너지기 위한 징조”라며 “현 정부는 부패해서 망한다”고 말했다. 그는 유언비어 날조·유포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1975년 오종상씨는 버스에서 만난 고교 3학년생에게 한 발언 때문에 징역 3년형을 받았다. 그는 “유신헌법 체제하에서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없다. 일본에 팔아넘기던가 이북과 합쳐져 나라가 없어지더라도 배불리 먹었으면 좋겠다”고 한 말이 문제가 됐다. 그에게는 북한을 찬양·동조했다는 혐의가 적용됐다. 그는 35년 만인 2010년에야 무죄를 받았다.

1975년 7월 ㄹ씨는 택시 안에서 “경제 파탄은 박정희에게 책임이 있다. 박정희 도당과 청와대를 때려부숴야 한다”고 발언했다가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곽희양 기자 huiy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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