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4일 화요일

경제민주화를 위한 국민적 대타협, 누가 할 것인가?


이글은 프레시안 2012-09-03일자 기사 '경제민주화를 위한 국민적 대타협, 누가 할 것인가?'를 퍼왔습니다.
[이정전 칼럼] "양극화 해소해야 경제도 산다"

요즈음 정치권의 최대 화두는 '경제민주화'다. 대권주자들도 한결같이 경제민주화를 외치고 있다. 그런 경제민주화에 재벌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비교적 기업 프렌들리하다고 알려진 새누리당의 경제민주화 방안조차 거부하고 있다. 여당의 안이나 야당의 안 모두 대기업 때리기에 불과하다고 불평한다. 그러면서 경제가 매우 안 좋은 현 상황에서 이렇게 정치권이 기업 때리기를 일삼는다면 앞으로 우리 경제가 더욱 더 나빠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말이 경고이지 여기에는 협박이 담겨져 있다. 대기업 때리기를 계속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것인가? 국민들은 대기업이 고용과 저소득계층의 소득을 많이 창출하는 사업에 적극 투자해주기를 간절히 원하는데, 이것을 안 하겠다는 것이다. 8월 말 대한상공회의소, 전경련, 한국경총 등 경제 5단체의 회동에서 협박의 내용이 드러났다. 이들은 경제민주화를 살살 추진할 것을 요구하면서 이 요구를 들어주면 투자와 일자리 창출에 노력해 보겠노라고 말했다.

대기업의 협박은 말로만이 아니라 실천력을 가진 강력한 협박이다. 사실 재계는 과거에도 이런 협박을 수없이 해왔다. 과거 이 협박을 실천하는 가장 유력한 방법은 해외투자였다. 기업가들은 툭하면 우리나라는 기업 해먹기 어려운 나라라고 투덜댔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기업들이 이미 막대한 자본을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유럽 국가, 심지어 미국 등으로 이동시켰다. 전 세계가 시장화 되다 보니 자본이 국경을 넘어 자유스럽게 이동하게 되었다. 컴퓨터 클릭 하나로 대규모 자본이 국경을 넘나든다. 자본의 국가 간 자유로운 이동은 기업가 집단에 막강한 권력을 부여한다. 기업가들은 수틀리면 거액의 자본을 빼내 다른 나라로 옮겨버리겠다고 위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계 모든 나라가 자본유치에 혈안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기업의 이런 협박이야말로 위력적이 아닐 수 없다.

자본이 빠져나가면 당장 국내 산업이 위축되고 실업문제가 터진다. 이런 자본의 해외유출은 정권의 안위에도 심각한 타격을 줄 수가 있다. 경제상황과 실업률이 선거에 심대한 영향을 준다는 점을 민주정부는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기업하기 좋은 풍토의 마련에 정부가 온통 매달리지 않을 수 없다. 역대 대통령들은 당선되자마자 제일 먼저 재계의 거물들부터 만나 이들의 비위를 맞춘다. 바로 이런 약점을 이용해서 기업가들이 투정을 부리면 민주정부도 속수무책이다. 그래서 이런 기업가들의 투정을 어떤 학자는 "자본파업"이라고 표현하였다. 대기업이 자본파업의 카드를 만지작거릴 때마다 정부가 이들의 비위를 맞추다보니 오늘날 재벌의 비대화와 극심한 경제력 집중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고, 반사적으로 경제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면서 사회적 갈등이 크게 불거졌다.

물론, 노동파업처럼 자본가들이 반드시 집단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파업"을 벌이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자본은 수익률에 따라 민감하게 이동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정부의 정책이나 태도가 조금이라도 돈벌이에 지장을 준다 싶으면 누가 앞장서지 않아도 자본가들은 일제히 돈을 외국으로 빼돌릴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그러니 민주정부가 자본가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운신의 폭이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 1990년대 IMF경제위기 앞에서 우리 정부가 얼마나 무력하였던가를 우리 눈으로 직접 목격하지 않았던가. 2008년 세계 경제위기가 터지기 전에만 해도 도도하게 진행되어온 세계화가 국가 단위의 정부를 점차 무력화시킬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다.

그러나 2008년 세계경제위기 이후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 이래 최대의 경제 불황이라고 할 만큼 세계경제가 극도로 위축되어 있다. 심지어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리는 중국의 경제도 매우 부진하다. 그러니 해외투자의 여지도, 자본파업의 여지도 그리 크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는 우리 경제가 살아나야 대기업도 살 수 있다. 이런 사실을 대기업도 잘 알 것이다. 우리 경제를 살리려면 우선 우리 경제가 왜 이렇게 침체되어 있는지부터 깊이 짚어봐야 한다. 물론, 세계경제의 침체가 그 한 요인이지만, 더 근원적인 요인은 극심한 빈부격차다. 실제로 많은 전문가들이 우리 경제가 이제 내수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수년 간 민간소비는 극히 저조하다. 자본주의 경제가 대중소비사회라고 하는데 일반대중의 호주머니에 돈이 없으니 민간소비가 저조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민간소비를 활성화시키고 우리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중소기업을 육성하고, 중산층을 키우며, 저소득계층의 소득수준을 크게 끌어올리는 것이 급선무다. 그리고 이것이 경제민주화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양극화를 대폭 완화하기 위한 참된 경제민주화는 정치구호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단순히 대기업 때리기만으로는 자칫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킬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참된 경제민주화가 결국 대기업도 살고 중소기업도 살며 우리 모두가 사는 길임을 우리 모두 굳게 믿어야 하고, 특히 대기업으로 하여금 이를 믿도록 적극 설득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대타협과 노사 간의 대타협을 일구어내야 한다. 여기에는 진솔한 의사소통의 의지를 담은 정치적 리더십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러나 지금 정치권은 대기업을 살살 때릴 것인가 세게 때릴 것인가에 너무 집착하는 가운데 국민적 대타협을 위한 노력이 실종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오늘날과 같이 세계경제가 극도로 침체에 빠진 상황에서는 정치적 리더십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더 절실하다는 점을 지난 2월 스위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도 읽을 수 있다. 흔히 다보스포럼이라고 불리는 이 세계경제포럼은 정치ㆍ경제 분야의 세계적 지도자들이 모여서 세계경제를 조율하는, 가장 유서 깊은 토론의 장이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 자본주의의 현 주소를 가장 잘 읽을 수 있는 모임이기도 하다. 2012년 다보스회의에는 독일의 총리, 영국의 수상, 미국의 재무장관, 등 정ㆍ관계의 세계적 거물들을 포함하여 2천여 명의 명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겉으로는 성황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회의 분위기는 썰렁하였다. 첫날 회의주제가 "자본주의는 21세기 사회에서 실패하고 있는가"였다. 결국 이 회의는 구체적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한 채, 현 세계경제위기가 시장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이제 정부에 의한 돌파만이 남았다는 데에 대체로 동의하는 정도로 막을 내렸다.

문제는 정부에게도 마땅한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 때에는 최소한 재정지출 확대라는 보도(寶刀)가 선진국 정부의 손에 확실하게 쥐어져 있었지만, 오늘날 각국 정부의 손에는 이 보도가 없다. 북유럽의 국가들을 제외한 선진국 정부 대부분이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기 때문에 정부가 쓸 돈이 없다. 어느 나라나 증세에 대한 반발이 만만치 않다.

정부 재정지출의 적극적 확대가 곤란하다면, 남은 수단은 무엇인가? 참된 경제민주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민적 대타협이 있어야 한다. 이 어려운 시대를 맞아 우리도 과거 스웨덴이 그랬던 것처럼 대타협을 일구어낼 수는 없을까? 대권 주자들 중에서 이런 국민적 대타협을 일구어낼 만한 의사소통 능력과 리더십을 가진 인물은 과연 누구일까?

▲ 수출대기업에만 의존하는 방식으론 경제 살리기에 한계가 있다. ⓒ뉴시스

/이정전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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