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10일 월요일

박근혜 좌회전? 구체적 약속은 철저히 회피


이글은 시사IN 2012-09-10일자 기사 '박근혜 좌회전? 구체적 약속은 철저히 회피'를 퍼왔습니다.
박근혜 후보는 ‘좌클릭 행보’를 이어가면서도 반값등록금·쌍용차 문제 등에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않는다. 중도 유권자를 향해 ‘립서비스’는 계속하되 보수를 의식해 ‘서명’은 하지 않는다.

노무현. 심지어 전태일.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행보가 거침없다. 후보 확정 다음 날인 8월21일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이 있는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전격 방문해 주목을 끌었던 박 후보는, 8월28일에는 서울 창신동 전태일재단을 찾아 ‘좌클릭 행보’를 이어갔다. 재단 측이 방문을 거절하자 박 후보는 곧바로 종로에 있는 전태일다리를 찾아 동상 앞에서 묵념을 했다. 쌍용차 정리해고자 농성장과 용산참사 유가족 방문까지 검토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거침없는 좌클릭 속에서도 ‘집토끼’인 보수 유권자를 흔들림 없이 잡아두는 능력이다. 

박 후보의 파격 행보는 캠프의 좌장급보다는 실무형 전략가들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캠프 전략기획팀장을 맡았던 장경상 전 청와대 행정관은 5년 전 박근혜 경선 캠프에도 참여했던 새누리당의 손꼽히는 전략가다. 경선캠프 총괄본부장이었던 최경환 의원을 거쳐 후보에게 보고되는 구조다. 신동철 여의도연구소 부소장도 전략의 한 축을 담당한다. 보수 성향이 강한 시니어급 인사들과는 달리 실무 담당자들의 중도 지향은 과감하기로 유명하다. 

박근혜 캠프의 전략통들이 말하는, 과감한 중도 지향의 대전제는 두 가지다. 첫째, 보수 고정표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4월 총선에서도 새누리당이 의석수로는 압승을 거뒀지만, 전체 투표 숫자를 비교해보면 보수 성향 표가 진보 성향 표에 아슬아슬하게 뒤졌다. 더욱이 대선은 총선보다 투표율이 높고, 새로 유입되는 표는 중도·무당파 성향일 가능성이 높다. 

둘째, 박근혜가 중도로 달려간다 해도 ‘오른쪽’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2007년 이명박 후보는 중도 지향 정책을 쏟아내다가, ‘오른쪽 빈 공간’을 노린 이회창 후보의 출마라는 돌발 변수를 만나야 했다. 하지만 2012년에는 보수 진영 내의 박근혜 대세론이 원체 강고한 데다가, 2007년과 달리 본선이 박빙일 것으로 전망된다. 오른쪽 유권자들이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없다. 

민주당이 9월 국회 때 법안 던지면?

게다가 박근혜 후보는 박정희라는 한국 보수의 적통 중의 적통을 이어받았다. 보수 유권자에게는 ‘정체불명의 후보’로 보였던 MB와 달리, 정체성을 의심받을 여지가 전혀 없다. ‘박정희의 딸’이라는 보증수표덕분에, 그녀는 마음껏 중도로 달려갈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역설적이게도 박근혜식 중도정치야말로 강력한 ‘박정희 효과’인 셈이다.

여러 조건이 맞아떨어지면서, 박근혜 후보는 가장 부담 없이 고정 지지층과 중도층을 넘나들 수 있는 후보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좌클릭의 한계선’은 있다. ‘반값등록금’을 두고 벌어진 논란은 상징적인 장면이다.

ⓒ뉴시스 8월28일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서울 종로 전태일 다리에 헌화하려 하자,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오른쪽)이 항의하고 있다.

박근혜 후보는 8월23일 새누리당 ‘반값등록금 토론회’에 참석했다. 이날 그녀는 “등록금 부담을 반드시 반으로 낮추겠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MB의 반값등록금 공약을 두고 “부담을 반으로 낮춘다는 취지였다”라던 옛 한나라당의 해명과 정확히 같은 표현이다. 이날 행보가 논란이 되자 새누리당 조원진 의원은 “박 후보의 워딩(표현)에는 반값등록금이란 말이 없고 나중에는 반값이 아니라고 부연까지 했다”라며 박 후보를 엄호했다.

거침없는 중원 공략을 이어가던 박근혜 후보는 왜 반값등록금 앞에서 멈칫했을까. 첫째, 그녀는 지난해에 “결국은 학부모 주머니에서 나오는 세금이다”라며 반값등록금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밝힌 바 있다. 이미 뱉어놓은 말이 중원 공략에 걸림돌이 된 셈이다. 둘째, 박 후보의 중원 공략을 보면, 집권 후에 부담이 될 ‘구체적인 약속’은 철저하게 배제한다. 반값등록금을 약속한 이명박 후보가 집권 후에 곤란해지는 것을 지켜본 박 후보는, 추후 발목이 잡힐 표현을 조심스럽게 걸러내고 있다. 

비슷한 장면은 또 있다. 박 후보는 전태일 동상에 헌화까지 했지만, 정작 새누리당은 국회 환경노동위에서 쌍용차 소위원회 구성을 반대하고 있다. ‘어제의 노동문제’에는 고개를 숙여도, ‘오늘의 노동문제’를 풀어내는 테이블은 회피하는 셈이다. 박 후보는 경제민주화를 핵심 기치로 내걸었지만, 출자총액제한제 부활에는 반대 의견을, 순환출자에 대해서는 현행 순환출자는 인정하고 신규만 금지하자는 의견을, 연기금 주주권 행사에 대해서는 유보 의견을 냈다. 

‘립서비스’는 풍부하되, 구속력 있는 ‘서명’은 없다. 박근혜식 중도 행보의 핵심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덕분에 ‘집토끼’인 보수 유권자와 새누리당의 보수 정치인들은, 박 후보가 집권 후에는 보수 성향으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 때문에 야권의 몇몇 전략통은 박근혜의 ‘서명’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대로 집토끼와 산토끼를 다 잡도록 놔둬서는 곤란하다는 문제의식이다. 이들이 주목하는 장은 9월 정기국회다. 경제민주화, 증세, 교육, 노동 등 박근혜 후보가 중원 공략에 활용한 이슈들을 민주당이 법안으로 만들어 던지면, 박 후보는 보수 유권자의 기대를 저버리고 ‘서명’을 하거나, 중원에서 한 발 물러서는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더욱이 박근혜 후보의 손에는 총선 전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149석이 있다. 정기국회 결과에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구도다.

여러모로 현재 국면은 1948년 미국 대선과 유사하다.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 해리 트루먼은 중도 이미지의 공화당 후보 듀이 대신에 강경 보수파인 공화당 의회를 타깃으로 삼았다. 듀이가 내놓은 중도 의제를 뒷받침하는 법안을 오히려 민주당이 내놓았고,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는 이 법안들을 부결시켰다. 그러자 듀이의 중도 이미지는 증발해버렸다. 

문제는 민주당이 당 차원의 원내 전략을 집행할 능력이 있는가이다. 민주당의 관심은 온통 대선 경선에 쏠려 있다. 경선 과정에서 내부의 상처가 만만치 않고 더욱이 안철수라는 강력한 외부 인력까지 작동해서, 경선이 끝난다 해도 일사불란한 대오로 돌아오리라 기대하기 힘들다는 평이 많다.

천관율 기자 |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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