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4일 월요일

정준길 거짓말…수많은 시민 집단 지성 앞에 무너져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09-23일자 기사 '정준길 거짓말…수많은 시민 집단 지성 앞에 무너져'를 퍼왔습니다.
[미디어현장] 김보협 한겨레 정치부 기자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 캠프에 특수부 검사 출신 아무개씨가 있다고 치자. 그가 어느 날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캠프에서 일하는 대학 동창 정준길씨에게 전화를 건다. “준길이냐? 너 박근혜랑 친하냐? 그럼 이렇게 전해. 우리가 조사해서 다 알거든? 뇌물 준 거랑, 최근까지 만난 남자 있는 거. 박근혜가 대선 후보 등록하는 순간 죽어. 다 죽는다. 꼭 전해!”

정준길씨는 이런 전화를 받고 이틀을 고민한 끝에 기자회견을 한다. 문재인 후보 쪽이 박근혜 후보 불출마를 종용하며 협박했다고. 통화 당사자로 지목된 아무개씨는 통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준길이와는 친한 친구 사이로 농담을 한 거다. 기자 여러분들도 운전하다가 갑자기 친구 생각이 나면 전화하기도 하지 않느냐”고 반박한다. 협박이 아니라는 얘기다. 문재인 후보도 여기에 가세한다.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친구 사이 대화를 정치 쟁점화하는 것은 구태 정치의 전형”이라며 오히려 새누리당을 공격한다. 사실과 진실은, 협박과 농담 사이에서 모호해지고 주장만 남아 날카롭게 대립한다.

그런데 문 후보 쪽 아무개씨와 박 후보 쪽 정준길씨의 통화를 들은 이가 나타난다. 낮말도 듣고 밤말도 듣는 택시기사다. 정씨와 통화하던 아무개씨를 태운 기사다. 대화의 텍스트 뿐 아니라 통화 당시 맥락과 분위기 등 콘텍스트를 다 아는 그가 언론에 자신이 듣고 본 사실을 증언한다. 아무개씨는 처음엔 자가용을 이용했다며 목격자의 존재를 부인한다. 생방송도 펑크 낸 뒤 ‘셀프 사고’를 내고 잠적한다. 언론의 집요한 추적 끝에 아무개씨는 “착각했다”며 택시 이용 사실‘만’을 시인한다. 목격자 택시기사 증언의 핵심인 ‘박근혜 후보 불출마 종용’에 대해서는 아무개씨도, 문재인 후보도 아무 말이 없다. 

낯익은 스토리이다. 주인공들만 바꾼 설정이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정준길씨와, 박근혜 후보와, 새누리당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민주당 문재인 후보 쪽의 공작정치가 만천하에 드러났다며 문 후보가 책임을 지고 대선후보직을 사퇴하라는 요구까지 하지 않았을까. 문제의 언론이 조중동 가운데 하나였다면 어땠을까. 과연 그것이 아무개씨 혼자만의 단독 범행이었겠느냐고 의혹을 제기하면서 집요하게 문 후보의 책임을 추궁하지 않았을까.

©연합뉴스

한겨레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보도했다. 잠적한 정씨가 통화 당시 “우리가 조사해서 다 안다”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에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약점을 찾기 위한 팀이 움직였거나 정보기관의 도움을 받았을 수도 있다. 취재를 통해 사실로 확인된 부분은 아직 없다. 

하지만 사실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난 부분은 있다. 책임 있는 정치인들이라면 그에 대해 답을 해야 한다. 목격자의 증언을 통해, 안 원장 쪽 금태섭 변호사의 기자회견 내용이 공방이 필요 없는 사실이며 정 위원이 협박에 가까운 고압적으로 말했다는 점이 확인된 만큼, 금 변호사의 기자회견을 “구태 정치”라고 비난했던 박근혜 후보는 해명을 해야 한다. 정준길 위원으로부터 허위 보고를 받았다거나 안 원장 쪽을 구태 정치라고 비난한 것이 잘못이라거나, 하다못해 택시기사의 증언을 믿기 어렵다거나.

자칫 본격적인 대선 국면까지 진실 공방으로 이어질 뻔했던 새누리당 정준길 공보위원의 ‘안철수 불출마 협박 사건’은 한 택시기사의 양심적인 제보로 밝혀졌다. 지난 10일 처음 만난 택시기사 이아무개(54)씨의 증언은 매우 구체적이었고 그가 언론에 거짓말을 해서 얻을 실익이 없다는 점에서 진실에 가깝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물증이 필요했다. 택시 블랙박스는 메모리카드 용량이 적고 새 영상이 앞의 것을 덮어쓰는 방식이어서 복원이 어려웠다. 몇 차례 이씨에게 정 위원의 말을 복기해달라고 부탁했고 운행 중 정씨가 서울 광진구 자양사거리에서 “좌회전, 좌회전”이라고 말한 대목을 기억해냈다. 전화기 저편의 금 변호사에게도 같은 작업을 부탁했다. 정씨가 자가용을 이용했다는데 혹시 특이한 대목이 없었느냐고 묻자, 그도 “좌회전”이란 말을 들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보협 한겨레 정치부 기자
그 뒤 정준길 위원의 집과 사무실 주소를 파악해 택시의 동선과 맞춰보니 윤곽이 드러났다. 해당 시각 이동 경로 부근의 폐쇄회로텔레비전(CCTV)과 택시의 운행기록장치(태코미터) 자료만 확인하면 게임은 끝이라고 판단했다. 한겨레가 운행기록을 확보해 보도한 12일, KBS는 CCTV를 확보해 보도했다. 정준길씨는 결국 자신이 착각했다며 두 손을 들었다. 기자는 그날 밤 전문가에게 의뢰한 택시의 블랙박스 메모리카드 복원작업을 중단했다. 

택시기사 증언 보도 이후 기자의 이메일과 트위터, 페이스북으로 제보가 쏟아졌다. 대부분 정씨의 거짓말을 밝힐 비책에 관한 것이었다. ‘안철수 불출마 협박 사건’ 이후 이를 덮으면서 물타기하려는 시도는, 용기 있는 한 시민의 제보와 수많은 시민들의 집단지성 앞에서는 힘을 쓸 수 없었다.

김보협 한겨레 정치부 기자 | media@media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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