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6일 목요일

음란물 뺨치는 성범죄 보도…누가 피해자를 두번 죽이나?


이글은 프레시안 2012-09-06일자 기사 '음란물 뺨치는 성범죄 보도…누가 피해자를 두번 죽이나?'를 퍼왔습니다.
['성폭력', 제대로 이야기하기·⑤] 성폭력 상담자들이 성폭력 보도 비판하는 이유

"핸드폰에는 나체 상반신 사진이 있었다. 가슴을 자신의 팔로 'X'자로 가리고 얼굴은 수치스러운 듯 옆으로 돌린 채였다." 소설의 한 대목이 아니라 기사 속 문장이다. 지난 8월 발생한 서산 아르바이트생 자살 사건에 대한 기사다. 

"나주 성폭행범 수법 보니, 피해여아 볼을…경악", "나주 성폭행 범인, 여아 볼 물어뜯어 경악". 최근 온 국민을 공분케 한 나주 성폭행 사건 관련 기사의 제목이다. 기사 본문의 "아이 볼 물어뜯으며 짐승 짓 했다"는 문장은 엽기 소설의 한 대목 같기도 하다.

성범죄 전문가들은 성범죄가 얼마나 가학적이었는지 낱낱이 보도하는 언론의 최근 행태가 2차 피해를 양산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윤소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활동가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도가니 사건 때도 독자가 상상하게끔, 성인물이나 포르노 소설처럼 보도하는 행태가 있었다. 나주 성폭력 보도 역시 그런 식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서산 아르바이트생 사건 이후 최근의 나주 사건까지 흉악 성범죄가 잇따르며 한국 언론은 지금 성범죄 보도로 달아올라 있다. 언론이 세상에 성범죄 문제를 알려 해결책 모색의 계기를 마련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면, 성범죄 보도 열기는 그야말로 환영할만한 것일 터다. 그러나 (프레시안)과 인터뷰한 성범죄 전문가들은 "그렇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 지난 8월 20일 오전 서산경찰서 앞에서 시민사회단체가 서산아르바이트생 사건과 관련, 경찰의 엄정한 수사와 강력한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뉴시스

"알권리라고? 피해를 전시하는 것"


최지나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성범죄를 둘러싼 언론의 보도는 "알권리 보장이 아니라 피해를 전시하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특히 "이번 나주 사건 보도를 보면 언론이 조장하는 2차 피해가 너무 심각하다"며 우려의 뜻을 나타냈다. 

실제로 '나주 성폭행'이란 키워드로 뉴스를 검색하면 "직장 근육층과 주위 괄약근층 파열로 인한 인공항문(장루) 시술"을 받고 있다고 자세하게 기술한 뉴스가 수도 없이 뜬다. 한 발 더 나가 "중요 부위가 5㎝가량 손상"됐다며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한 기사도 다수였다. 

최 씨는 "어떤 시술을 받았는지 어떤 부위가 어떻게 상했는지 (언론이) 알권리란 명목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이 다 2차 피해에 포함된다"고 강조했다.

▲전남대병원 송은규 원장(맨왼쪽)을 비롯한 의료진들이 3일 오후 전남대병원 6동 7층 회의실에서 성폭행 피해를 겪은 나주 아동의 건강상태를 브리핑한 뒤 일어서고 있다. ⓒ뉴시스

피해여성을 예외적 존재로 만들어가는 언론

흔히 성범죄 피해여성은 수동적이며 자살을 시도할 정도의 우울함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존재로 인식된다. 이 이미지를 확대 재생산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언론이라고 최 씨는 밝혔다. 

최 씨는 최근의 기사를 예로 들었다. (조선일보)는 4일 '성폭행당한 여성, 뇌가 바뀐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성폭행 피해를 겪은 후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겪은 여성 12명의 뇌 영상 검사 결과를 공개하며 "모두 그동안 정신 불안 증세로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어 숱한 언론 매체가 이를 따라서 보도했다. '피해여성 뇌'로 검색하면 현재 약 40개에 달하는 기사와 영상이 쏟아진다. 최 씨는 "언론이 사회적 편견을 조장하면서 (피해여성을) 굉장히 특수하고 예외적이며 괴물 같은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고 말했다.

"성범죄 관련 기사에 여자가 쭈그리고 앉아있는 어두운 사진을 쓰는 것부터가 그런 이미지를 조장한다"며 최 씨는 "성폭력을 이겨내고 밝게 살아가는 여성도 많다"고 강조했다.

상담자들이 성범죄 관련 보도를 잘 보지 않는 이유


김미순 전국성폭력상담소 협의회 공동대표는 "우리 같은 경우는 솔직히 기사를 잘 보지 않는다. 특히나 텔레비전을 잘 안 본다"며 "너무나 (보도가) 디테일해서…"라고 이유를 밝혔다.

"기자의 양심상 그게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의문을 제기한 김 대표는 "(나주 아동의 경우) 빗속에서 이불에 싸여 발견됐다는 정황만 들어도, 그 정도만 보도해도 충분히 추측 가능하다. 성폭력 피해를 겪었다고 하면 다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 대표는 "나도 성폭력 상담소에서 일하는 상담원이지만 아이가 번복진술이나 추가진술하는 상황을 피하려고 이게 성폭력이 확실하다고 확신하면 아이가 더 얘기하고 싶어 해도 그만둔다"며 "(상담원인 나도 그런데) 일반인이 그렇게 자세히 알아야 하느냐"는 물음을 던졌다.

최근 나주 성폭행 사건을 둘러싼 보도를 접한 시민이 피해 아동의 어머니를 향해 쏟아내는 비난 역시 언론이 조장한 2차 피해라는 지적도 이어졌다. 김 대표는 "그 부모가 이제 거기에서 살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며 "우리는 이중 삼중으로 '부모 자격이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말했다.

'피해자' 아닌 '생존자'로 부르는 이유


이윤소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활동가는 "피해자를 무력하고 소극적인 사람으로 규정하지 않기 위해 여성단체는 '피해자'보다 '생존자'라는 표현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이 씨는 "피해자라고 하면 그 사람이 당한 일에 대해서 상상을 하게 된다"며 "그 이후에 그의 삶이 얼마나 불행해졌는지보다 이후에 어떻게 문제를 해결했는지, 사회에 돌아와서 그 피해의 상처에서 벗어났는지가 중요"하다고 밝혔다.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지 그저 "너는 불행하겠구나"라고 단정 짓는 시선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이 씨는 강조했다. 

또한 영상매체의 경우 성범죄를 보도할 때 어떤 영상물을 내보낼지를 고심해야 한다고 이 씨는 지적했다. 이 씨는 "얼마 전 뉴스에서 아동 포르노에 대한 보도를 보는데 교복 입은 여성의 모습을 비춰주더라. 성범죄 관련 보도의 경우 이처럼 보도 자체가 에로물처럼 만들어지는 경우도 많다"고 비판했다.

성폭력 '생존자'가 토크쇼에 나올 수 있는 사회…"피해는 수치가 아니다"

이렇듯 1차 피해뿐 아니라 거듭되는 2차 피해에 고통받는 피해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는 쉽지 않다. 김미순 대표는 "외국의 토론회에 가면 (참가한 외국인이) 과거에 겪은 피해를 당당하게 말하더라"며 피해 사실을 수치로 치부하지 않는 선진국의 분위기를 설명했다. 

한국에서는 한국성폭력상담소가 2003년부터 개최해온 "성폭력생존자 말하기 대회"가 거의 유일한 '말하기'통로다. 미국에선 성폭력생존자 말하기대회가 1971년부터 이미 시작됐다. 

미국에서는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토크쇼에 등장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1986년 첫 방송 후 2011년까지 25년간 미국 최고의 토크쇼로 군림한 (오프라 윈프리 쇼)다. 피해자들은 자신이 겪었던 일을 카메라 앞에서 이야기한다. 

지난해 2월 방영된 "아버지와 오빠에게 성폭행당하다 – 앞으로 나선 쌍둥이 자매"편에선 5살 때부터 성폭행을 당해온 쌍둥이 자매 켈리와 캐시가 출연했다. 9살 때 사촌오빠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오프라 윈프리는 "오빠와 아빠가 한 일 때문에 당신의 영혼을 죽게 하지 말라"고 이들에게 당부했다.

▲ 어린 시절 겪었던 성폭행 피해를 책을 통해 고백하고 성범죄 예방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에린의 <오프라 윈프리 쇼> 출연 모습. 자막의 생존자(survivor)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오프라 윈프리 쇼>캡처

2004년 자신의 성범죄 피해 경험을 서술한 책 (도둑맞은 어린 시절)을 출판한 에린 메린 역시 쇼에 출연해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이어 "우리는 아이들에게 성적 학대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며 아동 성범죄에 안일한 미국 사회를 비판했다.

김 대표는 한국에서 피해자가 나서기 어려운 이유를 "인종차별이 서양에선 심각한 범죄이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선 범죄라는 인식이 약하듯이 인식의 차이가 있다"며 "성범죄 역시 미국,영국,호주 등에선 나이 많은 사람에게도 심각한 범죄지만 아직 우리나라의 인식은 그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복권 기금으로 성폭력 피해자 지원, 한계가 뚜렷

4일 경찰청과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지난해 성폭력 피해 건수는 총 1만 9498건이었지만 공공기관이 운영하는 원스톱지원센터와 해바라기 여성아동센터의 지원을 받은 피해자는 1만2430명으로 63.7%에 머물렀다. 

현재 서울,경기,강원,전남을 제외한 나머지 12개 지역의 원스톱 지원센터는 각각 하나뿐이다. 전남,대전,제주에는 아동전문 심리치료를 제공하는 해바라기 센터가 아예 없다.

여성가족부는 복권기금 사업을 통하여 피해자의 치유·회복 프로그램을 지원해 왔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가 연구해 2012년 3월 발표한 (성폭력피해자 치유회복프로그램 효과성분석 및 매뉴얼개발)을 보면 2010년 복권기금 피해자 치유·회복 프로그램에 참여한 기관은 66개다.

이 기관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개인 상담 진행의 어려움으로 25%의 상담원이 "대상자 개인 사정으로 치료 중단"을 꼽아 가장 높은 응답률을 보였다. 23%는 "복권기금의 회기 제한으로 프로그램이 중단되거나 다른 지원을 끌어와야 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홍보가 부족해 대상자 모집이 어렵다는 답변이 뒤를 이었다. 

한편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여성부에 치료비 지원을 요청한 성폭력 피해자는 1인당 평균 6만1000원의 지원만 받고 있다"는 언론의 보도에 반박했다. 

"전체 지원액을 피해자 수로 나눠도 그것보단 많이 나오는데 무슨 기준으로 그런 기사가 나오는지 모르겠다"며 "애초에 1인당 얼마라고 정해놓은 한도가 없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나주 피해 아동이 추가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나주 피해 아동의 치료비가 1000만 원이라던데 아마 피해가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지원될 것이다"라며 "지원금이 500만 원을 초과할 때는 시군구 단위 해당 병원의료진과 심의회를 한 번 열면 되는데 나주 피해 아동의 경우 피해 정도가 심해서 끝까지 지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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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빛나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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