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16일 일요일

“위에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다”고? 기자 맞습니까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09-16일자 기사 '“위에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다”고? 기자 맞습니까'를 퍼왔습니다.
[미디어현장] 이성재 MBC 카메라기자

집회를 마치고 선후배들과 함께 거리 서명전에 나서던 모습이 이젠 익숙한 일상이 될 무렵, 우리는 170일 전의 일상으로 복귀했다. 반년의 시간이 지난 뒤 다시 마주한 일상은 그 길었던 시간만큼이나 예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우선 예전에는 없던 전혀 새로운 일상이 생겨났다. 기자로, 아나운서로, PD로 현장을 누비던 선배들은 교육인사발령으로 MBC아카데미에 모여 한창 프로그램을 제작해야 할 시간에 브런치를 만들고 요가를 배우고 있다. 정확한 판단과 발 빠른 취재로 특종상을 휩쓸던 선배는 카메라를 빼앗긴 채 용인에 있는 드라마 세트장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을 안내하고 있다. 기자회의 성명서를 도맡아 쓰던 선배는 상암동 신사옥 건설현장에서 카메라를 쥐는 대신 안전모를 쓰고 있다.

일 년에 두어 차례 정기적으로 나던 인사발령은 하루가 멀다 하고 올라온다. 징계도 일상으로 변했고, 그걸 보는 우리들도 이젠 더 이상 놀랍지 않다. 어떠한 원칙과 기준도 없이 마구잡이로 휘둘러대는 보복의 칼춤이 김재철 사장의 마지막 몸부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저 부장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국장에게 거세게 항의하면, 게시판에 윗분들 심기불편하게 하는 글 몇 줄 쓰면 징계가 내려진다. 예전 같아서는 징계가 내려질 것 같으면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했지만 이제는 올라오는 징계자 명단에 내 이름이 빠져있으면 ‘내가 투쟁을 더 열심히 안했나’ 하는 부끄러움에 동료들에게 미안해진다. 오히려 내가 왜 빠졌냐며 항의하는 선후배들도 생겨났다. 매일 사내 인트라넷 시스템에 접속하면 출근시간대에 열리는 기자회의 피케팅과 침묵시위를 중단하지 않으면 징계하겠다는 인사부장의 메일이 날짜만 달리해 도착해있다. 이 모두가 과거에는 없던 일상이다.

있었지만 없어진 일상도 있다. 늘 우리와 함께하던 동료들이 취재현장에서 쫓겨나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지면서 일상에선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해고된 박성호, 이용마, 박성제 선배는 사무실은 물론이고 인사정보시스템에 흔적조차 없다. 파업에 참여했던 보도국 구성원의 절반 가까운 기자들의 손에는 더 이상 카메라와 마이크가 쥐어지지 않는다. 기자로 입사했지만 기사를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하고 카메라를 내려놓아야하는 현실, 이젠 뉴스시스템에 접속조차 할 수 없다. 늘 당연한 듯 손에 있던 모든 것들이 없어졌다. 나의 동료들이 쫓겨난 그 자리에는 파업기간에 들어온 대체인력들이 시용기자와 뉴스영상PD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아직도 선후배들의 핏자국이 흥건한 보도국 사무실에는 동료들의 웃음은 없어지고 보직부장들과 대체인력들의 웃음만 남아있다.

일상이 차곡차곡 모여 이루어진 역사도 없어졌다. 한 달 전에는 내가 4년간 몸담았던, 나의 선배들이 40여년을 일궈온 영상취재부가 하루아침에 공중분해 돼 70여 명의 MBC카메라기자들은 각각 정치부, 경제부, 사회1·2부 등으로 배속되었다. 카메라기자가 한두 명 뿐인 부서장이 사회부의 카메라기자를 ‘빌리러’다니고, 카메라기자가 한 명뿐인 어느 부서는 취재기자들이 카메라기자의 취재일정에 맞춰 제작을 미루는 것도 이제 그들에겐 일상이 되었다. 효율성을 이유로 각 현업부서에 카메라기자를 전진 배치했다고 하는데, 내가 그동안 ‘효율성’이란 단어를 잘 이해하지 못했나보다.

당연한 듯, 늘 있던 일과 존재가 없어지고, 불필요하고 자격 없는 존재들이 당연한 듯 자리 잡고 있다. 

반년 사이에 전혀 다르게 바뀌어버린 지금의 모습들은 우리가 받아들여야할 MBC의 일상이 아님을 모두가 안다. 취재 현장이던 건설 현장이던 일터이자 ‘현장’은 맞지만 십여 년의 시간동안 뉴스만을 만들던 우리네 선배들이 마주할 일상들은 분명 아니다. 마음에 안 든다며 전출 보내고, 말 안 듣는다고 징계하고, 한 사람을 위해 공영방송의 뉴스를 사유화하는 것이 일상이 돼서는 안 된다.

이성재 MBC 카메라기자
우리가 파업기간 동안 돌아가기를 바라던, 우리가 꿈꾸던 일상으로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파업 직전의 부끄러운 일상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너희들이 그러고도 기자냐”, “MBC 나가라”라고 외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뒤로하며 ‘위에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지’, ‘내가 무슨 힘이 있겠어?’라며 자조하고 체념하던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 긴 세월을 싸워온 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당당하게 공정방송 쟁취했습니다!”라며 파업의 마침표를 찍는 그 순간까지, 우리의 원래 일상을 찾기 위한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투쟁이 365일의 일상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성재 MBC 카메라기자 | media@media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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