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1일 금요일

중·일의 갈등, 터지면 한반도에서 터진다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09-21일자 기사 '중·일의 갈등, 터지면 한반도에서 터진다'를 퍼왔습니다.
[정상모의 흥망성쇠] 동북아 영토분쟁의 본질은 일본의 침탈 야욕

역사의 진실은 왜 필요한가. 진정한 평화의 미래를 위해서다.역사의 교훈은 왜 필요한가. 과거의 불행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동북아의 영토분쟁이 일촉즉발의 위기에 이르렀다. ‘9.18 만주사변’ 81주년을 맞은 9월 18일 중국 120여개 도시에서 반일시위가 벌어지는가 하면,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열도)에서는 중국 선단 1천여척이 몰려가고, 중국 감시선과 일본 순시선 60여척이 서로 맞서 대치하는 긴박한 상황이 전개되기도 했다.

“9․18 국치를 잊지 말자”며 일본에 대한 분노가 중국 곳곳에서 폭발했다. ‘전쟁불사론’, ‘경제보복론’ 따위의 강경한 주장들까지 나오는 상황이 돼버렸다. 일본에서도 반중시위와 함께 후쿠오카 중국 영사관이 연막탄 공격을 받는 일이 벌어졌다. 

리언 파네타 미국 국방장관이 물리적 충돌의 심각한 상황을 우려하며 관련국들의 ‘냉정과 자제’를 촉구했다. 그러나 량광례 중국 국방부장은 일본에 대한 추가 행동을 거론하며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중국의 차기 지도자 시진핑 부주석은 미국에게 “개입하지 말라”며 오히려 경고를 하고 나섰다. “일본은 위험한 순간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대일 경고도 단호했다. 마치 교전 사태라도 터질 것처럼 중국과 일본의 관계가 1972년 중·일 수교 이후 최악의 상태에 이른 것이다.

문제의 발단은 일본의 댜오위다오 국유화 조치였다. 이를 현상의 변경 조치로 본 중국이 가만히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중국인들이 ‘국치’로 여기는 ‘만주 사변의 날’을 맞아 어찌 일본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지 않겠는가. 일본은 1931년 9월 18일 만주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일본군 스스로 만철 선로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 쪽 소행이라고 트집 잡아 ‘만주 사변’을 일으켰다.  

일본군은 몇 개월 만에 만주 지역을 점령하고 1932년 3월 1일 일본의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세워 만주를 일본 침략전쟁의 병참기지로 만들어 버렸다. 중국인들로서는 ‘만주 사변’이 치욕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댜오위다오는 1894년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일본을 이기고 빼앗은 중국 고유의 영토라는 게 중국인들의 생각이다. 일본의 국유화 조치를 영토 침탈 행위로 볼 수밖에 없는 중국인들이 이를 용납하겠는가.

일본이 침탈 야욕을 부리는 독도나 이른 바 북방 4개섬인 남쿠릴열도 문제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의 제국주의 침탈에서 동북아의 영토 분쟁이 비롯됐다는 게 문제의 본질이라는 얘기다.  

대한제국이 일제의 침탈 야욕을 우려해 1900년 칙령 제41호로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했음에도 일본 정부가 뒤늦게 1905년 4월 독도를 시마네현으로 편입시킨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었겠는가. 러시아와 전쟁 중이던 일본이 독도와 그 주변의 군사적 가치가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일본 해군이 독도와 일본 본토를 잇는 해저선을 부설하여 울릉도에 설치한 망루로 블라디보스토크로 항해 중인 러시아 함대를 추적할 수 있어 이를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남쿠릴열도가 일본 영토로 된 것은 1855년 시모다조약과 1875년 페테르부르크 조약에 의한 것이다. 러시아가 크림전쟁(1853~55년)에서 패배함에 따라 일본에게 넘겨 줄 수밖에 없었다. 

크림전쟁 때 러시아를 공격하기도 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 해역을 군사적 거점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이처럼 일본과 가까운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해양세력의 압력에 러시아가 굴복하고 만 것이다.

1943년 12월 카이로선언을 보면, 일본은 폭력과 탐욕에 의해 약탈한 모든 지역으로부터 축출되도록 적시되어 있다. 1945년 7월 포츠담선언에서도 카이로선언 조항의 이행을 다짐했다. 두 선언대로 일본이 제국주의 침탈을 시작한 청․일전쟁 이전의 시기까지 소급해 일본의 전쟁 책임을 물었다면 동북아의 영토 분쟁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미국의 입장과 정책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세계대전 직후만 해도 미국은 강중약일(强中弱日), 즉 중국을 강화시키고 일본을 약화시켜 동북아의 전략적 이익을 도모한다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공산화와 소련의 핵개발, 한반도전쟁 등 냉전이 격화되면서 미국의 정책이 일본을 중시하는 쪽으로 바뀌게 됐다.

마침내 미국 주도로 진행된 샌프란시스코 대일 강화조약이 1951년 일본의 전쟁 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고 일본에게 관대하게 체결돼 버렸다. 일본이 침탈한 지역을 반환하도록 전후 처리를 분명하게 하지 못함으로써 동북아 영토 분쟁의 불씨를 남기고 만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로 인해 동북아 영토 분쟁이 터지게 됨은 물론, 일본과 한국, 중국, 러시아 사이의 역사적 화해, 나아가 동북아의 평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1954년 말 소련과 일본이 북방 4개 섬 가운데 시코탄과 하보마이 두 곳을 일본에게 돌려주는 쪽으로 문제 해결의 가닥을 잡고 있었으나 미국의 개입으로 소련과 일본의 평화조약이 성사되지 못했다. 일본이 2개 섬을 양보한다면 미국도 오키나와를 일본에게 내놓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미국의 중국 견제와 포위 전략과 함께 미․일 동맹관계가 강화될수록 일본의 역사 및 영토 분쟁 도발이 심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일본 중시와 일본의 침탈 야욕이 함수관계에 있다는 뜻이다. 악화되고 있는 동북아의 영토 분쟁과 역사 갈등에 미국도 책임이 있다는 얘기다.     

일본이 과거 침탈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겠다면, 앞으로도 영토 침탈을 계속하겠다는 뜻인가. 일본은 야만의 침탈 시대로 되돌아가겠다는 속셈인가. 

이제야말로 동북아 영토 분쟁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 특히 미국은 관련된 문서들을 공개하고 전후 처리 과정을 사실대로 규명해야 할 것이다. 일본의 침탈의 역사와 전쟁 책임을 분명하게 하지 않는 한,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은 고사하고 자칫 과거 전쟁과 침탈의 불행이 되풀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상모 평화민족문화연구원 이사장 | sang_1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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