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6일 수요일

진보 언론의 박근혜 사과 비판의 근거는 ‘진정성’?


이글은 미디어스 2012-09-25일자 기사 '진보 언론의 박근혜 사과 비판의 근거는 ‘진정성’?'을 퍼왓습니다.
‘진정성’은 박정희주의자의 논리…다른 접근 필요해

▲ 오늘자 한겨레 1면 기사. 박근혜가 2주만에 말을 바꿨다는 시선이다.

예상했던 대로다. 보수언론은 사과 기자회견문을 높이 평가했고 진보언론은 의문을 표시했다. 그런데 의문을 표시한 방식이 의외다. 사과문의 내용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 ‘진정성’을 믿을 수가 없다는 투다.
한겨레의 비판의 전제는 1면 기사의 제목에서 보이듯 박근혜가 2주만에 말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도 지적하는 바다. 그들은 그렇기에 박근혜가 지지율이 떨어지자 급히 이런 기자회견을 한 것처럼 여겨진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지점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박근혜가 정말로 말을 바꾸었는지 여부는 따져 봐야 할 문제다.
한겨레 등 진보언론이 근 2주간 지적해왔듯, 박근혜의 ‘아버지’ 시대에 대한 인식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고 일관된 흐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의 핵심은 박정희가 조국 근대화의 큰 뜻을 품고 한 시대를 만들었으나, 그런 과정에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은 분들이 있고 그에 대해선 박근혜가 사과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박근혜가 이 인식에서 ‘사과’에 초점을 맞출 경우에는 ‘광폭행보’의 그림이 나왔고 시대정신을 강조할 때엔 ‘최선의 선택’이나 ‘불가피’라는 평가가 나왔을 뿐이다. 그는 아버지가 모종의 욕심에 의해 권력연장을 꾀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독재자에겐 대의와 사리사욕이 구별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중앙일보 김진이 말하는 것처럼 그의 머릿속에는 ‘대의를 위한 좋은 독재’와 ‘사리사욕을 위한 나쁜 독재’의 대립항이 있을 것이다.

▲ 오늘자 한겨레 2면 기사. '진정한' 이라는 수식어가 등장한다.

물론 박근혜가 이런 인식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아버지 시대에 일어난 사건의 디테일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시대에 대한 총론적 평가를 물을 때는 공과를 동시에 말하는 식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인혁당이라는 구체적인 사건에 대해 손석희가 묻자 “두 개의 판결이 있다”는 식의 어이없는 답변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답변과 이번 기자회견문은 그의 기본적인 역사인식에 모순되는가? 그렇지 않다. 이번에 그가 인정한 것은 5.16, 인혁당 사건, 유신 등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것과 민주주의에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박근혜가 부인을 하려고 해야 할 수 없는 기본적인 원칙들에 불과하다.
박근혜의 역사인식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이런 기본적인 원칙들 위에 다른 원칙을 올려놓는 역사철학(?)을 펼치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경제발전과 국가안보를 추구했지만 그 와중에 ‘본의 아니게’ 희생자가 생겼다는 인식 자체가 바로 그것을 함축한다. 민주주의자라면 민주주의 원칙과 헌법의 가치가 최상위에 놓여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이들에겐 ‘민주주의 원칙을 위반했다’나 ‘헌법에 어긋난다’는 인정이 큰 의미를 차지할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는 민주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객관적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자신의 역사관을 바꿀 이유가 없다. 그 생각에는 헌법이나 민주주의 원칙보다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헌법이나 민주주의 원칙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역사철학이야말로 그가 민주주의자가 아니라는 근거가 된다.

▲ 오늘자 한겨레 3면 기사. '진정성'이 기사 제목으로 등장한다.

사실 인류 역사에서 근대 민주주의가 탄생하고 존재해온 기간은 불과 몇 백 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근대 이전의 위인들을 민주주의적 잣대로 비판하는 것이 사려깊은 일이 아니라면, 당대의 시대상황을 고려하자는 얘기가 전적으로 부당하지는 않다. 대한민국의 지금 시점에서 군부 쿠데타는 말도 안 되는 일로 여겨지지만, 박정희가 5.16을 일으킬 당시만 해도 제3세계 인민들은 자기 나라에서도 이집트 나세르와 같은 강단있는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후 ‘미제국주의’에 맞서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관점을 존중하더라도 한 독재자가 제 머릿속으로 구성한 '대의'를 위해 사람들을 죽인 상황을 정당화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즉 박근혜의 역사인식은 오락가락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종의 논리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한국 사회의 많은 유권자들에게 받아들여지기까지 한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에게 ‘보수’해야 할 가치는 헌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하는 자유민주주의는 본래적 의미의 그것이 아니라 반공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 공산당을 때려잡아야 좋은 세상이 온다는 의미에서의 자유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 헌법에 대한 감수성이 없는 부류라면 인혁당에 대해 박근혜가 두 개의 판결을 말하듯 “두 개의 헌법이 있었고 그중 하나엔 부합하지 않고 다른 하나(유신헌법)엔 부합하지 않았나”라고 말할 것이다. 헌법에 대한 감수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부류라면 “헌법에 어긋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박정희가 추구한 가치는 헌법보다 절실했다”라는 식으로 설명할 것이다. 뉴라이트 학자들의 경우 후자를 택한다. 그리고 박근혜가 전자를 택하다가 최소한의 지적 감수를 거쳐 후자로 이동했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 오늘자 한겨레 3면 기사. 한면에 '진정성'이란 제목이 두 번이나 등장하고 있다.

박정희를 지지하는 한국인들이라면 5.16과 유신이 헌법을 훼손했다는 지적에 대해 “맞다. 그런데 조국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 사람나고 헌법났지 헌법나고 사람났냐. 헌법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헌법을 위해 있는 것이냐. 밥을 먹어야 헌법을 만들지 밥도 안 먹고 헌법을 만들 수 있느냐. 그러므로 밥을 준 박정희가 헌법을 훼손했지만 근본적인 공로가 있는 것이다”라고 답할 것이다. 여기서 공유되는 것은 헌법과 민주주의의 상위에 놓이는 어떤 역사적 목적을 당연시하고 그것을 위한 개인의 희생까지 정당화하는 전체주의적 시각이다. 한국의 많은 유권자들은 아직 이것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러니까 박정희도 박근혜도 지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기가 막힌 현실이라 개탄할 수 있지만 우리가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게 아니라 박근혜 사과의 ‘진정성’을 문제삼는 시선은 어떠한가. 그런 이들은 정반대의 편향으로 박정희의 ‘진심’을 평가한다. 역시 헌법과 민주주의라는 가치에 맞춰 박정희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편이 낭만화한 박정희의 ‘진심’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변한다. 그들은 박정희가 국가를 생각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었고 오직 자기 밥그릇만을 끝없이 늘리기 위해 경제발전을 추구했다고 믿는다. '친박'이 박정희가 경제발전과 국가안보에 대한 진심이 있었다고 말한다면 '반박'은 박정희가 그런 진심은 없었고 안가에다 여자불러다 놓고 양주 쳐먹을 사심만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박정희의 추악한 사심을 폭로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박근혜가 던지는 전선, ‘대의를 위한 좋은 독재’와 ‘사리사욕을 위한 나쁜 독재’의 대립항이 성립한다. '진심'이 논점이 된다면 언제나 박정희는 그 '진심'을 통해 죄사함을 받을 가능성이 생긴다. 박정희의 ‘진심’을 비판하는 이들이 대체로 ‘대의를 위한 좋은 FTA’와 ‘사리사욕을 위한 나쁜 FTA'의 대립항을 받아들이는 이들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 많은 한국인들에게 헌법보다 상위의 가치로 놓여 있는 것은 밥솥이다. 그들이 김일성과 박정희를 구별하는 기준도 어떤 헌법적 가치가 아닌 그정치인들이 만들어낸 밥솥의 크기다. 사진은 롯데마트가 쿠쿠와 제휴해 '통 큰 압력밥솥'을 선보이는 모습. 판매원들의 표정에서 '진정성'이 느껴진다. ⓒ연합뉴스

즉 박근혜의 ‘진정성’을 묻는 것이야말로 박정희의 진정성을 통해 그 시대를 평가할 수 있다는 박정희주의자들의 논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자세다. 우리는 진정성이 아니라 원칙과 절차에 대해 물어야 한다. 물론 한겨레가 말한 진정성은 단지 설명할 수 없는 내면의 무언가가 아니라 이후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박근혜의 역사인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발언을 통해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그 역사인식의 핵심을 비판하지 않고 ‘진정성’이란 말을 사용할 때, 우리는 박정희주의자들의 논법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일 게다. 진보언론이 박근혜 사과를 '진정성'이란 용어로 비판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거기에 있다. 박근혜의 드러난 정치철학과 역사철학을 담백하게 지적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무리해서 비판하지 않아도 어차피 드러날 것들은 드러나게 되어 있다.  

한윤형 기자  |  ahriman@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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