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3일 일요일

새겨들어야 할 이용훈 전 대법원장의 유신 강의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09-22일자 기사 '새겨들어야 할 이용훈 전 대법원장의 유신 강의'를 퍼왔습니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대학 강연에서 법관으로서 겪었던 유신시대의 아픈 과거를 생생히 증언했다. 사법부 수장까지 지낸 이 전 대법원장의 육성 증언은 유신이 그 잘잘못을 역사가 판단하도록 남겨둘 과거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냉철한 판단과 평가를 요구하는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을 웅변으로 증명한다.이 전 대법원장은 어제 고려대 강연에서 1972년 유신을 위한 계엄 선포 직후의 코미디 같은 사법부 풍경을 소개했다. 마리화나 사건, 폭력 사건, 윤락녀 단속과 같은 일반 형사사건들이 하루 사이에 계엄사건으로 둔갑하면서 집행유예 판결에서 징역 3~5년형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재판정에 들이닥친 군인들이 ‘계엄사건’으로 딱지를 붙이자 검사와 판사들이 여기에 맞장구를 쳤다고 한다. 이 전 대법원장은 “폭압적인 정치권력 앞에서 헌법이고 법치주의고 다 소용없는 일이 벌어졌다”며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지만 아픈 과거를 잘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이 전 대법원장은 “유신헌법은 1인 독재가 가능하도록 길을 열어준 것”이라며 “헌법이란 이름으로, 헌법에 기초한 걸로 해서 6년간의 1인 독재가 시작된 게 유신”이라고 말했다. 그는 유신을 독일 나치의 일당독재와 비슷한 것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유신시대의 긴급조치에 대해선 “긴급조치 사건 내내 피고인들은 긴급조치가 위헌이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모두 적법하다고 판단했다”며 “우리 사법 역사의 큰 오점으로 너무 가슴 아픈 일”이라고 회고했다.이 전 대법원장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깨어있는 법률가, 저항하는 시민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법률가들이 법대로 나라가 통치되고 있는지 (검증하는) 비판세력이 돼야 한다”며 “우리나라나 독일에서 법률가들이 사회의 건전한 비판세력이 된 적이 없다는 게 법률가들의 비애”라고 말했다. 그는 “법률가가 역사를 모르면 얼마든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고도 했다. 그는 “악법에 저항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야 선진국”이라며 “저항하는 깨어있는 국민이 있어야 진정한 민주국가”라고 말했다.이 전 대법원장의 강의는 최근 정치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유신에 대한 평가와 관련해 많은 시사점을 준다. 과거의 일을 역사가 판단할 일이라고 묻어두는 국민에겐 미래가 없다. 과거의 사건은 항시 현재를 사는 이들이 평가하고 재해석함으로써 그 존재 의의를 갖는다. 유신에 대한 평가를 흐지부지 묻어두고서 우리 사회가 성숙한 선진사회로 진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정치권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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