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19일 수요일

박근혜가 ‘범죄와의 전쟁’ 얘기한 뜻은?


이글은 시사IN 2012-09-19일자 기사 '박근혜가 ‘범죄와의 전쟁’ 얘기한 뜻은?'을 퍼왔습니다.
박근혜 후보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앞으로 100일간을 특별 안전 확립기간으로 정하자”라고 말했다. 대선 기간과 정확히 겹친다.

장면 하나. 1990년 10월13일,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이른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재집권에는 성공했지만 끊임없이 정통성 위기에 시달리던 군사정권은, 마침 군 보안사령부(현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 스캔들까지 터져 휘청거리던 때였다. 10월13일은 민간인 사찰 규탄 대규모 집회가 예정된 날이었다. 이날 대통령이 “모든 권한을 동원하겠다”라며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하면서, 모든 이슈가 여기로 빨려 들어갔다. 정권은 위기를 성공적으로 탈출했다.

장면 둘. 용산 참사로 이명박 정부가 궁지에 몰렸던 2009년 2월, 청와대는 경찰에 문건 하나를 보낸다. “용산사태를 촛불시위로 확산하려는 반정부 단체에 대응하기 위해 군포 연쇄살인 사건(강호순 사건)을 적극 활용하라.” “경찰의 부정적 프레임을 연쇄사건 해결이라는 긍정적 프레임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로, 언론이 경찰의 입만 바라보고 있으니 계속 기삿거리를 제공하라.” 강호순 연쇄살인 사건을 이용하라는, 여론 조작을 독려한 문건. 이 문건이 폭로되자 청와대는 행정관의 돌출 행동이라며 담당 행정관을 내보내 꼬리를 자른다.

진보층까지 두루 공략할 수 있는 의제

장면 셋. 미국의 정신의학자 제임스 길리건은 교도소의 재활 프로그램 중에서 어떤 것이 출소자의 재범률을 줄이는 데 가장 효과적인지를 연구했다. 두드러지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고등교육. 교도소에서 학위를 딴 재소자의 재범률은 30년간 1%가 채 안 되었다. 미국의 평균 재범률은 3년간 65%다. 

이 연구 결과를 접한 공화당 소속 주지사는 교도소 고등교육 프로그램을 없애버렸다. “학위를 따러 교도소에 들어오려고 범죄를 저지를 것이다”라는 이유를 댔다. 3년 후에는 연방하원에서 다수당이 된 공화당이 재소자 고등교육 지원금마저 없앴다(제임스 길리건, ).

장면 넷. 초등학교 5학년 아들과 2학년 딸을 둔 사회복지사 배미정씨(가명·39)는 이번 대선에서 안철수 원장으로 마음이 기운 중도 진보 성향 유권자다. 배씨는 연이어 쏟아지는 아동 성폭행 보도에 아주 초조하고 불안한 기분이다. “남자 어른이 딸보고 예쁘다고만 해도 덜컥덜컥 마음이 내려앉는다. 요즘은 그런 뉴스만 나오니까… 정치권에서 특단의 조치가 있었으면 좋겠다.”  

‘범죄와의 전쟁’은 보수 정당의 단골 의제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효과가 금방 눈에 띄지 않는 제도적·체계적 접근보다는, 당장 유권자의 피부에 와닿는 강력한 응징과 복수가 핵심 레토릭(수사)으로 떠오른다. 범죄는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가 아니라 ‘전쟁’의 대상이 된다. 보수층과 중도층은 물론 진보층 일부까지 두루 공략할 수 있는, 안전하면서도 효과적인 의제다. 흉악범죄·강력범죄가 사회 이슈가 되면, 정치적으로는 보수 정당에 유리한 국면이 되는 것은 거의 공식에 가깝다. 

ⓒ시사IN 이명익 최근 경찰청은 불심검문을 2년 만에 부활시켰다. 9월5일 서울 종로2가 부근에서 경찰이 검문을 위해 대기 하고 있다.

잇따른 강력 성범죄로 사회적 공분이 높아지면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범죄 이슈를 들고 나왔다. 9월2일 이명박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박 후보는 “앞으로 100일간을 ‘범국민 특별 안전 확립기간’으로 정하고 반사회적 범죄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라는 제안을 내놓았다. 노태우 정권 시절의 ‘범죄와의 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제안인데, 박 후보가 제안한 ‘앞으로 100일’은 대선 기간과 거의 정확히 겹친다.

9월4일 기자간담회에서는 사형제를 폐지하면 안 된다는 의견도 내놓았다. “끔찍한 범죄에 대해서는 흉악범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있어야 한다”라고 이유를 댔다.

사형제 논의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사형제 자체를 폐지하느냐 존치하느냐의 논쟁이 첫 번째다. 박 후보는 이 대목에서는 사형제 존치를 분명히 옹호했다. 

두 번째 차원은, 사형을 실제로 집행하느냐의 문제다. 대한민국은 1997년 이후 15년째 사형 집행이 없는 실질적 사형 폐지 국가다. 제도를 유지하더라도 집행을 하지 않는 국가는 국제 기준으로 사형 집행국과는 다른 대우를 받는다. 이 대목에 대해 박 후보는 모호하다. 이날 간담회에서 사형 집행에 대한 질문을 받고 박 후보는 “예전에도 저는 그렇게 주장한 사람”이라고 답해 집행까지 시사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하지만 박 후보 캠프는 “현장 상황이 산만해서 후보가 사형제 존치에 대한 질문으로 알아듣고 답한 걸로 안다”라고 말했다. 집행에 대한 박 후보의 정확한 의중을 묻는 질문에 캠프 핵심 관계자는 “그 내용으로 후보와 얘기해본 적이 없다. 기류가 어떻다는 말도 글쎄, 하기가 곤란하다”라며 곤혹스러워했다. 

비교적 여론 지지가 높은 사형제 존치는 언급할 수 있어도, 국내외적으로 정치적 부담이 엄청난 사형 집행에 대해서는 태도를 정하지 못했거나 ‘의도적 모호성’을 유지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박근혜 후보의 ‘범죄 마케팅’을 상대하는 야권은 일단 정치적으로는 별 대안이 없다는 표정이다. 

“지나가는 태풍은 맞는 수밖에 없다. 범죄 문제가 이슈가 되면, 제도니 사회안전망이니 얘기해봐야 ‘복수하자’ 정서 앞에 안 먹힌다. 비슷한 사건이 또 터지지 않도록 기도하는 게 유일한 대책이다.” 야권의 한 전략통의 말이다.

신체 절단? 새누리당 과속 조짐

그나마 야권의 위안은 범죄 이슈를 손에 쥔 새누리당에서 과속 조짐이 보인다는 것이다. 의사 출신인 새누리당 박인숙 의원은 성범죄자의 고환을 외과수술로 잘라내는 이른바 ‘물리적 거세법’을 대표 발의했다. 근대 사법체계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신체절단형을 들고 나오면서 박 의원은 “겉으로 변하는 것도 없고, 그렇게 심각한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새누리당 내에서도 “너무 나갔다”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박근혜 캠프의 또 다른 핵심 관계자는 “도대체 박인숙이 누구냐?”라고 기자에게 되물었다. ‘캠프와 전혀 무관한 일’이라는 의미다.

9월6일에는 홍문종 의원이 대정부 질의에서 아예 ‘사형집행론’을 꺼내들었다. 홍 의원은 박근혜 후보의 핵심 조직책으로 꼽히는 최측근이다. 이상일 대변인은 “후보나 당 차원의 논의를 거치지 않은 개인 의견으로 안다”라고 피해갔다. 역시 ‘집행’ 문제에서는 부담을 느끼는 기색이다.

‘프레임 이론’을 정치에 적용한 것으로 유명한 인지과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범죄 이슈는 보수당에 유리한 ‘엄격한 아버지 프레임’에 스위치를 켠다고 분석했다. 엉뚱한 ‘충성 경쟁’만 적절히 속도 조절을 할 수 있다면, 범죄에 대한 공포를 자극하는 것은 보수의 꽃놀이패다. 중도 진보 성향의 배미정씨는 딸이 흉악범죄에 노출되리라는 불안을 덜어주는 정치인이 나온다면, 그때는 진보니 보수니를 따질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천관율 기자 |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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