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3일 월요일

유격대 거쳐 광복군 훈련반으로 장준하는 누구인가 (5)


이글은 프레스바이플 2012-09-01일자 기사 '유격대 거쳐 광복군 훈련반으로 장준하는 누구인가 (5)'를 퍼왔습니다.

▲ 1945년 9월 운남성(雲南省) 곤명(昆明) 당계요(唐繼堯)장군 묘앞에서 그 후손들과 함께 ⓒ 장준하기념사업회

불로하 강변에서 애국가를 합창하고 돌아온 장준하 일행은 유격대 참모 손영한테서 부대 현황과 부근의 지형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이어서 벌어진 오찬 자리에서 사령관 한치륭이 일행에게 일본군의 전황을 물었다. 장준하가 김준엽의 중국어 통역을 통해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들을 자세히 알려주자 한치륭은 자신이 이끄는 유격대의 임무와 현황을 들려주었다. 그 부대는 게릴라전과 정보 수집뿐만 아니라 실제로 군정까지 맡고 있었다.
그날부터 장준하 일행은 손영한테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김준엽이 일본군 부대를 상대로 뿌릴 선전전단을 작성하고 인쇄하는 작업을 도왔다.
그들이 유격대에 편입된 지 열하루째가 되던 날 새벽 3시쯤 막사 부근에서 ‘꽝’ 하는 폭음이 터졌다. 일본군이 던진 수류탄이라고 직감한 장준하와 김준엽은 신발과 소지품을 잽싸게 챙겨 불로하 강변의 갈대밭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수류탄 터지는 소리와 콩을 볶는 듯한 소총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그때 갈대밭에 웅크리고 있는 몇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참모 손영과 장준하의 세 동지였다. 가까스로 습격자들의 포위망을 벗어난 여섯 사람은 어느 산자락에 있는 마을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유격대의 파견대가 나와 있었다. 새벽에 그들을 기습한 적의 정체가 일본군이 아니고 중국의 팔로군이라는 사실을 파견대 사람한테 들은 장준하는 깜짝 놀랐다.
팔로군의 정식 명칭은 국민혁명군 제팔로군(第八路軍)으로서, 1937년의 제2차 국공합작 때 장개석의 국부군과 함께 항일민족전선에서 함께 싸우기로 합의했으나 독자적으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래서 국부군과 팔로군 사이에서는 알력이 끊이지 않았다.
장준하와 김준엽 일행은 손영과 함께 산줄기를 타고 내려가다가 초저녁에 작은 마을을 발견했다. 거기에서 그들은 유격대의 연락책을 통해 사령관 한치륭이 팔로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팔로군이 계속 추격해 오면서 쏘아대는 총소리를 들으면서 그들은 수천 명의 유격대원과 함께 유명한 고양탄광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탄광을 경비하고 있던 일본 경비병들은 탄광 문 앞을 지나가는 유격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장준하가 알아보니 일본군은 국부군과 공산군의 충돌에는 절대 끼어들지 않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밤을 새워 강행군을 한 그들은 먼동이 틀 무렵 전투 지구에서 완전히 벗어난 한 마을에서 군장을 풀었다. 유격대는 거기서 하는 일도 없이 한 주일을 묵었다.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것을 최대 목표로 삼고 있던 장준하 일행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참고 견딜 수 없었다. 거기서 무위도식하며 보내던 일곱 번째 날 그들이 참모장에게 ‘충칭으로 가게 해 달라’고 호소하자 그는 선선히 승낙했다.
“여러분이 지금 목표로 가는 충칭까지는 여기서 6천 리 길이오. 그 안에는 일본군도 있고 중국군도 있고 왕정위군도 있소. 또 세력이 그에 못잖은 토 비(土匪)도 있소. 적이 많고 길이 험하지만 우리 유격대원들은 늘 왕래하는 통로인 만큼 안내원만 따라가면 위험을 피할 수 있소. 그동안 고생들이 많 았소.”([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126쪽)
이튿날인 1944년 7월 28일 저녁, 노을이 질 무렵 장준하, 김준엽, 김영록, 윤경빈, 홍석훈은 참모장과 굳은 악수를 나누고 바람이 휘몰아치는 벌판으로 나섰다. ‘장정(長征)’의 시작이었다.
길이 워낙 멀고 길어서 도중에 안내자가 계속 바뀌었다. 그렇게 릴레이식으로 호송되는 일행이 한 유격부대에서 다음 부대까지 가는 시간은 닷새에서 1주일 가량이나 걸렸다. 그들은 하루에 120~150 리씩이나 걸었다. 중간에 큰 비를 만나거나 친절한 사령관을 알게 되면 며칠을 묵으면서 쉬기도 했다. 중원에서 가장 무더운 8월에 하루 120 리가 넘는 길을 걷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날이 갈수록 다리에 힘이 더 붙고 발바닥이 굳은 살로 두꺼워져서 맨발로 걸을 수도 있게 되었다.
장준하 일행은 40여 일이나 행군을 한 끝에 6천 리 장정의 중간쯤 되는 임천이라는 소도시에 도착했다. 그들은 거기까지 오는 도중에 유격대를 통해 임천에 동포들이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한국인이 집결한 곳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가 어느 부대의 영문에 도착했다.
아, 그런데 불과 1,2분이 지났을까. 별안간 아우성이 저 영문 안에서 쏟아 져 나오는 것이었다.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몰려나오는 환성이 었다.
나는 나의 전신이 흔들리는 것 같은 기분 속에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땅 이 흔들리는 느낌이었을까.
서로 다투어 앞으로 몰려나오는 그 환성의 청년들은 분명 한국인인가. 우리 동포의 뜨거운 환성인가. 핏줄의 힘과 핏줄의 감격이 영문을 미어져라 떠밀 며, 그 영문을 밀어 제쳤다.
그들은 우리를 와락 껴안았다. 전신의 수분은 모두 나의 이목구비로 몰려 빠져나올 곳을 찾는 듯이 벅차게 솟구쳐 눈물이 되었다.
“······얼마나 고생들 하였소?”
“······얼마나 고생스러웠소?”
그것은 정녕 그렇게 그립던 모국어였다. 모국어의 신비가 우리를 드디어 울 리고 말았다.
나는 그 ‘고생스러웠느냐’는 우리말의 합창에 귀가 먹어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그들이 밀고 이끄는 대로 둥둥 떠밀려가 영문 안으로 들어섰다.([돌 베개], 136~137쪽)
장준하 일행이 들어간 곳은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였다. 그 안에 한국광복군 훈련반이 부설되어 있었는데, 주임은 김학규, 그를 돕는 교관은 이평산과 진경성이었다. 훈련반은 약 4개월 전에 설치되었다고 했다.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 총사령부는 한 해 전부터 탈출 학병과 한국 청년들을 모아 왔는데, 그 수가 꽤 많아지자 임천분교에 요청해서 그들을 위한 훈련반을 신설했다는 것이었다.
임천분교의 광복군 훈련반에는 한국 청년이 80여 명이나 모여 있었다. 일본군을 탈출한 학병이 50여 명, 전선 지역으로 장사를 하러 다니다가 중국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갇혔다가 광복군에게 넘겨진 일반인이 몇 명, 왕정위군에서 장교로 있다가 탈출해서 찾아온 사람이 몇 명, 그리고 심지어 접대부 노릇까지 하면서 연락 공작에 참여했던 여성 몇 명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날 저녁 훈련반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환영회가 열렸다. 흙바닥에 가마니를 깐 내무반에 군데군데 등불을 켜놓고 장준하 일행을 맞이하는 조촐한 잔치가 벌어진 것이었다. 독한 중국술인 배갈을 뚝배기에 담아서 차례로 돌려가며 마시던 동지들이 주임 김학규에게 노래를 청하자 그는 함경도 신민요의 노랫말을 바꾸어 신명나게 불렀다.
“석탄 백탄 타는 데 연기가 펄펄펄 나고요/ 이 내 가슴 타는 덴 혁명의 불길이 오른다/ 에헤야 에헤야 혁명의 불길이 오른다/ 사쿠라밭이 떠나서 태평양 보탬이 되고요/ 무궁화가 피어서 3천만 기쁨이 되누나.”
취흥에 겨운 동지들의 입에서 ‘개성난봉가’를 비롯해 팔도강산의 온갖 민요가 쏟아져 나왔다. 환영회는 ‘독립군의 노래’로 끝을 맺었다.

요동만주 넓은 들을 쳐서 파하고
청천강수 수병(隋兵)백만 몰살하옵신 
동명왕과 을지공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 같이 원수 쳐보세나
가세 전쟁장으로, 나가세
전쟁장으로 검수도산(劍樹刀山) 무릅쓰고 나아갈 때에 
광복군아 용감력을 더욱 분발해 
삼천만 번 죽더라도 나아갑시다

이튿날부터 장준하 일행은 일본군 제복을 중국 군복으로 갈아입고 훈련반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첫 날의 감격과 기쁨과 희망은 차츰 시들어들기 시작했다. “하루의 일과라는 것이 중국 국기의 게양식과 하기식 거행에 참가하는 것 외에 하루 한두 시간 정도씩의 도수(맨손) 훈련-중국인 장교 한 사람과 우리나라 장교인 진경성 교관이 지도했다-과 김학규 주임의 한국 독립운동사 강의를 청강함이 고작이고 이평산 씨의 세계혁명사라는 너무도 상식적인 강의가 2,3일에 한 번씩이며 그밖에는 할 일이 없어 온종일 편히 노는 것이 일이었다.”(앞의 책, 143쪽)
학도병이 되기 전에 한두 해씩이나마 대학 강의를 듣다가 온 장준하 일행은 강좌를 개설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장준하가 처음으로 한 강의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가페와 에로스’였다. “오로지 주기만 하는 사랑, 이것이 ‘아가페’라는 사랑의 범주에 속합니다. 그저 완전한 순수로써 마치 분무기처럼 뿜어주기만 하는 사랑입니다”라고 그가 설명하는 대목에서 청중은 물을 뿌린 듯이 조용한 가운데 귀를 기울였다. 강의가 끝나자 폭포수처럼 박수가 쏟아졌다. 그 다음에 김준엽이 사관(史觀)에 관해 강의를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벅찬 보람을 느낀 장준하 일행은 신학, 사학, 철학, 법학, 문학 등 여러 분야로 강의 범위를 넓혀 나갔다.

김종철 (언론인)  |  cckim99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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