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17일 월요일

[문재인 연보]운동권 학생·인권 변호사 … 참여정부 실세 거쳐 제1 야당 주자로


이글은 경향신문 2012-09-16일자 기사 '[문재인 연보]운동권 학생·인권 변호사 … 참여정부 실세 거쳐 제1 야당 주자로'를 퍼왔습니다.

ㆍ민주당 대선 후보 문재인은 누구

“운명이다.”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가 된 문재인 후보는 지난해 정치권에 입문하는 이유를 이 한마디로 표현했다. 그는 “운명 같은 것이 나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어온 것 같다”고 말했다. 

문 후보의 운명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는 친구로 대변된다. 부산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그는 인권·노동 변호사로서 노 전 대통령과 함께 젊은 날을 보냈다. 민주화 운동에도 뛰어들어, 1987년 6월항쟁의 현장에서 두 사람은 함께 싸웠다. 

친구의 부름으로 간 청와대에서 5년을 보냈다. 정치에 반쯤 발을 담근 것이다. 문 후보는 청와대에서 원리·원칙주의자로 불렸다. 꽉 다문 입에 말을 극도로 아끼는 ‘비정치적’ 태도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침착하고 강단 있는 모습은 노 전 대통령의 충격적인 죽음 앞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고, 사람들은 이런 그의 모습에 주목했다. 

그가 지난해 정치를 하겠다고 나섰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변신할 수 있을지 걱정했다. 가장 큰 우려는 권력 의지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상당히 희석됐다. 큰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는 ‘뻣뻣한 부산 남자’는 이제 서울 명동 한복판에서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 춤까지 추고 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쏟아진 정치권의 구애에 손사래를 치던 그가 야당의 대선 후보로 정권 탈환을 향해 뛰고 있는 것이다. 문 후보는 “이명박 정권의 암울한 시대가 나를 불렀다”고 했다. 이명박 정권을 반면교사로 삼고, 참여정부의 과오를 넘겠다는 각오로 정권교체의 선봉장에 나섰다.

대학생 시절 (1972~1980) 대학생 시절 부인 김정숙씨가 문 후보의 머리를 빗겨주며 환하게 웃고 있다.

■ 피 끓는 저항으로 보낸 학창시절

문 후보는 1952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다. 함경남도 함흥에서 피란을 온 부모님은 가난한 삶을 안겨줬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부산에서 학교를 다닌 그는 공부를 곧잘 했지만, 책 읽기를 더 좋아했다. 그렇게 품어온 문학청년의 삶은 대학에 입학하면서 180도 달라졌다. 

경희대 법대에 입학한 1972년 박정희 정권이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학생운동판도 암흑기였다. 3학년이던 1974년,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나섰다. 교내에서 유신 반대 시위를 기획했다 경찰에 붙들렸다. 구류를 살고 풀려났지만 이듬해에는 일이 더 커졌다. 유신 반대 시위가 가장 거셌던 1975년, 문 후보는 시위를 주도했다. 결국 그는 서대문구치소에 구속 수감됐다. 학교에서도 제적됐다. 

석방 뒤 강제징집된 그는 특전사에 배치돼 베레모를 쓴 공수부대 요원으로 복무했다. 군 생활을 하고 나왔지만 세상은 여전히 어두웠다. 

박정희 대통령 피살 이후 신군부가 주도한 12·12 사태가 터졌고, 이듬해 ‘서울의 봄’이 오면서 민주화 열망은 더욱 뜨거워졌다. 문 후보는 또다시 학생운동에 나섰다. 그해 5월 서울 지역 대학생 20만명이 모인 반독재 민주화 요구 시위에 참가했다. 대학 9년차 복학생으로 사법시험을 준비하다 중단하다시피 하고, 후배들과 함께 서울역으로 거리투쟁을 나갔다. 

이번에도 주동자로 찍힌 그에게 계엄포고령 위반 혐의가 씌워졌다. 그리고 뜻밖에 그는 유치장에서 사법시험 합격 통보를 들었다. 문 후보는 “얼떨떨했다”고 한다. 

특전사서 군 생활 (1976) 1976년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 후보가 특전사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

■ 운명적 친구, 노무현과의 만남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한 그는 판사를 지원했으나 임용되지 못했다. 학생운동을 한 전력이 문제가 됐다. 미련 없이 변호사의 길을 택한 문 후보는 ‘김앤장’ 등 유명한 대형 로펌의 제안을 뿌리치고 1982년 부산으로 낙향했다. 

그곳에서 ‘운명적으로’ 노무현 변호사를 만났다. 문 후보는 “그 만남이 내 평생의 운명으로 이어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회고했다. 

합동법률사무소를 개업한 두 사람은 ‘돈 안되는’ 사건을 마다하지 않았다. 창원·경남 지역에 공단이 많아 노동 관련 사건을 주로 맡았다.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저항이 거세지면서 시국 사건 변호도 그들 몫으로 떨어졌다. 그는 “우리 사무실이 부산·경남 지역의 노동·인권 사건 총괄센터가 돼버렸다”고 했다. 

문 후보는 각종 민주화 운동 사건의 변론도 맡으며 진보·개혁 성향 법조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부산·경남지부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나중엔 민주화 운동에 작심하고 나섰다. 서울보다 부산에서 더 뜨거웠다던 6월항쟁에 두 사람은 스스로 나서 ‘야전사령관’이 됐다. 부산 국민운동본부를 조직해 매일 가두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점점 규모가 커져갔다. 두 사람은 불의에 항거하는 데 누구보다 죽이 잘 맞는 동지가 되어갔다. 

하지만 노 변호사가 정치권에 뛰어들자 두 사람은 잠시 이별했다. 노 변호사가 1988년 13대 총선에서 당선되자 문 후보는 지역에서 노동·인권 사건 변호사로 남았다. 

변호사 시절 (1987) 1987년 문재인 후보가 부산의 변호사 사무실에 앉아 있다.

그러다 2002년 대선에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문 후보는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부산선거대책위원회 본부장을 맡았다. 그곳에서 그는 노 후보의 조언자 역할을 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노 후보는 항상 ‘친구 문재인’에게 최종 의견을 물었다. 

대표적인 것이 정몽준 당시 국민통합21 대선 후보와의 단일화 문제였다. 고민하던 노 후보에게 당시 문 변호사는 “반드시 단일화가 필요하다”고 고언했다. 방식도 노 후보에게 불리한 여론조사를 수용하라고 제안했다. 당시 ‘친노무현’(친노) 진영은 이 문제를 놓고 찬반이 갈려 있었다. 이때 문 변호사의 조언에 노 후보도 고민을 접고 여론조사 수용으로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그는 노 후보에게 항상 원칙을 강조했다. 그는 자서전 (운명)에서 “역시 어려울 때에는 원칙에 입각해서 가는 것이 가장 정답이었다. 뒤돌아보면 늘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밝혔다. 이러한 그의 조언은 노 후보를 승리의 길로 이끄는 원동력이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 권력의 중심에 서다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 첫해 문 후보는 청와대에 들어갔다. 민정수석비서관 자리였다. 인권 변호사로 권력을 비판하기만 하던 사람이 권력의 정점으로 올라선 것이다. 자리를 받아들이면서 그는 두 가지 조건을 노 전 대통령에게 말했다. “민정수석으로 끝내겠다” “내게 정치하라고 하지 마라”였다. 결국 둘 다 지켜지지 않았다.

과거 ‘군림과 권위주의’의 상징이던 민정수석실을 개혁했지만 그의 앞에는 난제가 쌓여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북 송금을 조사하기 위해 도입된 특별검사는 당시 노무현 정권엔 받을 수도, 받지 않을 수도 없는 난제였다. 결국 그는 전 정권에 칼을 대는 특검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말자는 노 전 대통령의 의견에 따랐다. 최근엔 이 일에 대해 후회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

이 문제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후보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척을 졌다. 이후 양측의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대북 송금 특검은 이번 경선에서도 두고두고 문 후보에게 큰 짐이 됐다.

노무현의 동반자로 (2007) 2007년 청와대 비서실장 시절 문재인 후보(왼쪽)가 노무현 대통령과 전남 무안의 한 행사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초대 민정수석 1년은 격무의 연속이었다. 이 동안 건강은 상할 대로 상해 가뜩이나 좋지 않던 이를 10개나 빼야 했다. 임플란트를 해 넣었지만 지금도 발음이 부정확하다. 

그는 청와대를 떠나 히말라야 여행 중 노 전 대통령 탄핵 소식을 들었고, 급거 귀국했다. 노 전 대통령의 대리인으로서 헌법재판소에 드나들며 그를 위해 다시 뛰었다. 

2004년 5월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으로 복귀했다. 당시는 천성산 터널 문제와 전북 부안 핵폐기장 건설 문제가 현안이 돼 있을 때였다. 현장을 직접 찾아가며 소통에 애를 썼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이라크 파병이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등도 그가 안고 있는 짐이다. 2007년 3월 청와대 비서실장이 된 문 후보는 이후 노 전 대통령 퇴임 때까지 함께했다.

청와대 생활을 하면서 그는 사생활을 포기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민원이나 청탁, 구설을 극도로 우려해 일 외에는 사람을 만나지 않기로 유명했다. 이호철 민정비서관을 통해 어렵게 찾아온 동창생도 문전박대를 당했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을 위해 작은 잡음이라도 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의 원리·원칙적인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다. 

당시 저녁 술자리에서 그는 ‘소주 폭탄주’만, 그것도 몇 잔만 마셨다. 주위 사람들이 “왜 양주 폭탄주는 안 마시느냐”고 물었다. 문 후보는 “내가 어찌 양주를 마시느냐, 소주면 된다”고 했다.

문 후보는 노 전 대통령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였다. 그는 지금도 그와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라고 말한다. 

문 후보는 노 전 대통령 장례 절차가 진행되던 중에 바깥 사람들에게 눈물을 한 번도 비치지 않았다. 그 절제력과 의연함이 놀랍다는 사람도 많았지만 자책으로 인한 것이라는 시각이 많았다. 그래서 노 전 대통령 서거 책임을 문 후보와, 당시 청와대 내 부산 인맥에 돌리는 사람들도 있다. 노 전 대통령에게 제대로, 아프게 고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 퇴임 후 함께 경남 김해 봉하마을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산 그였지만, 여기저기서 터지는 측근 비리 사건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박연차 게이트’와 노 전 대통령 형 노건평씨 사건 등은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으로 있던 그가 제대로 친·인척을 관리하지 못한 책임으로 돌아왔다. 그 역시 자서전 등에서 “사실 청와대에 있을 때부터 각별히 신경 썼던 일인데 아차 싶었다”고 고백했다.

‘왕수석’으로 불렸지만 5년간의 국정 운영 경험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면 영광만큼 상처도 많았던 셈이다.

‘혁신과 통합’ 상임대표로 야권통합 추진 (2011) 지난해 12월7일 문재인 후보(가운데)가 야권 통합을 위한 한시 정당인 시민통합당 창당대회에 참석하고 있다.

■ ‘정치인 문재인’의 이름으로

문 후보는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당으로부터 부산 출마 제안을 받았지만 뿌리쳤다. 그는 ‘왜 정치를 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난 정치를 모르고, 해본 적도 없다”고 했다. ‘청와대 실장 역할도 정치 아니냐’고 물으면, 그는 “대통령 업무에는 정치적 분야와 행정적 분야가 있다. 나는 그중 행정적 분야를 도운 것”이라고 답하곤 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에도 노무현재단 이사장만 맡았다.

그런 그가 지난해 6월 ‘정치인 문재인’ 명함을 뽑아 들었다. 당시 자서전을 출간하고 전국 주요 지역을 돌며 북콘서트를 했다. 그는 연일 이명박 정부를 비판했다. 

이후 야권 대통합 운동을 추진하는 시민사회 모임인 ‘혁신과 통합’에 들어가 상임대표가 됐다.

지난해 12월 민주당과 야권 대통합을 이룬 그는 곧바로 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 지역구 출마를 선언했다. 모든 것이 빠르게 진행됐다.

그는 부산·경남 지역의 총선을 진두지휘했다. 하지만 ‘본인 지역구에만 치중해 민주당이 부산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3석에 머물고 말았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다만, 그의 총선 승리는 이후 민주당 대선주자 중 가장 높은 여론조사 지지율을 기록하며 급부상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올해 6월 새 지도부 선출 경선에서는 ‘이해찬 대표-박지원 원내대표’의 담합 논란 때 그들에 대한 지지를 밝혔다가 역풍을 맞았다. ‘이-문재인-박 담합’이라는 비판까지 나왔다. 친노가 다른 계파에 공격을 당할 때마다 그 틈에 그의 이름이 끼워졌다. 

그는 6월17일 서울 독립문 앞에서 대선 출마선언을 했다. 이 자리에서 정권교체를 넘어 정치교체, 시대교체를 주창했다. 문 후보는 “나는 오래전부터 대통령을 꿈꿔왔던 사람이 아니다”라고 고백한다. 측근들은 그의 대선 출마를 “단순한 ‘권력욕’이 아니라 정권교체를 위해 필요하다면 기꺼이 자신을 던지겠다는 역사적 소명 의식에서 나온 ‘권력의지’ ”라고 말했다.

친구 노무현이 남긴 숙제를 풀어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다. 자서전 말미에 남긴 “당신(노 전 대통령)은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는 말이 그것이다. 민주당과 지지자들은 일단 다른 후보보다는 문 후보의 손을 들어줬다. 그는 이제 준결승전을 통과한 것이다.

박홍두 기자 ph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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