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일 일요일

오키나와에서 본 오키나와


이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08-13일자 기사 '오키나와에서 본 오키나와'를 퍼왔습니다.

미군기지 오키나와 < 오스프리 후텐마 미군기지 배치반대 > 반미시위. AFP연합

오키나와현의 수도 격인 나하공항에 내리자 아열대의 후끈한 대기가 온몸을 감쌌다. 오키나와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동아시아의 과거와 현재를 상기해볼 때, 오키나와는 두 층위의 역사적 파장을 한반도에 제기한다.
첫째, 근대 전환기의 역사적 파장. 오키나와는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천황제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거듭했던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의 서막을 이룬다. 메이지 시기의 일본은 막부 체제를 청산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제국주의 확장을 기도했는데, 변경이던 홋카이도의 개척(1875)과 독립 왕국이던 류큐국(현 오키나와현)의 처분(1879)이 그 시발탄이다. 이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한 중화 체제의 청산, 동아시아에서 서구 열강과의 패권경쟁, 대만과 조선의 식민화를 통한 완벽한 제국주의 체제로의 변모가 잇따른다. 단순화하면, 근대 오키나와의 역사란 일본의 제국주의적 '시초축적'의 희생양 경로를 띤 것이다.
둘째, 전후 동아시아에서 미국 헤게모니의 거점. 1931년 만주사변에서 출발한 일본의 '15년 전쟁'은 1945년 6월 미군의 오키나와 점령으로 사실상 종결된다. 당시 일본은 오키나와 수비군에게 미군의 본토 진입을 최대한 저지하기 위한 옥쇄투쟁을 전개하라고 명령했다. 오키나와에 진주한 일본군에는 징병·징용당한 대만인과 조선인이 다수 참전했고, 현지 주민 역시 미군과의 오키나와 전쟁에서 15만 명 이상 희생되었다. 종전 이후 오키나와는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 체제를 유지·관리하는 군사전략의 거점이 되었고, 1972년까지 미국은 오키나와를 직접 통치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오키나와의 근·현대사는 이중의 식민지 체제, 즉 일본에 의한 '내부 식민지'이면서 미국 패권의 '명백한 점령지'로 희생되어온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이 사실은 1972년 일본 복귀 이후에도 변함없는 것이 현재 오키나와 문제의 핵심이다. 더 나아가 오키나와는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 유지의 보루가 되어 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때 미군의 전략적 전초기지였던 오키나와는 미-소 냉전기는 물론, 최근에는 북한과 중국 헤게모니의 견제를 위한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의 요충지로 기능해왔다. 오키나와는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모두를 군사적으로 관리하고 견제할 수 있는 미국 패권의 거점이었다.
당연히 이런 오키나와 근·현대사의 전개는 현재 130만여 명에 이르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희생을 강제해왔다. 류큐 처분 이후 1945년까지 오키나와인들은 조선인들과 함께 일본인들에 의한 차별과 배제의 낯선 타자들로 간주돼왔다. 태평양전쟁기의 희생 역시 심각했다. 일본에서는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진 오키나와 전쟁 당시 15만여 명의 오키나와인들은 미군의 진압과 일본군의 집단 자결 명령 속에서 참혹한 죽음을 경험했다. 1972년까지 이어진 미군정기에 오키나와인들은 미군이 점령해 강제수용한 후텐마, 가데나, 헤노코 등 오키나와 본섬의 약 20%를 점유한 미군기지 건설로 토지와 재산을 강탈당했다.

일본과 미국의 이중 억압

오키나와는 아름다운 섬이지만 그 안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기지의 섬'이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이 기지를 점유하고 있는 미군들에게 일본의 주권은 미치지 않으며, 오키나와 주민들의 주권 역시 제한된다. 어떤 점에서 보면 현재의 오키나와는 일본 본도 주권과 미국 패권에의 이중 종속이라는, 1945년에 구조화된 지정학적 모순이 더욱 강화되는 추세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키나와는 우리나라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명백하게 말하면 오늘의 오키나와는 한-미-일 안보 삼각동맹의 상징적 중심축이고, 넓게 보면 주요 2개국(G2)으로 부상한 중국 헤게모니를 저지하기 위한 지정학적 공간이며, 한반도의 분단 체제와 미국 중심의 세계 체제의 가장 강력한 모순을 내포하는 장소이다. 오키나와인들에게 전쟁과 평화는 단순한 추상 개념이 아니고, 그들의 자치와 미래를 고려할 때 심각하게 숙고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 개념이다.
2012년은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 40주년'에 해당하는 해이다. 40년이라는 역사의 시간 단위 앞에서, 오키나와인들은 오키나와의 과거와 미래를 사유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일본으로의 복귀가 오키나와인들의 자치와 주권을 보장해주었는가' 하면, 그 대답은 회의적이다. 오히려 현재 오키나와는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미국의 군사요새화가 더욱 강력하게 진행되는 것으로 보였다.
최근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슈는, 미국이 오키나와 공군기지에 배치하려는 수직이착륙헬기 '오스프리' 저지이다. 미국은 8월에 수직이착륙기 오스프리 22기를 오키나와 미군기지에 배치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동아시아의 안정적인 군사적 지배를 노골화하겠다는 의도이다. 그런데 이 통보는 후텐마 공군기지를 북부의 헤노코로 이전하려는 미군의 계획과 맞물려 주민들의 저항이 증폭하면서 후텐마·헤노코, 카데나 기지 지역의 주민항쟁을 전면적으로 폭발시키는 현 시국의 핵심 문제로 점화되었다.

'오스프리' 반대 투쟁

후텐마 기지의 역외 이전과 관련한 문제는 나하시 주민들의 강렬한 항의 행동과 현민대회를 통해 제기된 문제이다. 1997년 미군에 의한 오키나와 소녀 성폭행 사건이 벌어진 이후, 오키나와현 주민들은 미군기지가 초래하는 폭음(爆音) 문제에 대한 항의 집회와 법적 투쟁, 현민대회 등을 통해 기지 이전 문제를 공론화했다. 후텐마 기지는 나고시의 중앙을 거대하고 기괴하게 장악하고 있는데, 이것은 미군범죄 문제 말고도 주민들의 안전과 건강에 심각한 악영향을 초래해왔다. 실제로 미군 헬기가 인근 대학에 추락하는 등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에 미국과 일본 정부는 이 기지를 북부 해안지역 헤노코로 이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는 것과 동시에 광대한 바다를 매몰해 전투기와 헬기장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인구 1500명의 어촌 지역인 이곳 주민들은 즉각 이 계획에 반발해, 투쟁과 농성을 벌써 3천 일 이상 진행해오고 있다. 헤노코 연안은 매우 아름다운 바다이다. 이곳에는 세계적인 희귀 어족이자 바다소로 불리는 '듀공'의 집단 서식지이고, 멸종위기종인 바다거북의 집단 서식지이기도 하다. 헤노코 주민들은 군사기지가 이전해옴으로써 초래되는 심각한 기왕의 모순과 더불어 오키나와의 환경과 생태에 대한 회복할 수 없는 치명적 문제가 야기되기 때문에, 미군과 일본 정부에 대항해 비타협적 투쟁과 농성을 계속해왔다.
가데나 기지 역시 사정은 비슷했다. 미군 해병대 훈련기지인 가데나 기지 주변에는 100여 명의 현지 주민이 기지 3곳의 출입구를 자동차 등으로 봉쇄하고 철야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특히 최근 미국이 배치하겠다고 통보한 수직이착륙기 오스프리가 가데나 기지에도 배치된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시설공사가 진행될 조짐이 보이자 주민들의 공사 저지 투쟁은 더욱 가열되고 있었다. 농성 현장을 방문해 만나본 대다수 주민들은 60대 이상의 농민들이었다. 이들은 기지 공사를 봉쇄하기 위한 농성과 투쟁 탓에 생업에 상당한 지장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미군기지 문제는 단순한 생업의 장애를 넘어서 이들의 생존권과 주권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침해로 간주되기 때문에 투쟁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투쟁이 거의 10년 이상 전개되자 일본 본도에서도 많은 시민들이 내려와 오키나와 주민의 투쟁에 가세하고 있었다.
후텐마 기지의 폭음소송단을 중심으로 한 장기간의 주민 농성, 헤노코 기지의 해상기지 건설을 저지하기 위한 100일간의 투쟁, 가데나 기지의 헬기장 건설을 봉쇄하기 위한 농민들의 투쟁 등. 오키나와 전역은 미군기지 이전 문제와 수직이착륙기 오스프리의 일방적 배치에 따른 투쟁과 집회로 뜨겁다. 특히 이런 투쟁이 일본 복귀 40주년을 맞이하는 오키나와의 역사적 계기와 맞물리면서, 오키나와의 역사와 정체성을 둘러싼 전후 체제 청산의 문제로 확대되는 추세이다.
그렇다면 오키나와 주민 전체의 반응은 어떠한가. 실제로 오키나와 주민들은 시정촌(市町村)별로 8월 5일에 열리는 '오스프리 배치 반대를 위한 오키나와 현민대회'를 준비하기 위한 각종 집회와 준비위원 결성을 했다. 각 기지에서 진행되는 주민들의 집중농성과 더불어 지난 7월 21에는 나하시의 중심지 국제통거리에서 700여 명의 시민들이 참여하는 오스프리 설치반대 시민집회가 열렸다. 오키나와 현의회 의장은 오키나와현에서 열린 전국의원대회에 오스프리 반대 의견서를 제출했으며, 오키나와 현의회는 오키나와 현지사에게 8월 5일 현민집회에 참석할 것을 요구했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항의 행동이 조직화되고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력한 운동의 동력이 형성되자, 일본 정부 역시 미국 정부에 안전성이 확인되지 않는 이상 오스프리를 오키나와에 배치할 수 없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에 대해 오스프리의 안전성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으며, 이른바 '과부제조기'로 불리는 오스프리 배치를 강행하기 위한 조처를 오히려 빠른 속도로 진행하고 있다. 이것은 오키나와 주민들뿐만 아니라 미군기지가 설치된 본도 주민들에게까지 분노를 확산시키고 있다.
그런데 미 국무성은 오스프리 문제에서 더 나아가 오키나와 주민들의 분노에 오히려 기름을 끼얹는 조치를 발표했다. 지난 7월 24일 미 국무부는 역시 잦은 사고로 공화당 의원이 '가장 비싼 고철 덩어리'라 별명을 붙인 스텔스 기종의 전투기 F22 랩터의 비행제한을 해제하고, 이것을 오키나와의 가데나 공군기지에 배치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과부제조기' 오스프리와 '가장 비싼 고철 덩어리' F22 랩터를 오키나와에 배치하려는 미국의 의도는 무엇일까.
동북아 정세를 군사적으로 관리하려는 목표이겠지만, 그것은 결국 부상하는 중국의 패권을 노골적으로 견제하려는 목적이 핵심일 것이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북한위협론을 포함한 불안정한 한반도 정세의 문제를 그 근거로 삼고 있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오키나와에서는 거의 없다.

오키나와, 대추리 그리고 강정마을

오키나와의 상황 탓인지 중국 역시 오키나와를 분쟁지역화하려는 발언을 최근 들어 계속하고 있다. 오키나와 일본 복귀 4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만 해도 중국 정부는 오키나와는 류큐 처분 이전까지 중국의 조공국이었기 때문에, 오키나와는 중국의 고유 영토였다는 주장을 제기하는 한편, 최근 들어서는 노골적으로 '일본은 오키나와에서 나가라'는 주장까지 펼치고 있다. 이는 대만과 오키나와 열도 중간에 있는 기존 센카쿠 열도와 관련한 일본과의 분쟁이 더욱 확대되는 양상인데, 중국의 이런 신경질적 반응은 결국 미국의 대중국 포위 군사전략에 대한 항의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해석된다.
이런 점에서도 나타나지만, 오키나와의 지정학적·역사적 모순은 극복되기보다는 더욱 첨예하게 확대되고 있다. 그렇다면 현지 오키나와 주민들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떠한가. 오키나와의 평화활동가들과 대화하면서 알게 된 것은,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문제가 한국의 미군기지 문제와 연동되어 있다는 시각이 일반적이었다. 오키나와의 평화활동가들은 가데나·헤노코·후텐마의 미군기지 문제가 결국은 한국의 평택 대추리와 제주의 강정 해군기지 문제와 동일한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
오키나와에 배치되는 오스프리나 스텔스 22기는 단순히 일본의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의 분쟁, 중국과의 대결적 상황과 관련된 문제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한반도에서의 분단 해소나 평화 체제의 구축이 근본적 해법일 것이라고 이들은 말했다. 그래서인지 오키나와 주민들은 필자를 만날 때마다, 한국의 연말 대선에 관심을 보였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만일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리고 어떻게 박정희의 독재를 극복한 한국인들이 박근혜에게 높은 지지율을 보이는지 의아해했다. 오키나와와 한국은 기지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평화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일이 희망이 아닌가 생각했다. 오키나와에 있는 친구들의 현민대회와 투쟁이 승리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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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명원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1993). (시장권력과 인문정신) (연옥에서 고고학자처럼)(말과 사람) 등의 저서가 있다. 현재 (실천문학사) 주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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