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17일 월요일

"의료정책, 전문가들에게만 맡겨놓으면 잘 될까?"


이글은 프레시안 2012-09-17일자 기사 '"의료정책, 전문가들에게만 맡겨놓으면 잘 될까?"'를 퍼왔습니다.


[시민건강공약] 국민들이 공약 만들기에 나선 까닭은?

앞으로 석 달 후면 대선, 향후 대한민국의 5년을 책임질 18대 대통령이 선출된다. 정당들은 너나없이 민생에 관한 공약들을 쏟아내면서, 시민들에게 믿음을 호소한다. 그러나 대선 공약이라는 것은 언제나 소수 전문가의 손을 거쳐 만들어져왔다. 그리고, 유권자인 시민은 그 약속을 막연히 믿을 따름이었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에 많은 영향을 미칠 공약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정작 시민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괄수가제, 영리병원, 의료보험 보장성 등 굵직한 이슈가 가득했던 한 해였지만, 여전히 시민의 목소리는 듣기 힘들다. 이에 '서울대보건대학원'과 보건의료분야의 대표적 시민단체인 '건강세상네트워크'와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시민들이 함께 모여 직접 건강공약을 개발해 볼 것을 제안한다. 앞으로 두 차례에 걸쳐 시민이 정책 형성과정에 참여한 다양한 사례, 그리고 시민이 참여하는 건강공약 개발의 필요성을 싣고자 한다. 그 다음은, 시민이 목소리를 높일 차례이다.(필자 주)

1. 봉인된 목소리

▲ '의료'와 관련해서는 늘 정부와 이해관계자의 대립만 무성할 뿐 국민들이 직접 의견을 내고 토론하고 합의하는 경우는 없다(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 ⓒ연합
얼마 전 '포괄수가제'라는 제도의 도입을 둘러싸고 소동이 벌어졌다. 이 제도의 저지를 공약으로 내건 신임 의사협회 집행부는 다시금 의료계 파업을 거론하는가 하면 공무원인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직원들은 제도를 찬성하는 댓글을 조직적으로 인터넷에 게재했다는 의심을 사기도 했다. 진위공방과 신상털기, 비방광고, 고소까지 이어지면서 포괄수가제는 의사협회와 건보 공단 간의 한판 대결양상으로 나아갔고 이는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포괄수가제라는 제도는 이제 보건복지부와 의사들 간의 일이 되어 버렸다. 곰곰이 생각해보면의약분업, 한약분쟁, 의약품 슈퍼판매 논란 등을 경험한 국민들에게 이런 장면은 별로 낯설지 않다. 그러나 매번 정부와 이해관계자들의 논쟁과 대립에 대한 얘기는 무성한 반면 국민들이 직접 의견을 내고 토론하고 합의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국민들의 목소리가 배제되는 상황은 선거 때도 예외가 아니다. 후보자들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언론보도의 집중조명을 받는 반면, 국민들은 언론이 짚어주는 '관전포인트'를 따라가는 시청자나 관객처럼 여겨지기에 십상이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에서 유권자인 국민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는 투표소 이외에 그리 많지 않다. 지난 총선에서 유행했던 '닥치고 투표'라는 표현은 투표율 말고는 국민들의 참여를 보여줄 방법이 없는 한국 민주주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오늘 한국의 선거는 국민들의 정치가 만개하는 장이 아니라 엘리트 정치인의 경연장처럼 보인다.

국민들이 정책 결정에서 배제된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그 중에서도 전문성이 없다는 이유가 크다. 이름만으로도 어렵기만 한 법과 제도들을 보면 정책이라는 것이 세밀하고 까다로운 학문적, 기술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때문에 다양한 이름이 붙은 셀 수 없이 많은 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전문가들이 모여 연구, 보고서발간, 자문,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한국에서 정책이 만들어지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반면, 정책을 새로 만들기는커녕 현행 제도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비전문적인) 사람들에게 결정을 맡기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것이 비전문가를 배제할 때 이용되는 흔한 논리이다. 아주 틀린 얘기도 아니다. 그렇다면 소위 전문가들에게 결정을 맡겨두면 국민들에게 더 이득이 되는 정책이 나올 수 있을까?

불행히도 한국의 역사는 이런 가정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그동안 국민들의 참여가 전반적으로 배제된 상태에서 만들어지고 실행된 법과 제도들이 더 효과적이었다는 근거는 없다. 우선 전문가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주로는 대학의 관련학과 교수들, 전문직종사자 등)도 오류의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하나의 정답이 나올 수 없다는 학문의 특성상 그렇기도 하거니와 전문가들 또한 공평무사한 사람들이 아니라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집단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이들이 정책결정에서 지금처럼 독점적인위치를 점할 명분은 없으며 국민들이 비전문적이라는 이유로 배제될 이유도 없다.

더 근본적으로는 모든 국가정책의 근간이 되는 가치와 철학은 특정 집단이 만들어낼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을 들여 때로는 협의하고 때로는 대립하면서 쌓아 올린 것이기 때문에 '가치나 철학'은 사회적 합의 과정이 필수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가령 건강서비스를 대중교통이나 관공서와 같은 공공적 서비스라는 시각에서 볼 때와 영리를 위한 의료상품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만들어지는 정책은 180도 달라진다. 제한된 재원으로 건강보험급여를 늘리려고 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결정할 것인지에 따라 보험 정책이 전혀 다르게 결정될 수도 있다.

중앙집중적이고 상명하달식인 정책 문화도 국민의 참여와 의사결정을 억압하는 요인이 되어 왔다. 국가 기관들과 관료들이 수직 서열화되면서 정부 부처들은 마치 제왕적리더의 의지를 실현하는 곳처럼 행동해 왔고 이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관료들에게 국민들은 참여와 의사결정의 주인공이 아니라 상부의 '오더'를 관철하기 위해 '잘 다스려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은 이런 분위기에선 자연스러운 일이다.

2. 관객에서 주인으로, 유권자에서 주권자로

직접 민주주의의 확대, 시민참여에 의한 정치, 토론과 합의의 문화는 국제적으로 대세인 듯하다. 이를 구현하는 방법들에 대해 곳곳에서 연구와 실험이 진행되고 있고 이미 잘 정착된 제도들도 눈에 띈다. 그 때문인지 한국에서도 '소통'이나 '참여'라는 단어들이 귀에 자주 들려온다. 그 의도가 무엇이든 촛불집회를 '천민민주주의'라고 비웃던 4~5년 전에 비해서는 진일보라면 진일보라고 하겠다. 분명히 해야 할 점은 TV토론 프로그램에 시민논객으로 참여하는 것이 '참여'가 아니며 대통령이 방송에 출연하는 게 '소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소통과 참여는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풍성하게 발전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국민들이 모여서 토론하고 합의하여 나라의 정책을 만드는 '소통' 과 국민들이 매일매일 정치의 주인공이 되는 '참여'의 공간을 '제도화'하고 구조로 만들어야 한다. 정치의 구경꾼에서 주인공으로 나설 수 있는 장이 더 많이 열려야, 선거 때도 투표권이 있다는 의미의 '유권자'에서 정치의 권리를 가진 '주권자'로 나아갈 수 있어야 비로소 민주주의가 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3. 국민들이 공약 만들기에 나선 까닭은?

보통 선거공약은 정당과 후보가 던지고 유권자는 이틀 선택한다. 선거 때마다 공약은 정당과 후보가 그 주변에 포진한 전문가와 이익단체의 도움을 받아 만드는 '상품광고'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공약을 만드는 과정이 이미 투명하지 않고, 공약을 만드는 사람들도 더 이상 공정하지 않다. 거기다 대중의 주목을 끌어야 하는 정치인들의 필요에 의해 '상품광고'와 같은 포장이 더해진다. 그래서 이런 '공약'은 국민들에게 식상하고 신뢰감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공약'은 후보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므로 유권자에게는 여전히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 된다. 그러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여기에 고민이 있다. 공익에 충실한 공약, 이익단체에 휘둘리지 않는 공약, 전문가의 전문성과 기능이 아니라 시민의 '가치'를 담는 공약을 만들어보는 것은 불가능한가. 그래서 우리는 반대로 생각해 보았다. 시민들이 공약을 만들고 정당과 후보가 이를 수용하도록 할 수 있다면? 이는 선거와 정책에서 시민들의 주도권을 높여주고 주권자의체험수준을 높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서울대보건대학원'과 '시민건강증진연구소', '건강세상네트워크'가 주관하는 '2012 내가 만드는 건강공약'은 "시민의 보편적 요구, 시민에게 절실한 정책이 '좋은 공약'이다"라는 '시민민주주의적 가치'를 실현하는 시도이다.

국민들의 직접 참여는 민주주의를 한층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 국민들의 의사가 가감 없이 반영된 정책을 만들 수 있다는 면에서 그러하고, 참여를 통해 시민 공동체의 기반이 탄탄해진다는 면에서도 그러하다. 이런 취지에서 우리는 올 대선에 국민들이 직접 토론하고 합의하고 결정하는 '시민참여 공약 만들기' 과정에 주목한다. 10월 13일에 열리는 '2012내가 만드는 건강공약'이라는 시민참여행사가 그것이다. 보건의료 분야에 대해 자신의 건강을 좌지우지할 정책을 시민들이 직접 모여 토론을 통해 만들겠다는 행사다.

이 행사에서는 그동안 정당과 정치인, 전문가들의 전유물이었던 선거공약을 아무런 자격요건 없이 참여한 사람들이 직접 만든다. 성별, 나이, 학력 구분 없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제안하고 토론하고 합의하게 된다. 이런 시도가 더 많아져야 한다. 주권자의 목소리에 씌워진 봉인을 해제하고, 국민들이 생활과 경험에서 비롯된 정책을 제안하며, 토론하고 합의하는 정치가 국민들의 몫이 될 때 민주주의는 앙상한 구호가 아니라 일상의 체험으로 살아있게 된다. 민주주의는 주권자의 체험의 정도만큼 넓어지고 깊어질 수 있다.

행사의 자세한 내용과 참가 신청 방법은 공식 블로그(http://blog.naver.com/healthdemo)를 방문하거나 시민건강증진연구소(070-8659-1848)를 통해 얻을 수 있다. 이번 행사를 통해 합의된 공약은 '2012 시민공약'이라는 이름으로 공표될 예정이며, 참가한 시민들의 이름으로 각 당과 유관기관에 전달될 예정이다. 더불어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각 당의 공약과 차후 구성될 정부의 정책에 이 공약들이 반영될 수 있도록 계속 모니터링 해나갈 계획이다.

▲ '2012 내가 만드는 건강공약'은 시민들과 함께 18대 대통령 선거 건강공약을 직접 만들 예정이다. 이를 위해 오는 26일까지 참가자를 모집 중이다. ⓒ내가만드는건강공약

/시민건강증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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