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24일 목요일

노무현은 마지막까지 이런 대우 받았다.


이글은 프레스바이플 2012-05-23일자 기사 '국가원수 분향소 계단밑 구석에…"관람객 위해 중앙은 안돼"'를 퍼왔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OiQi9CCGUcM

노무현,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고 노무현은 2009년 5월 23일 세상을 떠나 29일에 수원 연화장에서 한줌의 재가 되었다. 그의 유골은 지금 그가 태어나고 자란 봉하마을, 널따란 바위 아래에 안치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다른 의견도 많았었다. 국가 원수로서 당연히 국립묘지에 가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음은 당연하다. 광주에서는 그가 광주가 낳은 대통령임을 잊지 못하겠는지 분장을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비록 그의 육신은 재가 되어버렸지만, 그의 유골을 국립묘지와 봉하마을, 그리고 광주에 분장하자는 것은 아마도 그가 생전에 그렇게도 외쳤던 ‘지역주의 타파’의 정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었을 것이고, 또한 국립묘지에 안장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가 대한민국 대통령이었음을 역사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보편적 상식을 중히 여기는 주장이었을 것이다. 혹자는 작은 비석이 아닌 것에 또 한숨을 쉬기도 한다.
나에게는 그를 생전에 촬영했던 사진 중 잊지 못할 몇 장 있다. 그중 2008년 여름 봉하마을에서 그를 동행 취재하면서 촬영했던 사진 속의 노무현은 사람들 앞에 서면 예의 유쾌한 표정이지만, 잠시 생각에 잠길 때나 뒤돌아서는 순간 그의 얼굴엔 그늘이 졌었다. 혹자는 새로운 권력이 들어선 당시에 이런 식으로 봉하마을에 사람이 모여들고, 전직 대통령이 나서 사람들을 반기고 연설하는 일을 반대했었다.

▲ 생가를 설명하고 있는 고 노무현 대통령

▲ 시민들과 대화를 마치고 사저로 들어가기 전의 모습

아마도, 그와 가까운 사람 중에 그 혹자들이 있었더라면 오늘날 역사는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지만… 그는 계속 몰려드는 사람들을 만났고, 이에 비례해 이명박 정부의 압력은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치졸하게 그의 주변을 털고 있었다. 왜 아닐까? 어느 날 청천벼락처럼 그는 갔고,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나는 또 한번의 충격을 받았다.

2009년 5월 26일, 장례를 앞둔 시점에 서울에 올라와 국가 공인 분향소인 서울역사박물관을 방문하던 날, 나는 까무러칠 정도로 놀랐고 분노에 몸을 떨었다. 박물관 입장객을 배려한다고 전직 국가원수의 공식 분향소를 건물 한 귀퉁이 계단 밑에 만들었다는 걸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사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외교사절 등이 분향하는 국가 공식 분향소의 모습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 국가 공식분향소였던 서울역사박물관 입구
▲ 역사박물관 입구 오른쪽 귀퉁이에 분향소가 마련되어 있다.
▲ 관람객을 위해 중앙계단을 막을 수 없어 국가원수의 공식분향소를 귀퉁이에 설치, 그것도 계단 아래에 놓는 대우는 그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국민에 대한 모욕이다.

노무현은 마지막까지 이런 대우를 받았다.

가족장을 한다는 걸 적극적으로 반대해 국민장을 치르고 봉하마을에서 치르겠다는 장례식을 서울로, 그리고 노제까지 지내는 과정을 되짚어보면 나는 참으로 미운 인간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노무현은 무엇이었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그가 엄연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다는 점에서 그가 가고 이후에 벌어졌던 수많은 일에 대해 언젠가는 말할 수 있을 것이지만….

오늘은 그 초라한 국가 공식 분향소에 어느 시민이 남긴 방명록 하나로 대신하고자 한다.

▲ 역사는 승자가 쓰는 것!

그나마 그가 재가 되어버렸던 수원 연화장에 추모비 하나를 세우겠다는 소박한 시민의 정성에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대한민국 국민이고 보수라는 단어로 자신의 정체성을 말할 수 있을까? 5천 년 역사에 없었던 일련의 과정을 훗날 역사가 어떻게 쓸지는 승자가 누가 되느냐에 달렸다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할 시점인 것 같다.

박정원 편집위원  |  pjw@pressbyp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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