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28일 월요일

“기존 진보정치 자기비판·성찰 있어야 ‘진보시즌2’ 가능”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05-27일자 기사 '“기존 진보정치 자기비판·성찰 있어야 ‘진보시즌2’ 가능”'을 퍼왔습니다.

조국의 만남
 홍세화 진보신당 재창당 준비위 상임대표

‘남민전’의 ‘전사’로 유신체제와 싸우다가 프랑스로 망명하여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되었던 사람, 20년 망명생활을 접고 귀국하여 날카로운 필봉을 휘두르며 과잉우경화된 한국 사회에 ‘빨간 신호등’을 켰던 사람, 총선 시기 선명히 ‘좌파’를 내세운 소수정당 대표로 변신한 이 사람을 24일 오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7층 편집국장실에서 만났다. 향후 진보의 재구성 작업에서 충돌할 두 가지 요구, ‘선명한 진보’와 ‘진보의 대중화’ 문제를 미리 검토하기 위함이었다. 쓸쓸한 표정과 깊어진 주름 뒤에 숨어 있는 결기와 열정을 보았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트위터 @patriamea

홍세화 진보신당 재창당준비위원회 공동대표(왼쪽)가 지난 24일 한겨레신문사 옥상정원에서 조국 교수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진보진영 상황이 좋지 않다. 통합진보당 상황은 당권파만이 아니라 비당권파, 나아가 당 밖의 진보세력 및 민주통합당에까지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진보신당 역시 예외가 아니다. 먼저 지난 총선에서 진보신당 대표로 나섰던 이유가 무엇인가?
“상황의 부름에 응답할 수밖에 없었다. 첫째, ‘노·심·조’(노회찬, 심상정, 조승수)로 대표되는 진보신당의 구 지도부가 통합진보당에 합류했다. 진보신당을 소중히 지켜온 당원들은 배신감을 느꼈다. 나라도 진보신당에 힘을 보태야겠다고 생각했다. 둘째, 야권연대가 승리하여 ‘2013년 체제’가 만들어진다고 하더라도, 그나마 지금은 쉽지 않은 상황이 되었지만, 그 집권세력도 임박한 세계 경제위기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더 진보적인 야당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진보신당의 득표율은 1.13%였다. 2%에 미달해 등록 취소가 되었다.
“참담했다. 2%는 넘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여러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당력 부족이 핵심이었다. 우리처럼 소수 정당의 경우 비례대표 전략이 중요한데, 이를 진행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배제된 자의 서사(敍事)’ 전략을 채택했지만, 청소노동자인 김순자씨를 비례대표 후보 1번으로 선택하는 것도 너무 늦게 이루어졌고…. 현상에서 나타난 변화의 열망에 동의하지만, ‘섬세함’의 사라짐이 아쉬웠다. ‘반엠비(MB)’ 구도 속에서 진보신당은 압도 또는 억압됐다고 할까.”
-압도를 넘어 억압되었다고 함은 무슨 뜻인가?
“‘반엠비’가 중심이 되면서 진보신당이나 녹색당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시민사회에서나 언론에서나, 한겨레나 경향 등 진보매체에서도 홀대했다. 어떤 때는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우리의 역량이 부족했던 탓이다. 특히 유명 정치인이 없는 상황…, 당의 존재감이 너무 취약했다.”
-과거의 문제만이 아니라 미래의 문제이기도 할 것 같다. 홍세화 대표의 대표 취임사나 진보신당 홍보물을 보면 ‘진보’ 만이 아니라 ‘좌파’ 정당임을 강조한다.
“‘진보좌파’란 표현은 한국 사회 노동운동과 노동정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품고 있다. 우리는 비정규 불안정 노동자에 중심을 두는 진보정치를 하고자 한다.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배제됨은 물론이고, 노동운동조직으로부터 배제된 사람들, 그리고 주체 형성도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말이다. 이렇게 이중으로 배제된 사람들은, 통합진보당과 이 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해온 민주노총에 의해서도 대변되지 못하고 있다.”

총선 참패와 비정규직

반MB 구도 속에서 압도당해
어쨌든 우리 역량 부족했다
자본과 권력·노동운동조직에서
이중배제된 사람 위한 정치 할 것

-진보신당 창당 전후로 진보적 지식인과 문화예술인들의 지지가 줄을이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이나 전농 등 대중운동조직의 지지는 없었다. 당 홈페이지에는 ‘우주 최강 노동자정당’이라는 슬로건이 올라와 있지만, 현재 진보신당은 선명한 좌파노선을 견지하는 ‘지식인 정당’, 정치권력에는 거리를 두는 ‘문화좌파’ 같은 느낌을 준다.
“이념적으로는 ‘녹좌파’다. 자본주의 극복과 생태주의를 결합한 ‘적-녹 동맹’이다. 한국에서 진보좌파의 정치역량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취약할 수밖에 없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분단이 중요한 원인이다. 분단이 보수와 진보 모두를 왜곡한다. 보수가 제대로 서지 못하고 수구나 극우의 품에 안겨 있다. 진보진영 내에서 다수파를 형성하고 있는 ‘엔엘(NL)파’(자주파)도 다른 나라에서라면 우파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중으로 배제되고 있는 사람들이 주체로 서는 것은 정말 어려운 과제이다. 그래서 현재의 진보신당은 지식인 중심으로 돼 있다. 젊은 당원들에게 말한다.(주먹을 쥐며) `우리 세대에서 못 하면 다음 세대에 넘기는 장기적 과제로 삼자, 현실적 역량이 안 된다고 해서 자리를 옮겨서는 안 된다.’”
-다음 세대에 넘긴다는 말, 이해하면서도 갑갑하다. 정치는 철학이나 예술과 다르게 당대의 문제를 즉각 해결해줄 수 있어야 한다. 진보신당이 중심에 놓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비정규직 노동자의 상당수는 진보정당이 아니라 민주당, 심지어 새누리당을 찍고 있다.
“지금까지의 노동정치 또는 진보정당은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자본과 권력을 향해 구호로만 외쳤을 뿐이다.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을 노조에 가입시키지 않았고, 이에 대한 비판적 평가도 철저히 하지 않았다. 진보정당도 어렵고 먼 길이라고 놔버리고 실리 중심이랄까 그쪽으로 갔던 것이 아니냐. 진보신당은 지역정치와 노동정치의 결합을 추진할 것이다. 스웨덴이나 이탈리아 등에서 100년 전부터 작업해온 ‘민중의 집’ 기획이 모델이다. ‘민중의 집’은 지역 노동자들이 같이 어울려 공부하고 토론하고 놀 수 있는 ‘기지’이다. 문화, 교육, 놀이의 공간이다. 물론 이는 계급의식 성장의 공간이기도 하고 민주주의 성숙의 공간이기도 하다.”
-‘민중의 집’ 기획은 진보진영 전체가 공동으로 꾸려나가면 좋겠다. 정치권력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정당은 권력을 잡고 구성하여 현실을 바꾸는 계획과 힘을 가져야 한다. 진보신당은 운동체로서의 모습과 정당으로서의 모습이 섞여 있는 것 같다.
“맞다. 운동체적 성격을 부인하고 싶지 않다. 한국 사회 구성원의 처지와 의식의 괴리로 볼 때 어쩔 수 없지 않나 싶다. 권력을 잡아야 한다. 어디까지가 권력이고 아니냐를 섬세하게 봐야 한다. 레닌주의식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 소수자가 계속 소수자로 머물더라도 계속 목소리를 내고 활동을 하고 실천을 하면 그것이 결국은 영향을 끼쳐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꼭 정권을 잡지 않더라도, 이를테면 10년 전 당시 민주노동당이 무상교육 무상의료를 주장했을 때 허황된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후 이 구호가 노동자와 서민의 상황과 만나면서 집권세력은 양보해야 했다. 반값등록금 정책도 마찬가지다. 사실 나는 ‘민중권력’이란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민중권력’은 그 말을 통해 권력을 쥐기 위한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민중이 얼마만큼 권력에 견제와 비판력을 갖는가, 민중이 얼마나 성숙하는가 하는 것이다.”
-정권을 직접 잡지 않지만 갈 길을 비추는 역할을 하겠다는 것인데, ‘등대정당’으로 가려는 것인가?
“글쎄, 그게 꼭 ‘등대정당’이라고 표현되어야 할지.(웃음) 전태일을 다시 호명하려 한다는 의미로 받아 달라.”
-‘전태일 정신으로 기어이 돌아가자’라는 글에서 ‘노·심·조’ 등 진보신당의 구지도부, 민주노총 지도부, 진보적 언론과 지식인 등을 비판했다.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이념과 행태는 다 알고 있었는데, 병이 커질 만큼 커져 터진 후에야 비판하는 것은 불성실한 것이 아닌가. 방조하거나 침묵하거나 심지어 동조하지 않았던가. 당권파의 몰상식한 모습이 갑자기 나타난 양 비판하는 것은 자기 존재의 합리화 아닌가. 분노보다는 슬픔, 슬픔보다는 쓸쓸함이다.”

통합진보당 사태, 거쳐야 할 폭풍

당권파의 이념·행태 알면서
일 터진 뒤 비판하는 건 불성실
몰상식 강조만으로 문제해결 안돼
당내 민주주의 꼭 정착시켜야

-그래서 조지 오웰에 대하여 동병상련을 표시한 것인가. 당시 좌파는 오웰을 배척했고, 오웰은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너무 서글프지 않은가.
“(웃음) 심정이 좀 그랬다. 갈 길이 멀어도 제자리에 서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통합진보당 사태로 진보의 재구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때는 당권파의 패권주의가 유지되어 표출되지 않았지만, (이번엔) 헤게모니를 잃게 되니 엄청난 파열음이 나오게 된 거다. 이번 사태는 한번은 거쳐야 할 폭풍이다. 정태인 선생이 제안한 `진보 시즌2’를 위해서는 기존의 진보정치와 노동정치의 자기비판과 성찰이 있어야 한다. 이럴 때만 같이 마주 앉을 수 있다. 당권파의 몰상식함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문제해결의 길이 없다. 사실 지금까지 민주노총 지도부는 ‘배타적 지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얼마나 무리수를 두었는가.”
-굳이 따지면 홍 대표는 통합진보당 당권파와 같은 ‘엔엘’ 출신이다.
“(폭소) 유신시절 한국 민주화운동권의 대부분은 ‘엔엘’이었다. 난 ‘원조 엔엘’이었다고 해야 하나.(웃음) 이후 여러 경험, 관찰, 공부 속에서 진화하고 진보했다.”
-당권파 헤게모니 외 통합진보당의 묵은 병통이 드러나게 된 것은 유시민과 참여당 세력의 적극적 문제제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관점에서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당 문제는 무엇이든지 대중적 차원에서 검증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남민전의 동지 이학영씨가 민주통합당 국회의원이 되었다. 전태일의 누이 전순옥씨도, 사노맹의 여전사였던 은수미씨도 민주통합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진출한다. 이들은 ‘변절’한 것인가?(웃음) 사실 저는 이학영, 은수미 두 분의 후원회장이다.
“아! 거 참 어렵다.(웃음)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가, 어딜 바라보는가보다 중요한 것이 그가 어디에 발을 담그고 있는가이다. 따라서 그분들의 선택에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선택을 ‘변절’이라고 딱지 붙이지는 않는다. 내가 원래 ‘톨레랑스’를 강조하는 사람 아닌가.(웃음) 단, 그분들이 원래의 긴장을 계속 유지해주길 희망한다. 그분들이 서있게 된 그런 자리의 일상이 주는 위험성에 대하여 항상 자각하길 희망한다.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이제 통합진보당, 민주노총은 물론 민주통합당도 해결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비정규직을 주체로 세우기 위해서도, 우리 사회의 진보적 변화를 위해서도 넓은 의미에서의 진보가 손을 잡아야 하지 않는가?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하나의 정당으로 뭉치자는 주장은 솔직히 폭력적이었다고 본다.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특히 가치와 이념 중심으로 모인 정치결사체인 진보정당의 경우는 ‘군자의 정치’를 해야 한다. 독일식 정당명부비례대표제나 프랑스식 결선투표제가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독일이나 프랑스와 달리 한국은 소수정당이 생존하기 어려운 선거제도를 갖고 있다. ‘타협’이라고 비난받더라도 넓은 의미의 진보가 뭉쳐 원내교섭단체를 만들고 선거제도를 바꾸는 것이 먼저 아닐까. 하나의 원내교섭단체 안에 진보신당파도 다른 파도 인정하면서 말이다. 여러 파가 다 정당이 되어 선거에 나가면 번호가 분산된다. 일반 유권자에게 16번을 찍으라는 건 매우 어려운 요구였다.(웃음)
“1.13%밖에 안 되지만 진보신당을 선택한 분들은 1~4번을 선택한 분들에 비해서 결이 다르다.”(웃음)
-‘반엠비’가 중심이 된 야권연대에서 배제되었음에도 16번을 선택했으니 충성도가 매우 높은 분들임에 틀림없겠다.
“이번 통합진보당 사태에서 드러났지만, 당내 민주주의가 보장되지 않는 정당에 들어가서 뜻을 펴는 것은 불가능하다.”

재창당 그리고 연대
민주·통합진보당서 우리 배제
이학영·전순옥 ‘변절’로는 안봐
노동정치세력·녹색당과 논의
6개월 안에 재창당 끝낼 것

-이제 통합진보당도 당내 민주주의를 정착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선거는 계속된다. 야권연대에 대한 진보신당의 생각은 무엇인가?
“지난 총선에서 야권연대에 우리가 스스로 빠진 게 아니고 배제됐던 것이다.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의 합의로 우리를 배제했다. 우리가 고립전략을 쓴 것처럼 알려져 있는데 정말 억울하다. 실제 거제에서는 김한주 후보로 야권단일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선거 과정에서 야권연대는 실익이 있어야만 이루어진다. 지금은 통합진보당이 엉망이니까 민주통합당에서 연대하지 말자고 하지 않는가. 진보신당이 실력을 키우지 않으면 또 배제될 수 있다. 재창당 작업을 하고 있는데 잘 알려져 있지 않다.
“4월17일 진보신당 연대회의 이름으로 재창당 준비위원회를 등록했다. 5개 시도에서 1000명 이상의 당원을 확보해서 6개월 안에 재창당을 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많은 분들이 합류해주면 좋겠다. 향후 6개월 동안 노동정치세력, 녹색당 등과 논의를 할 것이다.”
-청년시절 폭압적 불법국가 체제였던 유신체제와 싸웠고, 20년간 망명생활을 했고, 10년간 한국에서 진보정치에 몸을 담았다. 대선 이후 상황을 어떻게 보는가.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이냐, 그런 예언 말고….
“어렵다. 2013년 이후에 우려되는 것은 경제위기이다. 이 점을 중심에 놓고 보게 되면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는 거나 아닌 거나 노동자와 민중들에게 어떤 차이가 구체적으로 있을지 고민이 된다. 경제위기가 쓰나미처럼 온다면….”
-세계공황을 말하는가?
“그렇다. 지금 그리스에서 시작되고 있는 흐름들이 2013년 이후 한국에까지 온다면, 우리 산업구조는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가 받는 타격과는 또 다른 양상일 것이다. 사실 그 위험은 박근혜냐 아니냐보다 훨씬 크다. 물론 그런 위험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그리고 이명박 뒤에 박근혜, 이것도 좀 아니었으면 좋겠다.”(웃음)
-10년 전 발간한 책에서 진급하는 ‘장교’가 되지 않고 끝까지 ‘사병’으로 남겠다고 공언했다.
“그 마음 여전하다. 당시의 표현대로 ‘셀 때까지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이고 싶다.’”

정리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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