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29일 화요일

[최장집칼럼]누가 신용불량자 문제를 방치하나


이글은 경향신문 2012-05-28일자 기사 '[최장집칼럼]누가 신용불량자 문제를 방치하나'를 퍼왔습니다.
지난 칼럼(5월22일자 31면)에서 만났던 신용불량자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구로구 궁동의 박영신씨(가명)는 현재 다섯 식구를 위한 최소한의 생계비 월 150만원의 절반인 70만~80만원의 수입으로 절대적인 마이너스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기초생활보장 혜택을 받지 못하고,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증후군을 갖고 있는 큰아이로 인해 월 15만원의 장애수당만 받는다. 지난 총선 때는 선거운동 일을 봤고, 지금은 식당에서 일하는 등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나 파트타임 노동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녀는 왜 수입이 더 나은 일자리를 찾지 않을까. 신용불량자라는 전력이 있기에 점포의 계산대나 콜센터 서비스와 같이 돈·신용과 관계된 일자리를 가질 수 없다. 신용카드도 만들지 못한다. 휴대폰도 갖지 못한다. 사실상 사회로부터 격리돼 있는 상태다. 

신용불량자로서 사채업자들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그녀가 겪었던 경제적·육체적·정신적 고통으로,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갖게 돼 좁은 공간에서 일하는 사무일도 보기 어렵다. 또한 어린 자녀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장시간 집을 비우는 파출부 같은 것도 할 수 없다. 그녀가 먹고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실로 한정된 것이다. “나라에서 불법자로 찍히면 발목 꽉 잡혀 빼도박도 못하죠. 한번은 기회를 줘야 하는데…. 한순간 잘못한 것이 이렇게 큰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어요”라고 그녀가 말할 때, 회한과 항변이 교차하고 있었다.

청소일을 하는 최태일씨(가명)는 궁동의 박씨보다 상황이 나아 보였다. 박씨는 아버지가 암으로 사망했을 때 장례비가 없어 시신을 병원에 기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씨는 가정형편이 좀 나아 가족들의 도움으로 부채의 급한 부분을 빨리 정리할 수 있었고, 어머니에 의탁해서 살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아직 가정을 갖지 않은 건강한 청년으로 고된 노동일을 할 수 있었다. 최씨의 청소노동은, 두 사람이 한 조가 돼서 이루어진다. 먼저 새벽에 나가 아침 9시까지 일한 뒤 집에 돌아와 한잠 잔다. 그리고 오후 4시 반에 나가 다음날 새벽 6시까지 일하는 것으로 한 사이클이 끝난다. 그리고 하루를 쉬고 다시 시작하는 것으로 노동시간이 짜여 있다. 

필자가 최씨를 만난 날은 노동절이어서 “오늘은 쉬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그는 자기는 쉬는 날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가 하루에 처리하는 쓰레기양이 1만가구에 이른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엄청난 양이다. 최씨는 월평균 220만~230만원의 임금을 받는데, 외주업체에 소속된 작업원들은 구청 소속의 작업원들에 비해 일은 더 힘들고, 받는 금액은 훨씬 적다고 말한다. 노동시장의 중심 제도인 파견법, 변형근로제는 인력장수들에게는 커다란 혜택이 돌아가지만 비정규직에게는 가혹하기 그지없는 제도다.

세탁소를 운영하는 장재선씨(가명)는 신용불량자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편법에 대해 말한다. 신용불량자인 그 역시 통장에 자기 돈 넣고 찾는 체크아웃카드를 사용하는 것 말고는 은행거래를 할 수 없고, 휴대폰도 가질 수 없다. 하지만 남아 있는 편법은 구청 사회복지사가 된 딸 명의를 이용해 이를 피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가명을 사용하는 수많은 신용불량자들이 자신들을 배제한 제도권 경제 안으로 들어와 이중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와 헤어질 때 장씨는 조용조용한 인상과는 달리 “이곳 거마(거여·마천동) 지역은 서민 밀집지역이고, 사채업자나 일수업자들이 많아요. 국가는 재벌들 자회사인 금융회사들에 많은 대출도 해주는데, 없는 사람들은 고금리로 내몰고 있지요.”라며 강한 어조로 불만을 토로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궁동의 박씨가 “(인생이) 너무 어려서 시작해 너무 어려서 끝나 버린 것 같아요. 다시 일어나는 것도 힘들다고 생각해요. 하루 먹고 하루 살다가 결국 애들에게 대물림될 거예요”라고 했던 말은 커다란 여운을 남긴다. 경제적으로 박탈당한 그들에게 새겨진 ‘낙인’으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관계가 어려워지는 이러한 조건은,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정치적 참여의 권리, 즉 제레미 왈드론(Jeremy Waldron) 같은 법철학자들이 말하는 ‘권리 중의 권리’(the right of rights)마저 박탈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신용불량자 문제가 잘못된 정책으로 만들어진 문제이고, 따라서 정치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어렵게 하는 것은,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어떤 도덕적 인식과 깊이 연관돼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을 과시적 허영심이나 자제력 없는 소비욕구 내지 도덕성의 결여와 같이 신용불량자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생각을 말한다. 그로 인해 신용불량자 문제가 사회경제적 문제이자 정책결정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정치적 문제라는 인식은 사라져버리고 만다. 

제도권 밖에 이리저리 흩어져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려나 있는 신용불량자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문제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면서 정치적 이슈로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게다가 금융 관련 문제는 복잡한 기술적 문제를 포괄하고 있어 전문가 아닌 보통사람들이 문제 해결 방안을 찾아내기도 어렵다. 다양한 성격의 광범위한 일반 소비자들로 이루어져 있는 이들을 공통의 정치적 요구를 갖는 하나의 사회집단으로 조직해서 목소리를 갖게 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어렵다. 

이런 환경에서 ‘1인 운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민생연대’ 송태경 사무처장의 활동은 진정한 의미에서 진보적인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인터뷰한 박영신씨, 신영환씨는 모두 송 처장의 법률자문 덕분에 파산처리 과정에서 더 큰 재난을 피할 수 있었다. 필자가 송 처장과의 인터뷰를 위해 영등포구 당산동의 조그만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속초에서 상경한 한 여성 보험설계사 역시 송 처장으로부터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다고 내게 말했다. 그러나 송 처장이 누구도 하지 못하는 운동을 통해 여러 사람의 경제적 파탄을 경감시켜 주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가 다루고 도와줄 수 있는 범위는 지극히 한정적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신용불량자들을 위한 정치적 대표가 있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잘못된 이념적 급진주의에 의해 주도된 진보정치가 민중의 권익 증진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민주주의 그 자체에 해악적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분명히 보고 있다.

제대로 된 진보정당이 신용불량자 문제를 진지하게 접근하는 데는 두 가지 요소가 필수적이다. 첫째는, 신용불량자 문제를 포함하여 금융정책을 실제로 다룰 수 있는 당의 제도와 조직체계를 조직하는 일이다. 이는 관련 이해당사자 집단, 예컨대 신용불량자, 비정규직 노동자, 복지수혜 대상자, 청년 등이 정책 이슈 제기에서 아젠다 형성, 정책 대안 마련에 이르기까지 보다 더 가까이 참여하거나 접맥될 수 있는 방향으로 정당 활동의 체계가 달라지는 문제를 말한다. 당의 조직과 역할은 시민의 실생활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업에 부응할 수 있도록 변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고서 진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실제 사태를 못 보게 만드는 역기능이 될 수 있다. 

둘째는, 정책 이슈와 대안들이 이념적 거대담론으로부터 직접 도출되지 않아야 한다. 담론 내지 공론장에서의 논의는 추상 수준이 높은 관념성에서 벗어나, 사회경제적 문제를 실제로 다룰 수 있도록 구체화되고 현실성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이 점에서 경제민주화, 보편적 복지, 재벌개혁과 같은 포괄적이고 추상 수준이 높은 슬로건이나 언어는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공허한 구호를 반복하는 것에 그치는 역효과를 갖는다. 추상적 언어가 꼭 필요하다면, 개별적이고 구체적 정책 대안들이 충분히 형성된 후에나 불러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사안으로 민중을 속이기는 쉬우나 구체적인 사안에서는 그렇게 하기 어렵다고 말한 적이 있다. 추상적 이념에 헌신하나 구체적 실천에는 관심이 없는, 진보의 이름을 딴 습관성 정치구호나 관성화된 행태를 더는 보고 싶지 않다.

최장집 | 경향시민대학 학장·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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