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30일 수요일

귀신섬 끌려가 못돌아와도…미쓰비시는 “책임없다” 발뺌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05-30일자 기사 '귀신섬 끌려가 못돌아와도…미쓰비시는 “책임없다” 발뺌'을 퍼왔습니다.

10만명 징용·배상은 0원
조선인 임금 가장 많이 떼먹은
‘제1 전범기업’
“전쟁전 기업과 별개” 회피…홍보땐 “역사 100년
”협상단, 연계성 인정한 대법판결로 압박 계획

일본으로 떠난 아버지의 흔적은 사망증명서로 돌아왔다. 1910년 6월 경남 고성에서 태어난 표상만씨는 1940년 장남이 태어난 뒤 일본으로 강제징용됐다. 일본 나가사키현 미쓰비시광업㈜ 다카시마광업소에서 일하던 표씨는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표씨 가족들은 1971년 6월에야 ‘표씨가 1942년 낙반사고로 숨졌다’는 사망증명서를 받았다. 미쓰비시 쪽은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 조사를 하던 일본 시민단체가 끈질기게 요구하자 그제야 표씨 사망을 인정했다.

귀신섬의 하나인 하시마. 1974년 폐광된 이래 무인도로 방치됐다. 군함도라고도 불린다. KBS 역사 스페셜 화면 캡쳐.

다카시마엔 미쓰비시 소유의 해저탄광이 있었다. 지하로 수백m를 파고 들어가 채굴하는 해저탄광은 인권 사각지대로 ‘귀신섬’(지옥섬)이라고 불렸다. 미쓰비시는 전쟁 때 조선소와 항공기 제작소 등을 운영했던 대표적인 군수산업체였다. 일본인 학자 다케우치 히로야스가 쓴 ‘미쓰비시 재벌에 의한 강제연행, 전시노동노예제에 대하여’(2004년)를 보면, 미쓰비시는 1939년 이후에만 조선인을 최소 10만명 강제징용한 ‘제1의 전범기업’으로 꼽힌다. 미쓰비시는 일제 때 일본뿐 아니라 한반도와 동남아시아, 미크로네시아와 사할린 등에 작업장을 125곳 뒀다. 조선총독부는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징용령을 제정해, 조선인을 미쓰비시 등 일본 전범기업들의 작업장에 배치했다. 조선인 노무자들은 푼돈을 임금으로 받고서 중노동과 구타 등에 시달렸고, 사고와 질병 등으로 숱하게 숨졌다.

일본 나가사키현 미쓰비시탄광㈜ 다카시마광업소에서 1971년 6월10일 발급한 조선인 강제징용자 표상만씨의 사망 증명서. 다카시마광업소는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실태 조사에 나선 일본 시민단체의 요구에 따라, 표씨가 1942년 낙반사고로 사망했다는 증명서를 뒤늦게 발급했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 제공
일본 국립공문서관 쓰쿠바 분관에 보관된 ‘노동성 조사 조선인에 대한 임금 미불 채무조’(1950년 10월6일) 문건을 보면, 조선인 노무자 등에게 주지 않은 임금을 공탁 형태로 일본 법무국에 맡긴 기업 가운데 미쓰비시가 1만935명으로 가장 많았다. 미쓰비시중공업 나가사키조선소는 조선인 406명분의 급료·퇴직금 등 85만9770엔을 공탁했다. 이 돈은 현재 일본은행에 예치돼 있다.
미쓰비시조선소가 있었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1945년 8월 원자폭탄이 투하돼 조선인 거주자 7만명 가운데 약 4만명이 피해를 입었다. 당시 조선인은 미쓰비시조선소에 4700명, 다카시마 탄광에 3500명이 있었는데, 정확한 사망 실태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미쓰비시는 ‘전쟁 전의 회사와 별개’이고 ‘1965년 한일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은 소멸됐다’는 논리로 사죄 및 피해 배상 요구를 외면해왔다. 양금덕(83·광주광역시 서구 양동)씨 등 미쓰비시 나고야 항공제작소에서 일하고도 임금을 받지 못했던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내면서 근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1998년 일제 때 후생성에 냈던 연금기록 확인을 요청하자, 미쓰비시는 11년 뒤인 2009년 9월에야 양씨 등의 근무 사실을 인정했다. 미쓰비시중공업은 일본 후생성이 양씨 등 8명에게 후생연금 탈퇴 수당으로 겨우 99엔(1250원)을 지급해 국민적 분노를 불렀던 단초를 제공했던 기업이다. 미쓰비시중공업은 지난해 11월부터 ‘근로정신대 미쓰비시 공동협상단’의 요구에 따라 손해배상 협상장에 나오면서도 종전의 태도를 고집하고 있다.

미쓰비시중공업에서 강제 노역을 한 양금덕 할머니가 2009년 광주광역시 미쓰비시자동차 전시장 앞에서 매장 개설에 항의하며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미쓰비시는 미 군정 때 해체됐으나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기업들을 다시 합쳤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개인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고, 전쟁 전후 미쓰비시는 연계성이 있다’고 판시했다. 근로정신대 미쓰비시 공동협상단 한국 쪽 공동대표인 이상갑 변호사는 “다음달 5일 협상에서도 미쓰비시중공업이 외면하면, 결국 한국 법정에서 소송을 통해 손해배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맞닥뜨릴 것”이라고 말했다.
미쓰비시그룹의 중핵은 미쓰비시중공업과 은행 등이다. 미쓰비시중공업은 차량·선박·터빈·발전기 등을 제조하는 대형 기업이다. 종업원은 계열사까지 6만2000명이며, 전체 매출은 4조4000억엔에 이른다.(2008년 기준) 또 미쓰비시는 한-일 근현대사 왜곡으로 알려진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 후원금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의 정혜경 조사2과장은 “독일의 폴크스바겐 같은 전범기업들은 정부의 손해배상과 별도로 주변 나라 노동자 160만명에게 614억600만유로(2003년)를 개별 보상했다”며 “미쓰비시도 독일 기업들의 전례를 참고 삼아 과거를 털고 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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