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10일 목요일

[사설]노동자 두 번 죽이는 까다로운 산재 기준


이글은 경향신문 2012-05-09일자 사설 '[사설]노동자 두 번 죽이는 까다로운 산재 기준'을 퍼왔습니다.
나라 전체를 병영처럼 운영했던 군사독재정권 시절 생산현장의 노동자들은 흔히 ‘산업전사’로 통했다. 정부와 기업주는 이들에게 용맹하게 싸울 것만을 독려했을 뿐 정작 이들이 ‘전사(戰死)’했을 때는 나몰라라 하기 일쑤였다.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6년간 일하던 중 악성 뇌종양에 걸려 투병하던 이윤정씨가 엊그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씨를 포함해 뇌종양, 백혈병, 유방암 등 업무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질병으로 사망한 노동자들이 삼성반도체에서만 32명, 삼성의 다른 계열사까지 합치면 무려 55명에 이른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삼성 외에도 전국 곳곳의 사업장에서 병을 얻거나, 죽어가고 있는 노동자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을 운위하는 21세기 초반에도 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작업 환경은 군사정권 시절에서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은 셈이다. 

이번에 사망한 이윤정씨는 서울행정법원에 산재 불승인 취소 소송을 진행 중이었다. 근로복지공단이 온갖 까다로운 조항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산재 인정 기준을 내세우며 이씨의 산재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판도 지난해 9월 단 한 차례 열린 이후 지금까지 열리지 않고 있다고 하니 설령 나중에 법원으로부터 산재 인정을 받는다고 해도 이미 망자(亡者)가 된 이씨에게는 사후약방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직업병 중에서도 암환자로 인정받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라고 한다. 전국의 사업장에서 매년 20만명 안팎의 암환자가 발생하지만 업무관련성을 인정받은 노동자는 20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 시행령이 인정하고 있는 직업성 암은 방사선 피폭에 의한 혈액암, 벤젠에 의한 조혈기계암 등 7가지뿐이기 때문이다.

암과 같은 중병에 걸린 노동자가 산재 인정을 받지 못하면 자신은 물론 온 가족이 풍비박산나기 십상이다. 이런 불행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산재보험법이 규정하고 있는 산재 인정 기준을 대폭 완화해야 한다. 치밀한 역학조사도 실시해 과거에는 없었던 새로운 질병을 직업병으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진폐증의 경우 수십년 동안 직업병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1985년 진폐의 예방과 진폐근로자의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됨으로써 환자들에게 빛을 던졌다. 사업주들도 작업환경 유해물질을 사전에 제거하는 등 직업병 방지에 힘을 쏟아야 한다. 제2, 제3의 이윤정이 속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