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10일 토요일

피의사실공표는 언론과 검찰의 합작품

이글은 한겨레신문2011.09.08 자 hook의 '피의사실공표는 언론과 검찰의 합작품'을 퍼왔습니다.

법원공무원으로, 2005년부터 인터넷신문과 블로그 등에 법조 관련 글을 써오고 있다. 언론에서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는 판결에 대한 분석, 판사 인터뷰, 사법 개혁과 관련된 글을 주로 발표했다. 어렵고 딱딱한 법률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글쓰기 능력으로 네티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2010년 1월 <생활법률상식사전>(위즈덤하우스), 2011년 5월 <생활법률해법사전> 을 펴냈다. [페이스북, 트위터, 전자우편(야후)은 jundorapa]


[눈치코치법치]
유력 정치인 한 명이 검찰의 수사선상에 올랐다 치자. 어떻게 될까. 검찰은 공식, 비공식 창구를 통해 그 정치인의 흠을 잡을 만한 정보를 흘린다. 언론은 검찰(이나 그 언저리)에서 흘러나오는 정보를 하나라도 놓칠세라 귀를 쫑긋 세우고 ‘받아쓰기’를 한다.
헌법과 법률에서 ‘피고인(또는 피의자)은 무죄로 추정된다’지만 적어도 언론보도에서는 유죄로 추정된다. 어디 정치인뿐이겠는가. 살인 사건이나 대형 사건에서도 일단 터뜨리기식 보도가 적지 않다. 주로 소스를 제공하는 곳은 수사기관이기 때문에 언론 보도에서 피고인의 말은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을 수 밖에 없다. 만일 피고인이 검찰의 공소사실을 부인하고, 재판도 아직 열리지 않은 상황이라면 폐해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법은 피의사실공표를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형법 제126조(피의사실공표)
검찰, 경찰 기타 범죄수사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감독하거나 보조하는 자가 그 직무를 행함에 당하여 지득한 피의사실을 공판청구전에 공표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피의사실 공표죄는 수사기관이 범죄자를 기소하기 전에 피의사실을 언론 등을 통해 알렸을 때 성립한다. 이 죄는 수사상 기밀 유지, 피의자의 인권보호 등을 위한 것이다. 피의사실 공표는 재판을 열기도 전에 피의자가 사실상 유죄로 단죄된다는 점에서 피해는 막심하다. 더구나 은연중에 법원으로 하여금 유죄의 심증을 갖게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재판 끝에 무죄 판결이 나와도 당사자는 이미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명예에 상처를 받게 된다.
그런데 이 죄로 처벌받는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최문순 전 의원이 법무부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이 죄로 기소되거나 징계를 받은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후로도 기소된 사례는 찾기 힘들다. 피의사실공표죄는 거의 사문화한 상태다. 기소권을 가진 검찰이 자기 식구를 기소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대신, 민사 재판에서 언론 보도를 통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가나 언론사의 책임을 물을 때 법원은 수사기관의 행위가 피의사실 공표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하는지를 간접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간첩사건은 피의사실 공표의 단골 사례이다. 2002년 대법원(2001다49692)은 이른바 ‘부산동아대 자주대오 사건’의 피고인들이 낸 손해배상 사건에서 피의사실 공표에 관한 기준을 제시한다.
(참고로 ‘부산동아대 자주대오 사건’은 1997년 수사기관이 만들어낸 공안사건이다. 당시 경찰은 언론에 넘긴 간첩수사발표문을 통해 “학생운동권 출신 간첩 2명이 조총련에 포섭되어 국내에 잠입한 뒤, 경남지역 학생운동권을 포섭하고 학생운동 동향 등 정보를 수집해 조총련에 보고하고 운동권을 배후조종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법원은 이들의 간첩죄 부분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자 피고인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여 일부승소판결을 받았다.)
대법원은 이 판결에서 “국민들은 범죄에 관한 알권리를 가지고 있고 수사기관이 피의사실에 관해 발표를 하는 것은 국민들의 이러한 권리를 충족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이라며 필요성은 인정했다. 하지만 “피의사실 공표행위는 국민들에게 그 내용이 진실이라는 강한 신뢰를 부여함은 물론 그로 인해 피의자 등에 대해 치명적인 피해를 가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법원은 피의사실 공표는 ▲객관적이고 충분한 증거나 자료를 바탕으로 한 사실발표에 한정되어야 하고 ▲정당한 목적 하에 수사결과를 발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에 의하여 공식절차에 따라 해야 하며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하여 유죄를 속단하게 할 우려가 있는 표현이나 추측 등은 피해야만 허용될 수 있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간첩 사건 발표가 자백만을 유력 증거로 삼았다가 무죄가 된 점, 당사자의 반박 의견이 없었고 표현이 단정적이었던 점, 당사자들이 간첩이라는 낙인이 찍혀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된 점을 들어 수사기관의 행위는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피의사실 공표는 개인의 명예훼손과 직결된다. 하지만 개인의 명예는 다시 국민의 알권리와 충돌하여 복잡한 양상을 띤다. 그동안 법원의 판례는 언론보도가 공익을 위한 것이고, 내용이 진실하거나 진실이라고 믿는 데 상당한 이유가 있다면 위법성이 없다고 판시해왔다.
하지만 아무리 언론의 자유를 중시하더라도 수사기관이 피의사실을 흘리고 언론이 별 생각없이 받아쓰는 관행은 바뀌어야 한다. 최근 곽노현 교육감의 공직선거법 위반 보도들도 이같은 관행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는 분위기에 편승하여 사건의 본질과 관계없이 개인을 깎아내리는 기사도 등장하고 있다.
형사사건에 대한 사법절차는 통상 이렇게 이루어진다.
고소 고발 (또는 수사기관의 인지)→수사→기소→재판→판결→형 집행
한국의 형사사건 보도는 대부분 수사단계 전후에 집중된다. 판결이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아무래도 관심이 떨어지기 때문이리라. 국민의 알 권리는 존중해야 하고 취재에 성역은 없어야 한다. 문제는 범죄 사건 보도에서 수사기관에 의존하는 정도가 너무 심하다는 데 있다. 수사기관은 특정 사건에 대해 유리한 여론 조성을 위해 언론을 이용하고, 언론은 특종을 잡기 위해 이를 진실인 것처럼(혹은 진실이라 생각하고) 별다른 검증없이 보도하는 관행이 너무 굳어져 가는 것 같다. 피의사실 공표는 검찰의 언론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서 생긴 합작품일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이 합작품은 불량품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크고, 피해는 고스란히 사회 전체에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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