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19일 월요일

보편-선별 대립 넘어 [Special ReportⅡ] 복지 논쟁

이글은 Economy Insight의 2011년 09월 01일자 기사 '보편-선별 대립 넘어'를 퍼왔습니다.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
‘복지 포퓰리즘’에서 출발해보자.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 세력은 복지에 대한 과감한 주장을 대부분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한다. 그렇다면 현재 상황에서 정부 혹은 보수는 복지국가를 충분히 실행하고 있을까? 그건 아니다. 아직도 복지정책에 개입할 여지는 꽤 많다. 최근 1년 사이 정부와 여당이 유아 보육 정책에서 과거에 비해 일정한 성과를 냈지만, 아직 양육수당과 노인수당 영역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그 진전을 통해 정치적 지지를 얻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양육수당과 노인수당의 수혜 범위를 최소한 단계적으로 하위 50~70% 수준까지 확대하고 수당 액수도 점차 늘리는 일은, 보수 정치의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고 재정적으로도 불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현재 정부와 보수 세력은 그 정도의 정치적 지혜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니 ‘복지 포퓰리즘’을 비난하는 정부와 보수의 관점은 공정하지 않다.

‘보편적 복지’ 삐딱하게 보자
민주당이나 진보 진영이 공식적으로 내세우는 보편적 복지에는 포퓰리즘의 성격이 전혀 없는 걸까? 여기 껄끄러운 점이 있다. 크게 보면 나도 보수보다는 진보에 훨씬 가깝지만, 복지에 대한 진보의 이론 혹은 답안에 대해 거리를 취하고 싶다. 진보라 자칭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보편적 복지’를 지지한다. 조금 문제가 있어 보여도, 대놓고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는다. 이 상황에서 나는 삐딱함을 무릅쓰고 말하려 한다. 내가 보기에, 지금 민주당과 진보 진영이 내거는 ‘보편적 혹은 무상 복지’에는 상당히 포퓰리즘적 요인이 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이 인기를 끌자, 민주당과 진보 진영은 마치 ‘보편적 무상복지’가 모든 혹은 대부분의 정치적 갈등을 한꺼번에 치료할 신기한 약으로 선전하는 경향이 있다. 등록금 문제가 곪아터지는 상황에서 겉으로만 보면 ‘보편적 반값 등록금’이 인기를 끄는 것 같지만, 사립대학이 대학의 80% 정도를 차지하는 현 상황에서 정부가 그 정책을 일관되게 실행할 발판이나 지렛대는 많이 부족하다. 모든 대학의 등록금을 일률적으로 반으로 줄이는 것은 재정적으로 쉽지 않지만, 그 이전에 ‘세금으로 사립대 학생들의 등록금까지 해결해야 하느냐’는 원칙적인 물음이 큰 논란거리다. 현재 적잖은 사학재단들이 탈법과 위법을 저지르며 공적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데, 그런 사학재단에 국민의 세금으로 일방적으로 지원해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등록금 문제가 크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 대학진학률이 너무 높다는 데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높은 대학진학률은 여러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음에도, 사람들은 이것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부실한 사립대학들이 지난 세월 동안 많이 생겼고, 굳이 대학에 가지 않아도 될 많은 고등학생들까지 맹목적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일이 굳어졌다. 이런 부정적인 면을 먼저 수정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은 채, 대학에 진학하는 많은 학생들에게 정부가 일률적으로 등록금을 지원해줘야 한다는 주장은 여러 점에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서민들에겐 고등학교 수업료도 부담이 되는 판에 대학생에게 그런 큰 지원을 해줘야 하느냐는 것도 쉽게 건너뛸 수 없는 물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대학의 등록금을 정부가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우선 국립대 등록금을 반 정도로 낮추는 수준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머지 사립대학들에 대해서는, 한편으로 구조조정을 거쳐 부실 대학을 국립으로 전환하는 것과 동시에, 나머지 대학들은 일정하게 시장의 논리에 맡기는 일이 차선일 것이다.
급식의 예를 들어보자. 정치적 관용의 전통이 강한 프랑스에서도 학부모들은 자신의 소득에 비례해서 급식비를 낸다. 급식비를 학교가 아닌 시청에서 관리하기에, 학생들이 차별받을 가능성은 많이 예방된다. 무조건 무상이 정답은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중학교 수준에서의 급식 정도야 무상으로 할 수 있는 여지가 꽤 있다. 그것은 복지정책 가운데 비교적 작은 몫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와 달리, 모든 복지정책을 무조건 보편적 복지 기준에서 판단해야 하느냐는 중요하고 예민한 문제다. 그런데 민주당과 진보 진영은 부분적으로 인기에 영합할 뿐 아니라, 많은 점에서 독단적이기도 한 보편적 복지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 무엇보다 ‘보편적’이란 개념이 모호하다. 예를 들어보자. 건강보험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 사회에서는 소득과 재산에 따라 개별적으로 기여 액수가 차이 나는 복지정책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소득과 재산에 따라 기여 액수가 다른 복지정책은 엄격히 말해 보편적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영국·미국처럼 자유주의적 성격을 많이 띤다. 그런데도 적용 범위만 포괄적이면 보편적이라는 오해나 왜곡이 횡행한다.

2009년 11월 당시 정세균 민주당 대표(가운데)가 민주당 최고위원 회의에서 복지예산 강화를 요구하고 있다.

복지 논의의 초점과 맹점
이 점이 현재 논의되는 복지 논의의 초점이자 맹점이다. 보수적인 한나라당도 할 수 있는, 그리고 하기만 하면 충분히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수준의 복지정책(곧 소득 하위 50~70% 대상에게 실질적인 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것)을 한나라당이 정치적 무능력 때문에 못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19세기와 20세기 유럽에서 볼 수 있듯이 보수정당도 얼마든지 국민적 통합과 국가적 이익을 위해 상당한 수준의 복지정책을 펼 수 있는데 지금 여당과 정부는 못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무능 때문에, 다시 복지를 포퓰리즘이라 비난하는 흑색선전을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일단 그 정도의 복지정책이 유권자 다수의 동의를 얻으면서 큰 재정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수준인데도, 진보는 그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 스칸디나비아 국가 수준의 보편적 복지를 공허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박근혜의 복지정책에 대해 재정적 대책이 없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박근혜와 마찬가지거나 오히려 더 무책임한 면이 있다. 복지에 관해 정확히 봐야 할 초점이 실제로는 보지 못하는 맹점이 되고 있다. 맹점이 초점을 가린다.
이런 일은 왜 벌어질까? 우선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 사이에 잘못된 대립이 설정되고 있다. 보편적 복지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선별적 복지를 하라는 말은 아니다.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자유주의적 복지 체제에서 선별적 복지는 개인별 소득 등에 따라 선별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러나 독일과 프랑스 등의 복지 체제는 비록 보편적 복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영국과 미국처럼 자유주의적 선별을 하지도 않는다. 이 점이 중요하다. 독일과 프랑스는 높은 수준의 복지 체제를 구축했지만, 보편주의 모델을 추구하지 않았다. 속을 들여다보면, 직업이나 조합에 따라 수많은 단위로 복지제도가 분화돼 있다. 북유럽 국가들이 추구한 포괄적인 보편적 복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국과 미국처럼 선별적 지원을 하는 모델이 아닌 체제가 존재하기 때문에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라는 이분법을 남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이분법이 오해와 왜곡을 낳는다.
오해와 왜곡을 불러일으키는 다른 주제는 스칸디나비아 국가 모델이다. 보수 언론들은 스칸디나비아 복지국가가 과거와 달리 크게 수정·변형됐거나 심지어 폐기됐다는 점을 강조한다. 보편적 복지국가 자체의 의미가 사라졌거나 폐기됐다는 것이다. 혹은 보편주의가 선별적 체제로 바뀌었다고 강조한다.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스칸디나비아 국가의 복지 체제는 다른 체제보다 사회민주주의적 성격이 강하고, 그 점에서 복지 혜택이 보편적이다. 다른 어떤 복지국가 모델보다 시장의 개입을 줄이려 하고, 여성의 복지급여를 보장한다. 평등 관점에서 상대적으로 우월하다는 것도 인정할 수 있다. 
스칸디나비아 복지국가 모델이 여러 면에서 부럽고 모범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유 때문에 북유럽 모델은 당장, 그리고 한동안 한국 사회에 적용하기 어려운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한국 사회는 세계화에 급격히 내맡긴 1990년대 들어서야 사회적 복지 체제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의 노사관계는 이미 1938년에 노사관계에 대한 안정적인 사회적 협약을 구축한 스웨덴과는 다른 상황에 있었다.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서 노사관계나 고용문제는 세계적 경쟁을 하는 대기업들의 이해관계에 민감할 수밖에 없음에 따라, 안전과 안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복지 체제 측면에서 상당히 불리했다. 
북유럽의 보편적 복지국가 모델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무조건 한국 상황에 적용하면 안 된다. 복지국가 모델이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한동안 한국이 추구할 유일한 모델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 나라들은 우리나라와 역사적 상황이나 경로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러 면에서 나는 보편적 복지가 아니라 오히려 독일과 프랑스의 복지 체제가 한국에 적용될 수 있는 모델이라고 여긴다(최근 필자는 저서 에서 이 문제에 관해 상세하게 논의했다).

복지는 진보나 국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최근의 복지 논의가 정치적 이념에 따라 전개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잘못되거나 유감스러운 일은 정치적 이념이 단순하고 독단적인 방식으로, 곧 경직된 진영의 논리에 따라 설정돼 있는 것이다. 보수 쪽은 과도하게 시장 논리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기본적으로 일정하게 시장 논리를 인정하고 유지하더라도, 복지 혜택을 실질적으로 소득 대비 50~70%까지 제공하는 일은 정치적으로도 가능하며 이로울 수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비록 건강보험 영역에서 미국이 수혜 범위가 작은 정책을 유지하는 점이 있지만, 한국 사회는 미국보다 저열하고 낮은 수준의 복지 혜택을 제공한다는 것을 보수는 알아야 한다.
그와 달리 진보 쪽은 다소 교조적으로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방식을 정답으로 내세우면서 서로 간에 존재하는 역사적 경로의 차이를 간과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와 다른 길을 오랫동안 걸어왔다. 그 과정이 옳았다고 말할 필요는 없지만, 그 과정이 오래 지속됐고 여러 개의 긴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국립대 등록금처럼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것에는 적극적으로 개입하더라도, 정부에 복지를 전적으로 맡길 필요는 없고 그럴 수도 없다. 의료보험이 잘되고 있는 독일에서도 소득 상위 30% 정도는 공적인 건강보험에 가입하지 못하고 민간보험에 가입한다. 보수 쪽이 미국보다 못한 복지 혜택을 유지하면서 국민이 팍팍한 삶을 살게 만든다면, 진보는 복지정책에서 시장이 빠져야 한다고 단순히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복지는 정부의 전유물이 아니다. 정부와 함께, 가정과 시장이 함께 작용한다고 보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복지는 진보의 전유물도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수적이거나 자유주의적인 성격을 적잖이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보편적 복지정책을 펴는 것만으로 사회적 갈등이 해결된다고 믿을 필요가 없다. 
 jinsok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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