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21일 수요일

[사설] 학자는 떠나고 정치꾼만 설치는 교과서 개편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1-09-20자 사설 '학자는 떠나고 정치꾼만 설치는 교과서 개편'을 퍼왔습니다.
정부가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멋대로 바꾼, 역사 교과서 집필준칙(각론) 개악 사태가 확산되고 있다. 이번엔 역사 교육과정 개발 추진위원회(추진위) 위원 20명 가운데 9명이 사퇴했다. 추진위는 실무기구인 역사 교육과정 개발 정책연구위원회(연구위) 상위기구다. 학문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개념을, 이념적 이유에서, 일부 친정부 단체의 요구에 따라, 정해진 절차를 무시한 채, 교과서에 싣도록 했으니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던 일이다. 지난달 연구위원 24명 가운데 21명은 원상회복을 촉구하는 집단성명을 발표했었다.
추진위원들이 사퇴라는 마지막 선택을 강행한 배경은 연구위원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다만 연구위의 각론 고시안을 심의하고 동의했던 상위기구로서 이런 사태를 묵과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추진위가 정권 들러리로 전락하는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이다. 추진위로서는 이 문제를 논의해야 마땅했으나, 대통령 직속기구인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한 이배용 추진위원장은 안건 상정을 거부했다.
애타게 호소한들 반공과 시장만능 그리고 친일 정당화라는 이념과 이해에 사로잡힌 편협한 정권이 귀담아들을 리 없다. 하지만 학계와 전문가를 무시하고 편향된 정책과 정실 인사를 멋대로 밀어붙인 결과 초래된 오늘의 위기를 직시한다면, 그리고 학생들이 겪게 될 혼란을 걱정한다면 당장 학계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 학자는 떠나가고 정치꾼들만 남아 교과서를 집필하면서 어떻게 국격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반대자가 나갔으니 혹시 새 교과서 제작 과정을 일사천리로 진행하게 됐다고 좋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교과서의 정당성은 이미 부정당했다. 앞으로 나올 교과서의 운명은 이 정권과 함께 끝날 수밖에 없다. 학생과 교사, 학계와 출판사, 이 정권 모두에게 불행이 아닐 수 없다.
학계 의견처럼 민주주의는 자체로 완결된 개념이다. 제한이나 수식은 오히려 문제만 낳는다. 박정희 정권은 ‘한국적’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국민주권을 제한했고, 북한은 ‘인민’ 민주주의를 앞세워 전체주의를 제도화했다. ‘자유’ 민주주의는 시장지상주의와 남북 대립을 강조하는 이들이 주로 사용했던, 학문적으로 불명확한 개념이다. 교과서는 제발 학계에 맡겨라. 정전사태나 대한민국 ‘셧다운’ 가능성 등 정부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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