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21일 수요일

이념이 불편한 사회


이글은 한겨레신문 hook의 2011.09.20자 기사 '이념이 불편한 사회'를 퍼왔습니다.

예술사회학. 미학과 정치 사이에서, 일상과 아방가르드 사이에서,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에서 사회 문화 비평을 합니다.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 에서 아방가르드 예술의 사회운동적 성격에 대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http://blog.daum.net/jayuin666 트위터 @gaLaYoung


요즘 독해가 어려운 말들이 자꾸 눈에 보인다. ‘합리적 중도’, ‘합리적 보수’, ‘개혁적 보수’ …… 나는 이런 표현들을 볼 때마다 이념 번역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포장의 방식을 바꾼다고 내용물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중 가장 난해한 것은 ‘중도’의 정체다. 현실적으로 보면 일반 대중 사이에서는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사람들이 이 중도라는 용어에 편승한다. ‘정치적 무관심’과 중도가 혼동되고 있다. 그리고 사회의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정치적으로 안전하게 두기 위한 ‘정치적’ 태도로써 ‘중도’라는 말을 활용한다. 이렇게 중도라는 개념의 남발도 거북한데 이 보다 더 불편한 현상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많은 대중들처럼 나 역시도 안철수라는 ‘인물’을 참 호감가는 지도자로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안철수’와 ‘안철수 현상’을 구별하고 싶다. 안철수 원장은 평소에 존경할 만한 사회적 인물로 여기지만 안철수 현상은 어딘가 불편하다. 이 불편함의 근원을 한 동안 생각해보았다.
1. ‘탈이념’적 정서의 허탈함
안철수 현상의 가장 본질이 ‘기존 정치에 대한 실망’, ‘탈이념’으로 분석되고 있다. 기존 정치에 대한 실망이야 이해하지만 그것의 연장선이 탈정당, 탈이념이 되어 돌풍을 일으키는 사회라……. 난감하다. 이념을 아우르는 것과 이념을 떠나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중도라는 이름을 두른 이 탈이념적 정서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우선 여야, 혹은 좌우가 싫다고 하여 그것을 중도라고 부르는 것이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그리고 남한 땅에서는 제대로 이념을 펼쳐본 적도 없다. 이념 억압의 땅이었고 현재도 이념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지 않는 나라다. 이념의 자유를 위해 투쟁을 해도 모자랄 판에 맥 빠지게 탈이념이 도착했다. 마치 모더니즘도 없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상하게 들린다. 도대체 무엇으로부터의 ‘탈’을 말하는 것일까.
남한 땅에서 생각하는 이념이라는 단어에 대한 짙은 편견 때문에 이런 현상이 가능하다고 본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동일 개념으로 착각할 정도로 이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회다. 분단의 현실 속에서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은 우리는 이념이라고 하면 피곤하고 불편하게 받아들인다. 냉전도 종결된 마당에 마치 더 이상의 이념 논쟁은 촌스러운 것인 냥 여기기도 한다. 탈이념이야 말로 세련된 것처럼 여겨질 정도다. 그래서 이념을 초월한 정치를 원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이념을 덮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 이념은 역사 속에서 언제나 존재하는 문제였다. 이념이란 시대가 추구하는 가치이며 세계관이다. 또한 그 다양한 가치들의 충돌 현상이다. 우리는 탈이념을 말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념의 자유를 보장하고 오늘날 추구해야 할 이념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이념은 어디까지나 역사 인식의 한 방법론이며 계급 투쟁은 사유하는 인간의 존재 방식이다. 그러나 아직도 ‘노동자’를 말하고 ‘계급’을 논하는 것이 어려운 사회다. 계급사회에 살면서 계급논쟁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회. 같은 노동자, 즉 사회의 ‘을’도 같은 ‘을’의 투쟁을 불편해하는 경향이 짙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문제적 경향이다. 수구적 지식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구적 노동자도 있다. 인간보다 시장을 중시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역사가 진행되고 있다. 까발려져야 하는 절대 빈곤이 외면당하고 있다. ‘복지’는 선거용 미끼로 전락하고 있다. 있는 애들도 감당 못하면서 국가 경쟁력을 위해 애 낳으라고 선동한다. 기업 내에는 계급사회가 굳어졌다. 파견직, 계약직, 정규직. 이 구조를 부숴버리기 위해 개개인은 힘이 없다. 살아야 하기에 그저 자신이 정규직이 되려고 발버둥치는 수 밖에 없다. 그러니 모두가 피곤하다. 악순환이다. 그렇기에 근본적 구조에 대한 개혁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역사 인식은 필수적이다. 하여 탈이념을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2. 투쟁의 대상을 파악하기
얼마 전 쌍용 자동차 파업을 다룬 다큐멘터리 을 보았다. 지금도 그 전쟁은 지속되고 있다.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이 노동자들의 투쟁을 ‘그들의 투쟁’으로 소외시켰다. 2009년 여름에 대한민국 하늘 위로 날라가던 노란 풍선은 바로 그 해 여름 일어난 쌍용 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변화를 갈망하는 ‘국민의 정서’는 노란 풍선을 날리고 봉하마을을 줄이어 방문했지만 투쟁하는 노동자는 잊었다. 그런 부분에서 현재 5차까지 진행될 예정인 ‘희망버스’의 의미가 남다른 것이다. 더 이상 한 사람의 영웅이 아닌 모두가 직접 투쟁에 참여하는 희망이 보였다. 기뻤다. 그러나 강력한 우상의 돌풍에 노동자들의 울분의 소리는 다시 가려지고 있다. 이제 또 슬프다. 
노동자, 즉 넓은 의미의 노동자에 속하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진짜 을의 권리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사회에 분배 정의를 제대로 인식한다면 투쟁을 향한 울분에 더 동참해야 한다. 허나 자신이 노동자이면서도 인간의 존엄함보다 시장에 가치를 두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세뇌 당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저항하고 투쟁으로 부숴야 하는 이념의 정체다. 자본. 신이 되어버린 자본. 이렇게 저항해야 하는 대상이 있으나 그 대상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위험한 성질이다. 이것은 정치적 민주화와도 무관하다. 오히려 독재 시절에는 저항해야 하는 명백한 대상이 있었다. 공공의 적.
정치적 민주화라는 무늬 속에서 투쟁은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되고 있다. 독재자라는 ‘공공의 적’이 보이지 않기에 투쟁의 대상이 사라졌다고 믿는다. 그렇게 자본의 독재는 가면을 쓰고 있다. 독재자는 국제적으로 비난이라도 받지만 오늘날 자본의 독재는 국제적 연대를 통해 더욱 공고히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냉전 시대에는 열심히 정치적으로 반공 교육을 시켰다면 지금은 경제적으로 반공 교육을 시키며 자본주의 시장의 흐름을 막는 것을 불온한 세력으로 몰고 간다. 그리하여 복지에는 포퓰리즘이라는 칠을 하고 의료체계에 사회주의의료라는 이념적 공격을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인간성보다 이윤이 중시되는 이 전지구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는 자신이 ‘사적으로’ 소유했다고 믿는 생산수단(노동자)을 자유롭게 폐기처분(정리해고)하고 노동계약의 자유로움(비정규직)을 누리고 있다. 그들의 세상이다. 그래서 희망하지 않는 희망퇴직, 명예롭지 않은 명예퇴직을 조장하고 정규직이 귀족이 되게 만드는 이 교활한 구조가 이념과 무관할까. 장하준 교수의 책을 정부에서 ‘불온서적’으로 분류하는 국가에서 이념을 말하지 않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한 여자가 250일이 넘게 높은 크레인 위에서 온 몸으로 계급투쟁 중이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이 문제를 이념적으로 정면 돌파하지 않고 개혁이 가능한가. 이 상황에서 탈이념을 말하는 것은 옳은 일일까. 그것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많은 처참한 것들을 그냥 무마시키겠다는 태도다. 대부분 자기는 노동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말해야 하는 진실들이 분명 존재한다.
개인은 사회를 떠나 존재할 수 없듯이 사회의식을 가지는 것은 생각하는 인간의 기본이다. 그것이 의식의 불구자가 되지 않는 길이다. 이념이란 결국 사회의식의 다른 말이다. 허나 이념이 그저 먹물들의 공론일 뿐 먹고 사는데 아무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는 의식이 팽배하다. 먹고 사는 것과 분명 상관 있다. 당장 시끄럽게 지나갔던 무상급식 문제도 결국 이념간의 충돌이 배경이다. 그럼에도 지친 사람들은 이념을 논하며 스스로 투쟁하기 보다는 한 명의 뛰어난 영웅이 멋지게 활약해 주길 원한다. 바로 지친 국민의 정서. 노란 풍선은 날렸지만 쌍용을 잊었던 그 정서.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될 때도 국민이 그에게 바라는 정서가 있었다. ‘경제 살린다고 해서……’ 그래서 그게 답이었나. 아니다. 오늘날 유럽에서 고개를 들이미는 국민의 정서, 극우의 부상. 그것이 답인가. 아니지 않은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죽었을 때도 국민은 눈물을 흘렸다. 그러므로 우리가 파악해야 할 것은 지친 국민의 정서라는 그 현상의 겉면이 아니다. 현상의 가면 속에 본래의 얼굴을 가린 투쟁의 대상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바로 이념은 그 가면을 벗길 수 있는 정확한 도구다. / ga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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